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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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테이프 자르는 이들
찹살떡을 팔러 온 노인과 배가 남산만한 여자를 돌아보지도 않고 갔다 웅웅대는 축사와 마이크 소리를 남겨두고 후원회의 박수를 받으며 한번 더 기억해달라며 떠났다 벌써 오래 전 그들은 떠나갔다 한 세기를 미끄러져간 릴테이프 신문지에 날리던 말들처럼 환한 풀밭에서 골프공을 날리며 리마로, 제네바로 어디론가 떠났다 그렇게 멀리서도 환영처럼 머물러 있던 얼굴 언제나 출렁이는 피킷 속에 등장하던 정의의 전도사들 뉴스메이커들 참모진의 경호에 싸여서도 항상 곁에 있었노라 말하는 이들 만약 시간이 일분일초를 잘라내는 가위라면 지속되는 것만이 역사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일미터도 못 굴러가 진창 속에 처박힐 말들을 굳이 기억할 필요는 없는 그들 엄청난 기부자의 머리에 박사모를 얹어주는 대학처럼 액자를 기증하고 그럴싸한 명판을 새기는 이들 시립회관 복지회관 평화센터 명예의 전당에도 맘껏 공부하고 축하공연도 하라던 이들 그들은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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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학도호국단장 전지현
그렇다면 박정희 황제는 곤룡포를 입고, 박사모에 술을 드리운 것 같은 왕관을 써야 하나? 그 생각을 하니 또 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아버지와 심각하게 정치 얘기를 하고 나라의 앞날을 걱정해도 내 얼굴에는 아버지처럼 어두운 그늘이 생기지 않았다. 아버지도 그렇다면 좋을 텐데, 아버지의 얼굴에는 나날이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아버지는 가끔 탄식을 했다. 이제 이 노릇도 때려치울 때가 가까운 것 같다. 그러기 전에 내가 떨려 나올 수도 있겠지만. 아무것도 가르칠 수가 없어. 어떤 진실도 말할 수가 없으니. 아버지와 나는 정치 얘기를 자주 나누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역사 교수답게 내게 올바른 세계관과 비판적 시각을 가지게 해주려고 애썼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 몰래 그 군부 독재자에게 ‘친애하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로 시작하는 장문의 편지를 써 보낸 적도 있었다. 아, 그 사실을 아버지가 알면 얼마나 배신감을 느낄 것인가. 물론 철없는 1학년 때의 일이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