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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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한때 나는 피아노를 쳤지
나는 바흐도 체르니도 내 방식대로 자유분방하게 편곡하는 데 남다른 소질이 있었나 보다. 네 번째 강사는 가정집에 피아노를 놓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아주머니였다. 그녀는 나에게 안방 책꽂이에 꽂힌 책들을 한 권씩 가져다 보라고 말했다. 책은 당시 아동 전집으로는 최고였던 전설적인 <에이브 문고>였다. 비싼 돈을 주고 들여놓은 책을 피아노 선생집 세 아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아 아깝다고 했다. 나는 피아노 연습은 안 하고 <에이브 문고>만 꼬박꼬박 읽었다. 빌린 책과 피아노 교본을 들고 오가다 보니 어느덧 중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다. 나에게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는 건 피아노를 그만 쳐도 되는 나이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나는 기쁘다 못해 황홀한 마음으로 악보를 전부 동생들에게 물려주었다. 이런 얘기를 하면,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거다. “그렇게 싫어하면서 뭐 하러 피아노를 계속 친 거요? 학원에 그만 가면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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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총체성보다는 다성성으로서의 장편소설-박형서, 『새벽의 나나』(문학과지성사, 2010)
굳이 ‘루카치 대(對) 바흐친’이라는 식의 구도를 염두에 둬서가 아니라, 아무튼 장편소설이라면 서사의 볼륨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으니 서로 다른 많은 목소리들, 서로 다른 인간과 삶과 이데올로기로 이루어진 많은 세계들을 다루는 것은 나쁘지 않은 방법이지 않을까? 게다가 그것이 다성성이라 불리는 덕목을 지향한다면 나쁘지 않을 뿐 아니라 꽤 괜찮기까지 하지 않을까? 2010년에 출간된 소설 중에서 박형서의 『새벽의 나나』를 꼽을 수 있다면, 그 이유는 이 장편소설이 다성성이라는 덕목을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방콕에 있는 나나라는 이름의 기차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태국에서 가장 큰, 아니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사창가를 배경으로 하는 『새벽의 나나』에는 지아, 플로이, 라노로 이어지는(혹은 이어질 예정인) 매춘부 삼대(三代)를 중심으로 한 연대기가 펼쳐지고 있는바, 거기에는 현대적이고 도시적인 삶에 익숙한 우리들이 상상하기도 어려운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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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우린 친구니까” ― 밀짚모자 해적단과 ‘우정’
(바흐친,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3) 3) 미하일 바흐친,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 이덕형·최건영 옮김, 아카넷, 470-471쪽. 부르주아와 귀족의 식사 공간은 복잡한 예절과 고급스러운 음식이 어우러진 개인의 공간이다. 이들의 욕망이 아무리 고급스러워 보인다고 해도 그 안에는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전유(專有)의 욕망이 들끓는다. 이런 욕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은 무제한의 식탐을 뽐내는 빅 맘이 아니라 파이어 탱크 해적단 선장 카포네 벳지다. 그는 첫 등장부터 고급 레스토랑에서 혼자 식사를 즐기며, 대식가 쥬얼리 보니의 폭식을 보면서 “천박한 계집. 내 식사의 맛이 확 떨어지는군.”(51권 498화)이라고 화를 낸다. 그는 성성(城城) 열매 능력자로 자신의 몸 안에 무수한 병력과 무기를 숨겨 두고 있다. 부르주아의 탐욕에 대한 은유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