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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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피팅
헤드이사의 지난 시즌 작업일지도 펼쳤다. 지난 FW 시즌에서 판매량이 가장 좋았던 오피스 룩 패션 도식화였다. 캐시미어와 울 소재가 섞인, 활동성과 보온성을 추구한 필수템 디자인이었다. 옷의 앞면과 뒷면이 떨어져 있지 않고 자연스럽게 겹쳐 그려져 있었다. 선의 굵기가 일정하고 곡선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디자인이 복잡하지 않아 드로잉 연습에 적합했고 기본 핏 디자인이라서 연습용으로 좋았다. 이사님 도식화를 아래 놓고 그 위에 빈 작업일지를 겹쳐 놓았다. 연필로 도식화를 베끼고 다시 굵은 펜으로 선을 그어 볼륨감을 입혔다. 똑같은 디자인을 다섯 장 그렸다. 드로잉이 부족한 나는 모두 퇴근한 빈 사무실에서 이사나 실장들 도식화를 그대로 옮기는 연습을 했다. 패션위크에 나왔던 모델 사진을 주며 도식화를 떠오라고 하면 나는 두 시간을 열심히 그려도 선이 비뚤어지고 전혀 다른 옷이 나왔다. 소희는 순식간에 멋지고 정확하게, 자기만의 색까지 입혀 디자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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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무지갯빛 즐김과 차이의 소송
사유의 드로잉_제2회 무지갯빛 즐김과 차이의 소송 강수미 (미학,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교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는 1977년 6월의 첫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콜리세오 극장에서 단테의 『신곡』을 테마로 강연을 한다.(이하 관련 인용문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저, 송병선 역, 『칠일 밤 Siete Noches』, 현대문학, 2004년 판본이다.) 20세기 세계문학을 대표하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시인이자 문학자, 서구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원류이자 그 이론의 정신적 지주로 평가받는 그가 중세의 고전으로 ‘문학의 밤’을 가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보르헤스는 여느 촌스러운 문학인마냥 『신곡』에 대한 성서적 독해나 작가의 자의식을 추적하는 독서법을 강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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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일본식 정원과 글쓰기의 미
사유의 드로잉_제3회 일본식 정원과 글쓰기의 미 강수미 (미학,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교수) 내가 교토에 가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누군가가 내게 묻는다. 그곳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무엇이냐고. 혹은 도시 전체가 일본 전통문화의 정수로 정교하게 꾸려진 그 유서 깊고 아름다운 곳에서 무엇이 가장 좋았냐고.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길가 하수도를 덮고 있는 대나무 덮개가 가장 인상 깊었다고. 참 아름다웠다고. 직사각형 하수도 구멍에 딱 맞는 길이로 잘린 중간 두께의 대나무들이 군더더기 없이 일렬로 반듯하게 묶여 있는 그 덮개에서 나는 일본인들이 사물을 대하는 태도와 취향을 보았노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일본 문화를 표상하는 하나의 기표처럼, 여름 끝자락 어느 날 대낮의 햇볕 아래를 걷고 있는 이방인 여행자에게 다가왔다. 물론 그것은 하찮은 하수도 덮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