문장웹진(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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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일본식 정원과 글쓰기의 미
요컨대 그 글쓰기 과정은 굳이 ‘일본’을 강조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고전 일본 정원을 만드는 이의 작업방식이나 태도와 상당히 유사하다. 내가 일본식 정원 만들기와 글쓰기를 비교했다면, 흥미롭게도 1960년대 말 바르트는 일본의 식사 양태를 글쓰기와 유비시켰다. 일본을 기호학적으로 푼 한 책에서 그는 두 행위가 “우주에 위계질서를 부여하는 심오한 공간”에서 행해진다고 주장한 것이다(Roland Barthes, L'empire des Signes, 김주환 ? 한은경 역, 『기호의 제국』, 민음사, 1997, 22쪽). 바르트는 일본 문화에서의 식사가 물질의 축소된 세계 안에서 ‘흔들리는 기표’를 취사선택하고 음미하는 행위라면, 글쓰기는 ‘불확실한 언어에 기초’하면서 그 모호하고 완전히 이해될 수 없는 언어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쾌락적 행위라는 뜻에서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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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월평] 작용과 반작용, 세상과 글쓰기
이때 저 소년이 던지는 ‘쇠공’은 우리의 글쓰기를 비유하는 것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저 쇠공이 밀어내는 강한 힘으로 허공을 꿰뚫고 지나가는 세계”라는 구절에서, ‘쇠공’ 대신 ‘글쓰기’라는 말을 놓고 읽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허공을 향해 던지는 쇠공, 글쓰기는 나를 둘러싼 익숙한, 혹은 혹독한 세계를 파열시키고 균열시킵니다. 이렇게 세상이 내게 가하는 힘과 교섭하거나 거스르는 행위 속에서, 진정한 ‘나만의 삶’이 가능해지는 것 아닐까요. * 「가을날의 삽화―녹슨 삶을 위하여」에서 ‘가을날’의 풍경은 ‘저물어가는 삶’을 환유적으로 지시하고 있습니다. 이 시에서 가을은 시간적으로 쇠락하고 저물어가는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삶’ 역시 비슷한 이미지를 가집니다. 그런데 진술로 보았을 때에는 ‘가을날’과 ‘삶’이 사뭇 대조적으로 읽힙니다. 이 시는 일관되게 ‘~했을 때’ ‘~을 보았다’라는 진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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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에세이] 오래 외면 받고, 때로 외면하는 글쓰기
빚진 글쓰기였다는 생각이 날 괴롭혔다. * 그러다 우연히 지역 문학 동아리 모임인 <소래문학회>에 나가게 됐다. 한 달에 한 번 회원들이 모여서 합평을 하고 있었다. 시와 수필, 소설을 쓰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시를 썼고 합평도 시 위주로 이뤄지고 있었다. 그 분위기에 쓸려 나도 시를 써볼까, 겁 없는 생각에 붙들렸다. 그렇지만 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학창 시절을 다 합쳐도 시를 써본 기억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그 몇 번의 글짓기에서 상을 탄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 기억들이 슬그머니 날 부추겼다. 흔히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내게 딱 맞는 말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치기 어린 감상과 손에 잡히지 않는 흐릿한 관념, 소재주의, 성찰 없는 묘사 등이 난무하는 시를 써 합평회에 참석했다. 그런 시에 뭇매가 쏟아졌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고 그만 포기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