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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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한여름밤의 꿈
>한여름밤의 꿈 서영처 강 건너 맹그로브 숲에는 사나운 어미 호랑이가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내 바이올린 케이스 안에는 젖을 못 뗀 새끼호랑이가 쿨쿨 잠들어 있는데 이 녀석이 수컷일까, 암컷일까, 아무튼 오늘은 내 결혼식날 나는 한껏 부풀린 드레스로 갈아입고 화관을 쓰고 하객들에게 둘러싸여 식장으로 들어섰다 정장을 한 당나귀 신랑이 털북숭이 손을 내밀었다 하객들의 박수 소리, 폭죽 소리, 남이야 쑥덕거리든 말든 누런 달이 떴는데 이상하다, 떡갈나무 아래 어른거리던 그림자 보이지 않네 떠들썩하던 웃음꽃 시들어 가는데 흥겨운 음악도 멈췄는데 자꾸만 근질거리며 발굽이 돋아나고 줄 끊어진 바이올린 금간 틈으로 맹그로브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났다 난 칭얼대는 새끼호랑이를 안고 젖을 먹인다 그래그래 착하지, 라디오에선 강을 훌쩍 건너 뛴 호랑이가 마을을 습격했다는 소식, 숲을 내달리며 집채만 한 슬픔으로 포효하는 저 얼룩무늬, 아직 선물상자들을 열지도 못했는데 어쩌나 아가야― 울울창창해지는 이 숲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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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F. 카프카 : 음치의 음악 혹은 미지의 음식
그건 누이동생의 바이올린이다. 어느 날 저녁, 늘 음식 씹는 소리와 역겨운 사과 냄새만 건너오던 저편 부엌에서 서투른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온다. 세이렌의 노래를 따라가는 어부처럼 그레고리는 아버지가 금지시킨 문지방을 타고 넘어 거실로 나간다. 아무도 누이동생의 서투른 바이올린 소리를 귀담아 듣지 않는다. 오직 그레고리만이 서투른 바이올린 소리의 아름다움에 매혹당한 채 스스로에게 묻는다: “음악에 이토록 감동을 받는데, 과연 내가 동물이란 말인가?” 맹렬한 허기의 황홀경 속에서, ‘마치 그토록 열망했던 미지의 음식에 이르는 길을 찾은 것처럼’, 그는 서투른 바이올린 소리 속으로, 음치의 음악 속으로, 누이동생의 육체로 접근한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까지 몸을 일으키고, 출근을 한 다음부터 리본이나 칼라도 없이 드러내 놓고 다니는 그녀의 희고 긴 목에 키스를’ 한다, 혹은 깨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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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예언자들
바이올린의 선율이 무겁고 진중하게 시작되는 피아노 반주 위를 미끄러지듯 타고 오르는 순간은 잠깐이었다.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가볍게 쥔 활이 자꾸만 손에서 벗어났다. 여자는 활을 고쳐 쥐며 허리를 뒤로 젖히고 바이올린의 넥을 평소보다 높게 쳐들었다. 알레그로의 두 번째 악장이 시작되자 피아노는 바이올린의 제멋대로 바뀌는 템포를 따라가기에 바빴다. 비어 있는 객석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서서히 누적되어 온 공포와 허무가 불시에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은 찾아왔다. 그녀는 자신이 떨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했고, 그럴수록 연주는 점점 더 빨라졌으며,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의 불안이 관객들에게 전해졌다. 한 곡의 피아노 소나타와 한 곡의 바이올린 소나타가 어떻게 연주되었는지 여자는 기억하지 못한다. 연주는 오로지 평생 훈련을 거듭해 온 몸의 감각으로만 겨우 유지될 수 있었다. 부정확한 테크닉과 신경질적인 악기의 음색이 비어 있는 극장 곳곳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