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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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훈이네 복덕방〉 아줌마는 손이 컸다
<훈이네 복덕방> 아줌마는 손이 컸다 김연경 1988년, 우리 가족은 월세 단칸방에서 방이 세 칸이나 되는 전셋집으로 이사 갔다. 우리 동네에는 〈뭉치 슈퍼〉, 〈구슬동자〉, 〈승리반점〉, 〈대포 마을〉, 〈익돌이 피아노〉 등 없는 게 없었다. 하나같이 우리 삼남매에게, 아니면 엄마 아빠에게 꼭 필요한 곳이었다. 하지만 우리 집 골목 어귀에 있는 〈훈이네 복덕방〉은 아무리 봐도 뭘 하는 곳인지 통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사고팔지 않고 뭘 가르쳐 주지도 않는 이상한 가게였다. 그 집 큰아들은 이미 직장에 다녔고 작은아들도 내년에 제대하면 얼마 안 있어 졸업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다 크면 어른들은 저렇게 놀아도 되는 모양이고 〈훈이네 복덕방〉은 어른들의 놀이터라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었다. 〈훈이네 복덕방〉의 아줌마와 아저씨는 아침 9시면 2층에서 내려와 문을 열었다. 문이 닫히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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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우연론과 인과론
우연론과 인과론 김연경 1. 삼촌의 귀향에 대한 얘기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집을 아주 예술적으로 지어 놨더라.” 이런 말로 아빠는 운을 뗐다. 그 예술적인 집을 짓느라 6천만 원의 거금이 들어갔단다. 아이러니는커녕 동경이 십분 배어나오는 어조였다. “사는 것도, 뭐라 카꼬, 억수로 예술적이더만.” 삼촌은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먹고 책상 앞에 앉는다. 최근에는 희랍어를 배우는 재미도 쏠쏠하다. 오전에는 텃밭을 가꾸고 오후가 되면 차를 몰고 읍내로 나간다. 늦은 저녁, 텃밭에서 거둬들인 것을 다듬고 다시 책상으로 간다. 어둠이 내리면 기다렸다는 듯 잠자리에 든다. “용태가 돈도 어북(어지간히) 벌었 놨는 갑더라. 딸들도 다 컸것다, 차도 있것다, 냉장고도 있것다, 에어컨도 있것다……. 옛날에 우리 살 때랑 같나…….” 그 옛날, 그 자리에는 우리 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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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깍두기
깍두기 김연경 “뭐야, 반찬이 깍두기뿐이야!” 동생이 소리를 내질렀다. “배추김치와 파김치도 있잖니?” 엄마가 말했다. 그러자 아빠도 거들었다. “역시 설렁탕 전문집이야. 국물이 진국인 걸. 이 기름 좀 봐.” 아빠는 설렁탕 위에 둥둥 떠 있는 싯누렇고 굵직한 기름방울들을 가리켰다. 하지만 동생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희뿌연 설렁탕 국물 속에 들어 있는 하얀 소면을 휘저어볼 뿐이었다. 김치에는 아예 손도 대지 않았다. ‘외식’이라는 황홀한 말을 듣고 동생이 기대한 것은 외국어가 들어간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피자집이었다. 고작 설렁탕 집에 오려고 아침부터 그렇게 흥분하여 옷을 챙겨 입었다고 생각하니 억울하고 분했다. 스테이크나 파스타, 립, 포테이토, 킹크랩 등 힘들게 외운 메뉴들이 동생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럴수록, 희뿌연 설렁탕이 더 증오스러워졌다. 맛있는 반찬이라도 나오면 이 모든 것을 용서해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