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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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꽃들의 사관(史官) - 생활쓰레기매립장 가는 길 외 1편
꽃이었을 것이다 꽃 지는 소리에 잠을 깨는 두려운 가슴의 새였을 것이다 그녀가 포장마차에 앉아 최루탄 냄새를 안주로 이십 년 간직한 처녀를 바닥까지 마셔버린 그날 대세는 청춘의 반대편으로 기울어 있었다 세상을 피하여 입대하는 어느 놈팡이에게 순결을 내주고 와서는 나와 하룻밤 눕고 싶다고 아무 일 없이 허리에 손만 얹어 보자고 뿌연 담배연기처럼 중얼거렸다 그때 나는 해당화였던가 능소화였던가 잘 응답하지 않는 잎맥을 흔들며 겨우 광합성을 했던 밤 꽃들은 부름켜로 돌아가 산발적으로 수음을 했다 단 몇 미터 앞에서 이십 세기 말엽은 분신하였고 유탄에 맞아 거꾸러졌다 어둠과 어둠이 은밀히 살을 섞는 꽃들의 유배지에서는 검은 점퍼 차림의 사내들이 튀어나온 돌부리를 툭툭 차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의 신념은 단지 꽃들의 전설로 완성되었다가 다음날 꽃이 졌고 다음날은 다시 피었다 그러나 그걸로 그뿐이었다 죽어버린 시간은 우리를 기록하지 않았고 무수히 많은 사마천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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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비평 「옥갑야화(玉匣夜話)」의 의도적 장치(裝置)
이러한 전의 형식은 사마천에 의해 양식적 규범이 확립된 이후 한문학의 장구한 역사 속에서 고유의 형식과 지위와 전통을 수립한 것으로 되어 있다.46) 김명호는 사마천이 『사기』의 「열전」 첫 장인 「백이열전(伯夷列傳)」에서 역사적 인물들의 운명과 관련하여 천도(天道)가 시행되지 않는 현실에 비분(悲憤)하면서 뛰어난 자질로써 천하의 공명을 세웠으되 세상에서 경시되거나 잊혀진 이들의 행적을 후세에 널리 전하려고 했음을 지적했다. 그는 「열전」을 기록하는 의미를 이러한 탁월한 인물의 생애를 살펴봄으로써 그 시대의 진상(眞相)을 알 수 있고 또한 이들의 생애에 대한 포폄(褒貶)을 통해 난세의 올바른 처신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따라서 열전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사마천의 강렬한 비판의식과 함께 인간 중심의 역사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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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박경리 선생님을 추억하며] 봄날은 연두에 물들어
『토지』를 쓰시는 내내 ‘욥의 고통’과 ‘사마천의 견딤’을 당신의 것으로 끌어안으며 버티셨다는 선생님께서는? 오래 흠모하고 사숙하던 선생님을 정작 찾아뵌 것은 한참 뒤 『토지』 2부를 집필하시던 때였다. 1974년 추석날 새내기 작가였던 나는 현대문학사에 근무하면서 선생님과 인연을 맺은 친구 김정숙을 앞세우고 정릉 댁으로 찾아갔다. 외부와 접촉을 끊고 거의 은둔생활을 하신다는 것을 알기에 긴장이 되었고 조심스러웠다. 벨을 누르고도 한참만에야 인기척이 들리고 ‘숙입니더’ 하는 친구의 목소리에 비로소 문이 열렸다. 자주색 바탕에 흰 꽃무늬가 자잘한 홈웨어를 입고 계셨는데 높은 이마, 맑고 강한 눈빛에서 위엄 있는 용모라는 느낌을 받았다. 선생님께서는 쟁반에 콩나물 무침과 김치, 멸치조림 정도의 간단한 찬을 놓고 늦은 점심을 드시는 중이었는데, 그 모양새가 정말 마지못해 드시는 듯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