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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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쇼펜하우어를 읽기 전부터 나는 염세주의자였다. 죽은 엄마의 자궁 속에 웅크린 몇 분이 그렇게 나를 만들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자살하지 않았고 나 또한 그럴 것이다. 그래도 일단 투덜거려 보았다. 마이크가 없다고 무대에서 떠드는 사람처럼. "거기에는 하늘이 없잖아." "있어. 지구처럼 파란색은 아니지만 살구색 하늘이 있지." "먹을 것도 시원찮고, 물도 없잖아." "걱정 마라. 먹을 건 충분한 데다 우린 말이지, 우물도 가지고 있단다." 라이카는 재산을 자랑스러워하는 백만장자 같은 말투로 알려주었다. 오케이, 물이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엄마가 없잖아." "그건 그래, 하지만······." 데이모스가 마지못해 인정한다. 내가 처량한 우주고아 신세라는 것을 말이다. "거참, 말 더럽게 많네. 그만 나불대고 썩 나오지 못해!" 라이카가 참지 못하고 컹컹거리는 바람에 대화는 중단됐다. 깜짝 놀란 내가 몸을 쭉 폈는데, 그 서슬에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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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비평 1960s-2020s 반(半/反)예측의 상상력 ②
니체의 『아침놀』을 비롯하여 플라톤, 쇼펜하우어 등 ‘위대한’ 철학을 섭렵한 작곡 전공생 먹점은 <팔도아리랑>에 전자음악을 매쉬업한 음악을 만들며, 용이한 섹스를 위해서는 적당한 코미디 영화를 트는 데도 주저가 없다. 실리콘 재질의 바이브레이터에 불과한 사물이 인간의 삶을 재단하는 이런 행태는 분명 희극적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분명 공산품 딜도치고는 썩 니체 같은 구석이 있다(물론 딜도는 니체의 가장 열등한 제자에 속할 터이다). 잠언의 형태로 발설되는 니체의 철학은 시종일관 기독교에 기반한 근대 이후 삶의 균일한 지평에 일조하는 동시대의 도덕과 지식을 거부했다. 그리고 니체는 이를 발판으로 인간의 궁극적인 ‘힘’을 끌어내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실리콘 재질의 바이브레이터로 태어났다고 해서 부여된 사용 가치에만 복무하며 살 필요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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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세상에서 단 한권뿐인 시집 (1)
그렇게 시를 쓰네 문학을 합네 하며 이 책 저 책을 남독하다가 그만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탈속한 듯한 주절거림과 선승들의 거침없는 기행담에 푹 빠져들었다. 그랬으니 학교 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부모님은 내가 당연히 좋은 학교 좋은 학과에 들어갈 줄 알았다. “니는 없는 촌 살림에 고등학교를 도시로까지 보냈은께 꼭 좋은 대학 가서 출세혀야 되야. 알았제?” 아버지의 그런 바람과 달리 나는 대학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깟 대학 나와서 뭐한다고 저러실까? 나는 밥벌이보다 더 소중한 일을 할 사람인데······.’ 대학 입시가 코앞에 닥쳐왔지만 나는 이미 대학 같은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뜻도 모를 어휘들을 조합해서 탈속한 도인들의 잠언적인 냄새가 그럴싸하게 묻어나는 시 쓰기에 몰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