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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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개혁 - 통일론 외 1편
개혁 권영하 도배를 하면서 생각해 보았다 언제나 그랬지만 낡은 벽은 기존 벽에 악착같이 달라붙어 진액을 빨아 버짐으로 자랐다 벽지를 그 위에 새로 바를 수도 없었다 낡고 얼룩진 벽일수록 수리가 필요했고 장판 밑에는 곰팡이꽃이 만발했다 합지보다 실크벽지를 제거하는 것이 더 힘들고 시간도 많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사하거나 집을 새로 지을 수도 없었기에 낡은 벽을 살살 뜯어내고 새 벽지를 재단해 잘 붙여야 했다 습기는 말리고 울퉁불퉁한 곳에 초배지를 발랐다 못자국과 흔적은 남아 있었지만 잘 고른 벽지는 벽과 천장에서 환하게 뿌리를 내렸다 온몸에 풀을 발라 애면글면 올랐기에 때 묻고 해진 곳은 꽃밭이 되었다 갈무리로 구석에 무늬를 맞추었더니 날개 다친 나비도 날아올랐다 방 안이 보송보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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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시·시조 「빅 카트」외 6편
매일 풀칠하는 여자 그녀는 아주 앳된 도배사 맨 먼저 아이 방 벽지를 뜯어내면 독수리의 빈자리가 늘어난다 그녀는 독수리가 날아가지 않게 서둘러 초배지로 벽을 감싼다 벽면 콘센트에서 흘러나온 흰나비의 노래로 풀칠하면 벽지에는 금세 탐스러운 기린의 눈이 열린다 할머니의 방으로 옮겨 가면 창밖 노련한 바람이 검버섯을 물고 달아난다 바닥으로 내려앉은 벽시계는 무료의 시간을 데리고 비켜선 흔적이 있지만 여전히 고독한 방향이다 그녀는 잠시 고민에 빠진다 할머니의 손때 묻은 벽지를 차마 걷어 낼 수 없어 연양갱을 깨물 듯 손톱을 깨문다 이 집 장남이 머물던 방은 휴가 나온 이병 계급장 냄새가 벽지에 배어 있다 거미와 먼지, 그림자까지 포복의 자세다 저 상큼한 자국은 무얼까 사진이 걸렸던 자리에 애인의 귀여운 투정이 남아 있다 부대 복귀를 위해 현관을 나설 때 사랑과 평화가 깃든 랩송이 입에서 병장까지 이어졌을 듯해 손에 든 새 벽지가 금세 태극기로 휘날린다 옆방 사춘기 소녀의 벽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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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죄책감 - 섬 외 1편
섬 최지인 너와 손잡고 누워 있을 때 나는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이 세계의 끝은 어디일까 수면 위로 물고기가 뛰어올랐다 빛바랜 벽지를 뜯어내면 더 빛바랜 벽지가 있었다 선미(船尾)에 선 네가 사라질까 봐 두 손을 크게 흔들었다 컹컹 짖는 개를 잠들 때까지 쓰다듬고 종이 상자에서 곰팡이 핀 귤을 골라내며 나는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 기도했었다 고요했다 태풍이 온다던데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