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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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최면
최면 김미소 잠든 것도 깨어 있는 것도 아니다 절멸을 이해할 수 없으니까 당신은 젖은 발을 이끌고 방 안으로 들어온다 어깨에 남은 허공을 털고 물 먹은 양말을 뒤집는다 우리가 사랑했던 시간을 불러 온기를 속삭이지만, 당신은 벽을 향해 돌아눕는다 어제와 다른 얼굴로 침묵을 통과한 사람, 옆에 누워 젖은 옷자락을 만진다 손가락을 조이는 물기, 축축한 뒷모습은 털어낼 수 없나 말리고 싶다 마음이 떠나지 못하도록 두 손으로 옷을 쥔다 쥐가 날 것 같아 물에 젖은 생쥐를 생각한다 빠져나갈 구멍이 너무 커서 그랬을까 당신은 다시 문을 밀고 나간다 암시도 없이 꼬리가 사라진 사람의 후생을 쫓는다 손잡이를 만지려고 했지만, 문은 벽이 된다 벽을 관망한다 물줄기가 흐른다 다시 비가 내리는 걸까 물의 진동이 발끝을 밀어낸다 찢어진 벽지 사이로 목소리가 흐른다 자, 이제 문밖으로 걸어 나오세요 구원일까 흐린 손을 잡아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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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비어 있는 방
비어 있는 방 유선혜 고대인들은 영혼이 없다고 말하면 재판장에 세워졌다 영혼은 텅 비어 있는 직사각형 무딘 가위에 잘려 당신의 손을 베이게 하지 않는 벽지 공간이 되어 당신의 사생활을 가만히 바라보는 책장 지나가는 사람이 초인종을 누르고 도망가고 당신이 오래 머물 듯이 기웃거리는 곳 영혼에는 불가능한 것들이 머문다 둥근 삼각형, 뜨다 만 곰 인형, 혹은 추리소설 속 괴도 뤼팽 당신이 네모라고 부르면 원이 되고 직선이라고 부르면 점이 되는 방에 당신은 영혼을 임대하고 어느새 침실이 생기고 춥다고 말하면 보일러가 켜지고 샤워를 하면 온수가 나오고 만두를 사오면 전자레인지가 나타나는 당신이 켠 구석의 스탠드에서 잠시 낮은 채도가 번진다 가능하다고 말하면 세계가 생기는 이제 영혼이 있다고 말하는 현대인은 지하철역 앞에서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다 하느님은 우리의 영혼을 사랑으로 감싸십니다 임대는 끝의 개념을 내포한다 당신은 온통 짐을 빼고 다시 영혼은 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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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시 부문] 즐거운 생일파티
[2010년 공모마당 연간 최우수상 수상작] 즐거운 생일파티 황형선 오늘은 마을의 마지막 생일파티를 벌여요 설레는 마음에 옆집 순이가 훌쩍거리기 시작해요 집집마다 하얀 벽지 크림들이 더 누래지기 전에 어서 케이크를 차려야 해요 건너 건넛집 할배는 주름진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담아요 무언가를 그러쥐려는 손아귀처럼 옷들이 꽉 주름으로 뭉쳐 있어요 놓칠 수 없음은 저렇듯 쉽사리 주름을 풀지 않는가 봐요 언제 녹아 사라질지 모르는 초콜릿 지붕들이 퍼먹기 편하게 놓여 있네요 집집마다 꽂힌 나무들은 마을의 마지막 한 생의 초로 꽂혀 있어요 그 가닥 풀린 가지들의 심지에 저녁이 타오르기 시작해요 바람이 잘도 타오르라고 훨훨 부네요 순이가 폭죽 같은 울음을 펑펑 터뜨리기 시작해요 여기저기서 아이고 아이고 손뼉 부딪히는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해요 마을의 문들이 하나 둘 열려요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모였어요 이제 케이크를 먹을 시간인가 봐요 초를 하나 둘 뽑아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