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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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비평 문보영-일기
‘일기’ 장르에 관해 ‘내면’이 여전히 중요한 요인으로 개입한다면, 이는 그간의 한국 문학이 주체의 진실한, ‘본질적인’ 내면을 재현하는 문학적 양상 속에서 발견해 냈던 ‘진정성’ 혹은 ‘포스트-진정성’ 담론과 구별된 지점에서,11) 나아가 ‘진정성’의 전유 주체를 심문하는 것으로 그것을 탈오염화했던 바로 그 의미12)로부터도 구별된 지점에서 독해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일기’와 ‘내면’의 관계는 세계와 불화하는 주체가 참된 자아와의 사이에 건설하는 공간으로서의 ‘내면’13)의 층위가 아니라, 문학이라는 제도가 구성의 원인으로서 개입하는 ‘내면’, 즉 ‘진정한 내면(원인)’과 ‘표현으로서의 글쓰기(결과)’가 “자리를 교대하며 뒤섞이는 인과의 복잡성을 수락하는 종류”14)의, 재독된 가라타니적 층위에 노골적으로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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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로빈손 크루소와 그 후예들 [2]
일기는 1659년 10월 3일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배가 난파해 외딴섬에 표류한지 나흘째 되는 날이다. 따라서 많은 축약본에서와 마찬가지로 로빈슨이 항해를 나서게 된 동기나 난파하기까지 겪었던 성공과 실패, 그리고 그러한 일련의 사건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로빈슨 자신의 내면의 격동과 신앙적 갈등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생략된다. 물론 일기 자체에서도 원작에서 보였던 일상과 내면의 면밀하고 치밀한 묘사 역시 마찬가지로 생략된다. 대신 난파선에서 건져낸 물건들, 절벽 밑의 거처, 배 만들기, 광주리와 지게 제작, 도자기 굽기 등 주변 사물과 작업에 대한 정보가 그림들로 주어진다. 그림은 눈에 보이는 대상에 대한 정보를 자못 사실적이며 구체적으로 제공하는 장점을 지니지만, 궁극적으로는 오로지 무인도에서의 생존 방식과 ‘공작인’으로서의 로빈슨에 초점을 맞추는 결과가 된다. 이는 최근 유행하는 '살아남기' 류의 책들과 같은 맥락의 발상이다. 이 책이 독일에서 출간된 연도를 보니 1974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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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열여섯, 우리들의 타화상 [1]
베르테르는 그가 남긴 일기 형식의 편지로 자신의 내면을 독자에게 드러내고,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죽은 재준은 일기를 남긴 것으로 설정된다. 편지와 일기로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을 위해서는 따로 해설자가 도입되는 것도 비슷하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는 그가 남긴 자취들을 편집하고 정리하는 편집자가 있고,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에서는 재준의 일기를 읽어가는 가장 친한 친구 유미가 있다. 결정적인 차이는 있다. 베르테르의 편집자는 개인적인 프로필이 전면에 부각되지 않는다. 그의 역할은 독자에게 베르테르에 대한 자료를 보여주는 것뿐이다. 그가 해설자로 나서는 것도 베르테르의 편지가 끊기고 그 뒤의 행적을 설명할 필요가 있는 부분, 즉 뒷부분에 집중된다. 그러나 유미는 처음부터 재준의 일기를 보충하고 설명하는 역할에만 그치지 않는다. 유미 자신의 삶이 재준의 이야기와는 별개의 담론을 이룰 정도로 스토리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