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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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4․3문학을 넘어 매직리얼리즘으로
보면 <빌러브드>라는 작품의 형식이 매직리얼리즘이에요. 매직리얼리즘은 환상적 마술적 사실주의이지요. 어릴 때 어미가 어쩔 수 없이 분노해서 죽인 자기의 어린 애기가 유령으로 집에 있는 거야. 그렇게 정통리얼리즘이 아니라 매직리얼리즘도 생각할 수 있잖아요.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도 다 매직리얼리즘이고, 우리 경우는 황석영의 『손님』이 매직리얼리즘이지요. 황석영이가 순발력이 있으니까 매직리얼리즘을 적용한 것입니다. 우리는 정통리얼리즘만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되거든.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어요. 형식의 새로움을 보여준 거지요. 형식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소설에. 또 하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작품이죠. 대학교 때 읽어보다가 어려워서 못 읽었어요. 소위 유신과 관련해서, 그러니까 박정희 정권에 대응하는 실천으로서 문학을 하는 것이잖아요. 그것이 민족문학 민중문학인데. 그러다 보니까 마르셀 프루스트가 싫어졌죠. 그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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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연재에세이:비문학영역(3회)]내 여동생이 이렇게 라이트노벨 제목을 길게 지었을 리 없어-2
아즈마 히로키는 리셋과 반복이 가능한 ‘메타 이야기 환경’을 들어 ‘게임적 리얼리즘’이라는 새로운 리얼리즘의 등장을 역설한 바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설명한 끊임없는 외부에 대한 의식이, 그러니까 리얼리즘에 대한 잠재적인 욕망 자체가 오히려 저 새로운 리얼리즘의 성립을 저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어째서일까. 사용자를 위해 존재하는 ‘인터페이스’적인 것이야말로 지극히 ‘게임적’인 것이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리얼리즘’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텅 빈 공간으로서의 ‘인터페이스’가 그 외부에 존재하는 ‘리얼’을 ‘리얼’에 대한 데이터로 양식화시켜 버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어째서일까? 나로서는 그것에 대해 충분한 답변을 내릴 수는 없지만, 저 ‘게임적 리얼리즘’이 과연 ‘리얼’과 합치될 수 있는 것인가, ‘리얼리즘’의 전제라 할 수 있는 ‘리얼’에 대한 욕망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 것인가, 의구심이 자꾸만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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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우리 시의 다양성과 새로움
첫째는 1980년대의 리얼리즘이 서정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면은 리얼리즘 정신의 약화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 듯합니다. 서정화를 계기로 리얼리즘 시의 심미성 문제가 깊이 있게 제기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리얼리즘 시가 서정화된다.’는 것 자체가 꼭 미학적 성공을 담보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것이 리얼리즘도 방법적 모색이 필요하다는 성찰적 의식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시영 시인이 시도하는 서술시, 백무산 시인의 자본주의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가 이런 지점과 관계가 있습니다. 한편 정치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워진 지금 시점이 서정시가 만개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변화를 생산적인 변화의 가능성으로 볼 수 있을 듯합니다. 두 번째는 ‘추의 미학’의 발견입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조금씩 보였던 것인데, 이 경향이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까지 풍미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