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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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최면
최면 김미소 잠든 것도 깨어 있는 것도 아니다 절멸을 이해할 수 없으니까 당신은 젖은 발을 이끌고 방 안으로 들어온다 어깨에 남은 허공을 털고 물 먹은 양말을 뒤집는다 우리가 사랑했던 시간을 불러 온기를 속삭이지만, 당신은 벽을 향해 돌아눕는다 어제와 다른 얼굴로 침묵을 통과한 사람, 옆에 누워 젖은 옷자락을 만진다 손가락을 조이는 물기, 축축한 뒷모습은 털어낼 수 없나 말리고 싶다 마음이 떠나지 못하도록 두 손으로 옷을 쥔다 쥐가 날 것 같아 물에 젖은 생쥐를 생각한다 빠져나갈 구멍이 너무 커서 그랬을까 당신은 다시 문을 밀고 나간다 암시도 없이 꼬리가 사라진 사람의 후생을 쫓는다 손잡이를 만지려고 했지만, 문은 벽이 된다 벽을 관망한다 물줄기가 흐른다 다시 비가 내리는 걸까 물의 진동이 발끝을 밀어낸다 찢어진 벽지 사이로 목소리가 흐른다 자, 이제 문밖으로 걸어 나오세요 구원일까 흐린 손을 잡아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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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비어 있는 방
비어 있는 방 유선혜 고대인들은 영혼이 없다고 말하면 재판장에 세워졌다 영혼은 텅 비어 있는 직사각형 무딘 가위에 잘려 당신의 손을 베이게 하지 않는 벽지 공간이 되어 당신의 사생활을 가만히 바라보는 책장 지나가는 사람이 초인종을 누르고 도망가고 당신이 오래 머물 듯이 기웃거리는 곳 영혼에는 불가능한 것들이 머문다 둥근 삼각형, 뜨다 만 곰 인형, 혹은 추리소설 속 괴도 뤼팽 당신이 네모라고 부르면 원이 되고 직선이라고 부르면 점이 되는 방에 당신은 영혼을 임대하고 어느새 침실이 생기고 춥다고 말하면 보일러가 켜지고 샤워를 하면 온수가 나오고 만두를 사오면 전자레인지가 나타나는 당신이 켠 구석의 스탠드에서 잠시 낮은 채도가 번진다 가능하다고 말하면 세계가 생기는 이제 영혼이 있다고 말하는 현대인은 지하철역 앞에서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다 하느님은 우리의 영혼을 사랑으로 감싸십니다 임대는 끝의 개념을 내포한다 당신은 온통 짐을 빼고 다시 영혼은 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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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비평 시는 음악을 듣는다
공동체의 포효(옆방 여자의 울음소리)에 “잠이 깬” 화자는 또다시 깊숙이 침투한 궁핍함, 즉 “쥐 오줌으로 얼룩진 벽지”의 이미지와 마주한다. 화자는 그 벽지 위에 “들뜬 피”라고 적는다. 물리학에서의 ‘들뜬 상태’란 안정된 기준 바닥 상태의 한도보다 초과한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는 불안정한 상태를 의미한다. 들뜬 상태의 계(원자, 분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에너지를 방출’하고, 곧바로 안정된 바닥 상태로 전위된다. 여기서 ‘초과한 에너지’는 ‘불안정한 상태’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과잉된 감각은 대개 우리를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이르게 하지만, 불안정한 상태라고 해서 무조건 감각이 과잉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떤 결손의 형태일 수 있다. ‘들뜬 상태’의 방점은 그러므로 ‘초과한 에너지에’ 찍혀 있다. 그 말인즉슨 “들뜬 피”는 불안정한 공동체의 상징이 아니라, 폭압의 이데올로기를 탈피하고자 하는 욕망의 넘치는 형태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