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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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눈 먼 가수의 길
눈 먼 가수의 길 김형수 어릴 때는 어린 노래가 있었다 담양에 가면 외항선을 타던 선배가 양담배를 피우며 항구의 노래를 들려주고는 했다 벽지의 골방에도 시골 논둑에도 노래가 가득 차서 천지는 푸르고 기분 나면 읍내 관방천 토끼장까지 찾아가 흘러간 노래를 붙들고는 했다 생각난다 길이, 그 수많았던 길의 얼굴들이 가난과 독재, 실패한 연애의 계절에도 노래는 우거지고 나무도 잎새도 그 위의 하늘도 선율로 가득한 젊음이 끝나도 목 쉬어 우는 소멸의 노래가 다시 살아나 풀잎 시든 벼랑에도 메아리가 있었다 자살한 친구의 수첩에도 그 발자국이 있었다 세상은 가도 가도 악보의 지붕들 전봇대들 도로들 얼마나 먼 곳, 우브르항가이에서도 늙은 아낙네가 소녀 적에 배운 이별가를 부른다 아, 케이프타운 뒷골목 검은 황혼에도 사랑이 흘러 노래는 내내 저물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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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너무 먼 길 - 매혹, 당초문 외1
너무 먼 길 박흥식 너무 먼 길 흙먼지 매캐한 것처럼 자식으로서도 남편이나 애비로서도 너무나 멀어진 가는 길 울컥, 처음 만난 스치는 가지 가지 늘어진 버드나무가 젖어 있을 줄이야 몽두(蒙頭) 그 너무 먼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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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눈 먼 노파에게 길을 묻다 - 동지(冬至) 외 1편
눈 먼 노파에게 길을 묻다 박홍점 오늘 죽을까? 내일 죽을까? 밤낮으로 뒤집어져 궁리하다가 길을 알려준다는 눈 먼 늙은 노파를 찾아간다 그녀는 나에게 꼭 시집만 한 빈 공책 두 권을 건네며 돌아가란다 답을 얻으러 갔다가 질문만 받아 온 셈 도대체 뭐라는 거야? 석 달 열흘 누워 생각하다가 햇빛 쨍한 봄날 날 잡아 다시 갔더니 이번에는 손잡이가 있는 막대기 하나 건네며 돌아가란다 어쩌라고 도대체? 그때 느닷없이 마른하늘에 빗방울이 두 두 두 둑 횡단보도 앞 애꿎은 한련화 수북한 화분을 내리쳤는데 글쎄 막대기가 활짝 펴져 우산인 것이다 한 손에 우산 들고 한 손에 펼쳐 보지도 못한 공책 두 권 감싸 안고 이제 우산이 펜이 될 차례인가? 공책과 공책을 잇는 다리가 될까? 교환 일기를 쓰듯 너와 나를 잇는 사랑이 될까? 묻고 또 묻는 사이 손톱이 자라고 머리카락이 자라고 밤낮으로 올빼미가 째각거린다 나는 여전히 살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