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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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압생트 - 밤길 걷는 사람 외 1편
잿빛을 견디기 위해 나는 박쥐의 피에 취한 채 밤새도록 소설을 쓴다. 잿빛을 잊기 위해, 잿빛을 부인하기 위해 당신은 대신 무엇을 견뎌내는가? 내가 말했던가? 잿빛의 세상 속에서 박쥐의 피만이 검다. 박쥐의 피만이 푸르다. 박쥐의 피가 내 글을 썼다. 나는 박쥐의 피로 세상을 보고 박쥐의 피로 아름다움을 기록한다. 내가 당신들을 위해서 이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지는 말라. 괘종시계가 자정을 친다. 나는 백지 속에 펼쳐진 황량한 영원을 보고 있다. 나는 듣는다, 밤의 피가 백지의 침묵 속으로 푸른 길처럼 파고드는 소리를. 천장에 매달린 박쥐들이 잠에서 깨어 가늘게 찍찍거리기 시작한다. 피에 취한 박쥐들이 날개를 펼친다. 나는 잊는다. 나는 망각한다. 나는 마시고, 나는 기다린다. 나의 데스마스크를 찢고 터져 나올 밤의 목소리를……. 당신들은 그것을 읽어라. 나의 책을 사라. 서평을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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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모델수업 - 불을 껴안은 여인 외 1편
모델수업인 강정 *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 속에서 지난 밤 꿈을 본다 돼지와 박쥐가 함께 서성대는 목조 건물은 짓다가 말았거나 무너지다 만 형국이었다 당신 눈 속에서 그 풍경은 에메랄드 빛 광선으로 절멸하고 있다 * 나를 그리고 있는 당신의 손끝엔 담비 털로 만든 붓이 떨고 있다 다른 손엔 여러 색채를 한데 짓눌러 시간의 살점으로 뭉개버린 팔레트가 들려있고 당신의 입은 혼잣말을 연신 중얼거린다 북향 창으로 스민 빛이 쪼개지는 소리 같다 내 입가의 잔주름들이 당신에겐 빛의 거품처럼 보이나보다 * 캔버스 건너 하얀 면에 누가 들어서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당신은 알고 있을까 당신은 내 얼굴을 조목조목 뜯어보며 춤추듯 움직일 뿐, 나는 좀체 숨쉬기가 힘들다 고사 상에 오를 돼지머리라도 되려고 간밤 꿈이 그리 질척거렸던 걸까 박쥐가 훑고 간 목덜미를 당신은 자꾸만 이리저리 훑어보며 킁킁거린다 신의 사냥개의 먹이라도 된 기분, 캔버스 너머 벽면이 목숨 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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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제15회] 안경
물고기가 보는 세계는 박쥐가 보는 세계와는 다릅니다. 박쥐는 객관적인 세계를 초음파에 의해 분절되는 세계로 경험하게 될 겁니다. 죽음에 임박한 마지막 박쥐가 있다고 해보세요. 이 박쥐는 초음파로 분절되는 세계를 남겨두고 숨을 거둘 것이라고 믿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마지막 박쥐가 죽자마자 그의 세계도 동시에 사라지는 것 아닐까요? 하나의 생명체가 탄생하는 순간, 하나의 세계도 탄생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의 생명체가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하나의 세계도 소멸하는 것입니다.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의 이야기가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la recherche du temps perdu)』에서 프루스트는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단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몇 백만의 세계, 인간의 눈동자 및 지성과 거의 동수인 세계가 있고, 그것이 아침마다 깨어난다”고 말입니다. 이제야 분명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