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6)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첫사랑
농민이 앞을 가로막자 여중생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국민학교는 같이 다녔었는데, 중학교 다니는 동안에는 거의 만나지 못해서 거의 모르는 사이처럼 된 아이들이었다. “미순아, 얘기 좀 하자.” 농민이 단호하게 말하자, 약간 겁먹은 미순은 설레발치듯 말했다. “어, 농민이구나. 오랜 만이야. 넌 학교를 걸어 다닌다면서, 벌써 왔어?” 내가 다니는 중학교는 12킬로미터 떨어진 읍내에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면소재지에서 버스를 타고 통학했지만, 농민처럼 없는 집 학생들은 두세 시간 정도를 마라톤하듯 다녔다. “난 오늘 못 갔어. 난 못 갈 때가 더 많아. 저, 미안한데 단둘이 좀 얘기할 게 있어. 니들은 좀 먼저 가.” “왜 그래? 무섭게.” “제발, 할 말이 있어.” 농민은 미순이 오해하지 않도록, 최대한 간절함을 눈빛에 담아 말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순이 말했다. “너희들 저기까지만 먼저 가 있을래. 너무 많이 가면 안 돼.”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누이 생각 - 사람이 詩보다 크다 외1
금년엔 뭘 해야 할지… 이것 허카 저것 허카, 남들 안 허는 것 허여사 값주는디……허멍 꼭 경마장에서 도박 허듯 농민이 직접 찍어야만 허는 현실 어느 농민이 올린 댓글을 읽다가 함덕에서 세 오누이 거느리고 몸이 아픈 서방 돌보며 농사짓는 누이는 이 봄 무슨 농사를 찍고 있을까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사소한 기억 하나
곡우를 맞아 농민들이 맨 먼저 하는 일은 볍씨 담그기였다. 소독한 물에 볍씨를 담가 두어야 싹이 쉽게 트기 때문이다. 마산 앞바다에 수장되었던 김주열의 시신을 보았던 그들은 농민들답게 이렇게 여겼던 것이다. 사람을 볍씨 취급하다니! 그러나 삶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그들에게는 지나간 사건을 차분히 되살려 볼 여유란 없었다. 사일구가 그처럼 일상의 뒤편으로 밀려나 희미한 역사적 사건이 된 게 특별한 일은 아니다. 사일구뿐만 아니라 다른 사건들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즈음 사일구가 존재감이 미미한 사건처럼 여겨졌던 이유는 최근의 사건인 광주민중항쟁의 기억이 선명하여 그보다 오랜 과거가 봉인된 탓도 있을 테고, 사일구 정신의 계승자로 자처하던 정치인들이 이미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변질하여 기성 권력을 구성하는 세력이 되었던 탓도 있을 게다. 그러니까 내가 바로 사일구 정신의 계승자야! 라는 주장은 내가 바로 부패한 정치인이야! 라는 말과 같다고 여겼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