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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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프루스트 : 목소리, 숨소리 그리고 음악
잠깐 책을 보다가 가만히 방문을 열어보았을 때 할머니는 가을날 오후의 잔광 속에서 깊은 잠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숨소리가 들렸다. 깊고 고르고 부드러운 그 숨소리는 병들어 잠든 노인이 아니라 세상으로 도착한 지 얼마 안 되는 유아의 숨소리 같았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린, 아무런 애환도 더는 존재하지 않는, 어머니 젖무덤 사이에서 잠든 아이처럼 다만 편안과 안심으로 자기 안에 꼭 담겨 있는, 그 전에는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던 할머니의 숨소리 혹은 목소리... 하지만 할머니의 그 목소리를 나는 그날 이후 다시 들어보지 못했다. 곧 먼 나라로 유학을 떠났고, 어느 해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아침 전화를 받았고, 돌아왔을 때 할머니의 기일은 벌써 몇 번이나 지나간 뒤였으니까. 그 가을날 오후 잠깐 귀를 기울여 훔쳐 들었던 할머니의 숨소리를 두 번 다시 기억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렇게 할머니는 수많은 작은 기억들과 함께 내 망각의 하데스 속에 침묵으로 묻혀 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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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소리經 - 미로 외1
소리經 박주택 숙소에 들었을 때 퀴퀴한 옷장 안에는 섬뜩하니 여자 구두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귀가 맞지 않는 미닫이 문 모서리 부분이 찌그러져 있었다 길을 모아 집을 만들다 뒤꿈치가 닳고 가죽이 저렇게 해어졌을 것이다 바람이 연민을 건드리고 가 누군가가 와야만 따스해질 수 있는 밤 아무 것도 살지 않는 연못 불을 끈 방 휘어진 幽寂으로 파고드는 스르르 하얀 소리들 -흩어져 버렸어요, 달은 꽃잎을 물어뜯고 먼 곳에서 소리는 와요 그 누구도 내게 집이었던 적이 없어요 길을 모아 만든 건 헐떡거리는 일생 울긋불긋한 어둠뿐, 그 안에 숨어 있습니다 깊게 패인 자국이 이불에 덮여 있듯이 나 또한 마음의 미로에 운명을 빼앗겨 꽃이 핍니다 꿈에 불그레한 발자국이 찍혀 물처럼 찢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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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나는 기차소리를 듣지 못하면 소화가 안 된다 - 나무도 스키니 진을 입는다 외 1편
나는 기차소리를 듣지 못하면 소화가 안 된다 사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늙은 역사에는 가난한 별들만 많다 고양이의 눈빛엔 하늘이 밥상으로 보이는 역, 별자리 밑반찬들로 하늘이 점점 좁아진다 누가 저렇게 한상 차려 놓고 간 걸까 철로의 자갈이 서릿발을 눌렀나 하늘밥상의 오른 다리가 기울었다 손등이 붉어진 여인의 귀밑머리가 이어지는 철로로 함박눈이 엎질러지고 말았다 그날 저녁술을 들지 못한 아이들은 날이 어둡도록 기차의 울림을 기다리곤 했다 나는 그런 역의 플랫폼이 좋았다 열차의 문을 나보다 먼저 열고 들어간 반딧불 산바람에 자꾸만 밀려오는 풀벌레 울음은 푸른 깃발이 되어 막차를 떠나보내고 나는 밤하늘 앞에 우두커니 앉아 수저를 들어 본다 내 뱃속에 황소자리 하나가 자리를 잡는다 네 개의 위가 몸속에서 칙칙폭폭 떨린다 나는 그 소리가 좋았다 기차소리를 듣지 못하면 소화가 되지 않는 쓸쓸한 속쓰림이 가득한 늙은 역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