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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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산신(山神)을 만나다
노인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곧 알았다는 듯 기침소리를 한 번 내더니 흥국 씨의 목과 허리를 감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흥국 씨는 다시 한 번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이동을 체험했다. 보통 사람은 평생 한 번 할까 말까 한 경험을 하룻밤에 두 번이나 한 것이다. 흥국 씨와 노인은 어느 저택의 정원에 서 있었다. 정원사 두 사람이 매일같이 관리하는 깨끗한 정원이었다. 새벽이었고, 운치 있는 가로등도 있었고, 가로등 밑에 앉을 수 있는 의자와 탁자도 마련되어 있었다. “여기가 건설 회사 회장 집인가?” 노인이 물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흥국 씨는 이렇게 말하고 전화기를 꺼냈다. 그리고 사용할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번호를 입력하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말씀하시죠.” 한참동안 신호음이 간 다음에야 자다가 깬 목소리가 말했다. “지금 회장님 댁 정원입니다.” 흥국 씨가 말했다. “역시 재주도 좋으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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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내 피부를 찾아주세요
그것에만큼은 부작용이 파고들 공간을 내어주지 않기로 한 것처럼 치밀하고도 흡착력이 좋은 마음의 분말이었다. 새살이 붙어 가는 것처럼 규진의 연구 또한 나날이 성과를 거두었다. 뉴진은 연구소에서 요구하는 대로 충실하게 따라 주었다. 하지만 파우더가 막지 못한 마음이 터진 때도 있었다. 오래 두고 뿌려 왔던 지점이 아예 송두리째 갈라져 버린 것이었다. 챠오밍과 오랜 협의 끝에 이혼을 한 날이었다. 일이 바쁘다거나 다른 사랑이 생겼다거나 하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결혼생활이 멈추었고, 아이가 조기 유학을 위하여 다른 나라로 떠나자 그 둘은 다가오는 수순처럼 결혼을 중지시켰다. 이유를 대라면 분말보다 더 많은 입자들로 채워진 말들을 할 수 있었겠지만 둘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평상시와 다름없이 아이와 함께 놀이터에 나갔던 규진이 등에 상처를 입고 돌아온 날이었다. 아이가 하늘로 쏜 화살이 대기권 어디쯤을 찍고 내려오면서 하필 규진의 등을 스친 것이 화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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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남은 해도 되지만 내가 하면 안 되는 것들의 목록
남유당의 사랑채에서 안채로 건너가려면 정원을 지나야 한다. 정원 한가운데 작은 동산이 조성되어 있다. 동산에는 둥치가 휜 소나무들이 어른어른 호랑이 무늬의 그늘을 드리우고 소나무 아래 그늘진 곳엔 키 작은 관음죽들이 자란다. 바람이 불면 양지에 선 줄기 가는 나무들이 팔랑팔랑 잎을 뒤집으며 사방에 빛을 흩뿌린다. 그늘은 깊고, 햇빛 비치는 쪽은 명랑하고 나른하다. 은영은 답사를 통해 수많은 고택들을 두루 봤지만 남유당처럼 호화로운 집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개인 소유의 주택이라 한들 민속자료로 지정까지 되었는데 어떻게 남유당을 몰랐을까. 왜 문헌에서 본 적도 없었을까. “동학혁명이 일어난 갑오년, 그 해 우리 증조부는 전주 감영의 아전이었어.” 그러고 보니 유정호에게선 아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것도 같다. 종가는 쇠해도 향합은 남는다는 형수의 말은 맞다. 백년이 지났어도 아전의 촐싹거림을 벗어나지 못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