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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들의 무대와 슬픔
1. 행동하는 시의 필요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속에 묻었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로 날아간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브레히트, 「나의어머니」전문
시는 늘 무엇과 조우한다. 시가 탄생되는 제반 조건, 그러니까 한 편의 시에 있어서 소여된 것들의 종합적 인지는 불가하다. 그 모두를 종합할 수 없기 때문에 종국에는 시의 탄생 조건이 은폐되기 마련이며, 아이러니하게도 은폐 때문에 시는 그 텍스트 안에서 미적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시와 무엇, 그 수많은 괄호들과 조우하는 것에서부터 우리는 시를 이해한다. 조우하려고하는 운동태들이 한 편의 시를 개방하는 알리바이가 되며, 수많은 오독의 기쁨 때문에 시는 수많은 가능성으로 인지된다. 이미 오래된 이야기들이지만, 이런 개방의 알리바이는 시 너머에 있는 것들의 또 다른 알리바이를 마련하며 상호 침투관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개별 주체의 증상을 지나 징후적 현시를 우리에게 경험하게 해준다. 어쩌면 시에서 전략으로 삼는 부분보다 시와 조우하는 우연의 찰나들 때문에 세계는 새롭게 개방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 편의 잘 구축된 세계가 아니라 이미 구축하기 불가능한 세계에서, 우연히도 ‘그 너머의 세계’가 열려버리는 경험, 그런 독서 상태가 우리를 한 편의 시에 더 오래 머무르게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질문들이 브레히트의 「나의 어머니」를 다시 읽어보게 한다.
초기에 브레히트는 맑시즘에 심취하고 난 후 첫 시집 『가정기도서』를 출간한다. 이 시집에 수록된 여러 시편들을 포함해, 「나의 어머니」는 우리가 알고 있는 브레히트의 시론과는 상이한 면을 보인다. 오히려 그가 주창했던 것과 전혀 반대의 입장에서 읽히기도 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브레히트는 개별 주체의 주관적 감흥이나 감정 토로를 거부했다. 당대의 릴케나 고트프리트 벤이 ‘고독’과 ‘독백’에 주목하여 시의 장르적 특성과 예술적 자리를 규정한 데 반해, 그런 인상주의적인 시적 양태에 대해 브레히트는 전면 부정하는 입장을 취한다. 브레히트는 시의 미적 준거를 아름다운 이미지의 조합이나 시어의 사용에 두지 않고 사회적 유용성, 효용성의 잣대로 저울질했으며, 격변기를 치르고 난 당대 자국시의 비정치적 경향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브레히트가 보들레르의 시를 평하며 ‘마취제 판매원’이라 비난했던 사례가 그러하고, 영미 이미지즘에 도취된 시인들의 시적 성취 또한 염증적 반응으로 일관했던 태도만 보아도, 그의 시론이 참여 경향성에 치중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인간과 세계 간의 극한 긴장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행동하는 시’의 태제가 브레히트 시론의 중점이라 할 것이다. 그의 극작 작업에서도 알 수 있듯이, 브레히트는 ‘행동’과 ‘운동성’의 문제를 문학 양식의 구조적인 측면에서 작품 내부를 완결하려 했고, 문학 외부에서는 ‘실천’의 문제로 전환했다. 한데 그의 시편들을 읽어보면 꼭 그렇게만 읽히지는 않는다.
「나의 어머니」를 읽어보면 브레히트가 어떻게 죽음을 사유하고 어떤 감흥적 위치에서 발화하고 있는지 그의 시론과 상회하는 측면이 더 많이 발견된다. 이 시에서는 부르주아적 관념인 예술주의로부터 해방해야 한다는 목적성이나 시가 현실 세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사용 가치의 문제마저도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강한 이미지즘과 그 안에서 파생되는 감흥적 정서가 강하게 노출된다.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주체 내면의 무거운 사유적 벡터와 죽은 어머니의 육신이 분해되는 가벼운 중량감, 그 위에 자라는 꽃과 나비의 가벼운 운동태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시적 정념을 조직한다. 그로 인해 생과 사의 문턱, 경계의 사유 혹은 그 경중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다. 이 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브레히트의 시론과는 전혀 다른 자리에서 조우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왜 여기서 브레히트란 말인가?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이 야만에 지나지 않는다면, 브레히트는 그 서정시가 불가능한 사태, 즉 야만 이후의 문학이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고찰한다. 그러므로 브레히트식의 현실 직면이란 야만의 역사와 대면하는 방법론인 동시에 문학의 기능을 전환해야만 하는 필요조건일 것이다. 그의 극작이나 연극이론을 살펴보아도 그러하다. 브레히트는 서사극을 정립하는 데 있어서, 동양극을 차용하는 수용 미학적 입장을 취한다. 그는 『작업일지』 『이론서』등에서 동양의 민속적 연희 방식을 서양극으로 이전시킨다. 중국 원곡이나 일본 노연극에서 볼 수 있는 일종의 ‘자기소개 기법’은 브레히트가 반反아리스토텔레스적 서사극을 정립하는 데에 형식적 근거를제공한다. ‘소개’라는 형식을 통해 막과 막간을 끊어 배우가 배우임을 인지시킴으로써 극과 관객 사이의 거리나 생소화(소외)를 이루는 이와 같은 기법은 감정이입과 몰입을 끝끝내 거부하는 형식을 구축해내고 있다. 다시 말해, 관객은 카타르시스에 도달할 수 없고 극(시)을 통해 비판적 판단만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야만의 시대에서 이렇게 비판적 이성을 작동시키는 형식적 구축은 브레히트가 종국에 모색하고자 했던 당대 문학의 전략이자 기획이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상황을 지금 여기, 한국시가 작동하는 모습으로 옮겨보면 어떨까. 근대 체제 이후 한국 현대시의 역사주의적 음영에 자리하고 있는 억압과 폭력의 기제는 문학작품 속에서 수없이 형상화되어 왔다. 탈식민주의적 문학사관이나 분단국가라는 실존적·정신적 황폐화의 문제, 민주화와 경제개발을 서둘러 이룩한 채무와 책무 사이의 고뇌 등등의 문제의식들이 한국시의 사유 구조에 지대한 양의 그늘을 차지하고 있었다. 소위 2000년대의 세대론이나 정치성에 관한 논의들마저도 역사주의 바깥에서 또다시 역사성을 논하는 이중적 잣대가 적용되었다. 가히 한국시 또한 야만의 시대를 건너고 있는 중이라 칭할 만하다. 4.16 이후의 죽음을 사유하고, 죽음의 사태를 통해 역사에 복무하는 방식의 시편들을 살펴보아도 그러하다. 윤리적 관점에서의 국가와 개인, 죽음의 사태를 수행해나가는 인간 기본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여전히 지불해야할 애도의 문장이 많다.
2. 게스투스의 언어와 무대화
서정시가 야만이 되는 시대에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복무하고 있는가. 아니 조금 더 대상을 예각적으로 잡아보자. 야만의 시대에 비판적 이성을 작동시키는 언술형식이 필요하다는 브레히트식의 태도라면, 현재 젊은 시인들의 언술 방식은 어떤 질감을 가지고 있을까. 최근 시에서 자주 노출되고 있는 ‘극적 소여’는 드라마를 포기한 가운데에서 발화되는 시적 국면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가진다. 이 같은 형식은 서사적 상황을 통해 시적 재현을 도모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사나 극요소 자체를 차용해서 재현될 수 없는 현실 파국의 상태, 즉 알레고리적 요소를 부각시킨다. 그러니까 벤야민이나 브레히트 식의 인식론 과거의 유사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브레히트는 전통적 언어극에 대한 비판적 대안 중 하나로 ‘게스투스 언어’를 제시한다. 연극에서의 게스투스란 바르트의 푼크툼과 유사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극중의 배우가 사물 하나를 집어 드는 ‘우연한 행위’가 발생했다면, 그 행위는 단순한 ‘제스처’가 아니라 그 사물이나 정황, 동작을 통해 사회적 조건이나 당대적 상황까지 입체적으로 유추될 수 있어야 한다는 식의 언어관이다. 즉,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묘파하고 파악하는 언술행위를 총칭한다. 이와 같은 언술적 특징을 시 안에서 극적 요소로 투사시켰던 황병승, 김경주, 기혁, 김승일 등의 시인들은 불가능한 언어의 한계와 세계의 불연속적인 측면을 무한으로 대응시켰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시적 공간을 무대 국면으로 연출했던 김경주의 『기담』이나 기혁의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기립 박수』는 주체의 발화 양식이 극중 상태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연출의 입장에서 가시화한다. 여기서 연출의 입장이란 기획이 될 수밖에 없는 상태, 그러니까 세계는 재현될 수 없다는 정념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들의 시편들이 전위적 위치에 놓이는 이유 또한, 외부 텍스트의 유입이나 연극적 오브제를 장치 삼아 형식적 전략을 도모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극적 상황을 통해 언어의 무용함을 반증하고 그 허무의 자리에서 ‘다른 언어’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극적 상황을 통해 문법적 갱신에 도전하고 있으며, 두 시집 모두 이오네스코의 부조리극과 비교되는 이유도 기존 언어의 상투화에 대해 강한 반발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미 파편화된 세계를 파편화된 사태 자체에서부터 그리려고 하며, 앓고 있는 세계를 앓으면서 그리겠다는 게 스투스적인 언어의 충동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 황병승의 경우 또한 그러하다. 황병승은 구체적인 무대 이미지를 조직하지는 않지만, 주체의 다면화와 발화위치의 회전 구조를 통해 게스투스적 언어를 운용하고 있다. 가령 「내일은 프로」에서는 언뜻 1인칭 독백체 발화 면모를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기존의 황병승 시에서 볼 수 있었던 중첩에 중첩을 더하는 복층구조의 발화자가 시의 챕터를 나눠가면서 등장한다. 이것은 서사극에서의 ‘자기소개 기법’과 그 맥이 닿고 있으며 극적 상황의 다발들을 수차례 절편시킴으로써 “다양한 각도에서의 실패”를 전위시키는 배신을 배신하는 콩트적 성향을 내포하고 있다. 그의 시편들에서 발화하는 주체들의 대다수는 조현병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역으로 조현병이나 집단 히스테리를 강요하는 세계를 융기시키는 문법적 전략이기도 하다. 황병승은 그간의 시편들에서 다양한 하위 텍스트들과 서브 컬처들을 시작 태도 기저에 배치시켜놓음으로써 두꺼운 페이소스를 가진 풍자극을 만들어냈고, 외설적 폭로를 통해 출구 없는 현실에서 문법을 초과하는 문법적 모험을 감행했다.
유리쇼
무대 위에 누군가 생긴다 다음과 같은 문장이 진행자에게서 생겨서 스피커를 통해 장내에 생긴다 외계에서 온 유리 장인입니다 그에게서 즉흥적으로 화려한 화병이 생긴다 완전히 똑같은 화병이 생긴다 완전히 똑같은 화병이 다시 생긴다 다시 생긴다 다시 생긴다 즉흥적으로 만든 화병을 완전히 복사하는 기술은 공장의 로봇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라는 미국 장인의 경악이 생긴다 경악에게서 보증이 생긴다 외계에서 온 유리 장인이라는 자에게 당신과 관계들의 돈이 생긴다 완전히 똑같고 화려한 화병들에게 세상에 하나만 있는 화병보다 높은 가치가 생긴다 세월이 생긴다 외계에서 온 유리 장인이라는 자에게 돈이 많이 생긴다 한 남자에게 외계에서 온 유리 장인이 외계생명체가 만든 로봇이라는 정보가 생긴다 제보자가 생긴다 당신과 관객들에게 배신감이 생긴다
—김승일, 「무엇이 사랑할 수 있을까」부분
김승일은 이미 극적 요소를 시에 차용하여 한국시의 새로운 문법을 마련해놓은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김승일이 『에듀케이션』에서 무대로 삼는 공간은 학교 공동체, 부모가 사라진 집, 또래 공동체들이 모여 있는 강변이나 체육관, 심지어 군대나 대학 강단 등 다양한 변주를 통해 느슨한 공동체 속의 새로운 윤리의식을 도출해낸다. 시대와 감각 등을 서로 공유하고 있으나 결코 공유되지 못하는 불가한 예감의 영역들을 반복해서 보여줌으로써 상징화를 거부한 윤리의 사례를 다양하게 구현해낸다. 화법에 있어서는 언어 이전의 동물성 언어, 아이 주체의 언어를 사용했다고 할 수 있으며, 조직된 세계에 있어서는 세계의 축소를 통해 세계의 확장을 기획했다 할 수 있다. 인용한 시의 경우는 ‘유리쇼’라는 독특한 무대에서 상징화되지 못한 언어들의 연쇄 과정이 드러난다. 우선 이 시는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의 위치가 불명확한데, 이것은 상이 투과되는 유리라는 특수성 때문이다. 관객과 무대 위의 인물들은 일정한 공간을 확보하면서 거리를 발생시키지 않고 있으며, 문장의 연쇄적 반응을 통해서도 그리 명징한 서사를 조직하고 있지 않다. 다만 인물들의 발화가 증식되면서 유리 공간을 외계로 전송하고 있는 측면과 뒤엉킨 공간 속에서 기이하게 생기는 시간성(“세월이 생긴다”)이 병치되고 있다. 인물 간의 역설적인 관계성들 또한 수차례 그 병치 속에서 회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조건 속에 처해 있는 인물들의 배신과 맹신은 건축과 붕괴를 반복하는 언술 행위, 즉 모두 게스투스의 언어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이 언어감은 단순히 기술복제시대에 대한 풍자의 언어라기보다는 가공되지 않은 기계 주체의 명령어들의 모음,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정념을 품기 위해서 어떤 자리에서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미끄러지면서 요청하고 있지 않은가. 즉, 김승일은 관객들을 무대 위에 호출하는 행위를 통해, 정념들마저도 정보의 벡터가 되어 파국의 여기가 아닌, 바깥의 미지로 이 모두를 송출해내고 있는 것이다.
3. 죄책감, 이후의 비전
임경섭의 시는 첫 시집 『죄책감』이후 새로운 언어 운용의 행보를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그 형식을 살펴보자면, 그의 첫 시집은 대다수의 시편들이 1인칭 발화자의 목소리에 기대고 있는 데 반해 최근에 발표된 「슈레버 일기」연작 등에서 나타나는 발화법은 대개 3인칭 발화자의 목소리를 띠고 있다. 『죄책감』에서는 주체 내부에서 여성 젠더나 모성의 자리를 극도로 타자화하거나 죄의식으로 몸부림치며 소거시킨 회귀적 장소에 가 닿을 수 없음을 ‘나’의 내면 고백투의 방식으로 형상화한다. 그럼으로써 끝끝내 현실에서 부채감을 다 지불하지 못한 섬약한 주체를 만들고, 역설적으로 애도를 수행해야만 하는 관념적 현실태의 모습을 이미지화한다. 이러한 것들이 죄책감, 죄의식, 당대적 사태 등과 조우하면서 시를 쓰는 자의 통고적 상황을 배가시킨다. 한데 근래 왕성하게 발표되는 임경섭의 시는 이전의 시와 다른 발화 위치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꼭 그렇게 보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시편들에서 연극적 효과를 극화한 것도 그러하고 서사 구현의 관계 방식에 있어서도 종전과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듯한 외연이 있기는 하지만, 상징화된 현실태에 반응하는 ‘증상적 주체’를 주로 다룬다는 것에서 유사한 세계관을 보인다. 먼저 여기서 주목할 점은 임경섭이 가공하고 있는 시적 주체는 익명의 발화자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알고있는 ‘증상적 사례’ 속에 자리잡은 주체라는 것이다. 「슈레버 일기」연작에 등장하는 슈레버는 주지하듯 『한 신경병자의 회상록』을 쓴 저자 다니엘 파울 슈레버일것이고, 「플라스마」에서 헤르베르트 그라프 역시 프로이트의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꼬마 한스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그 밖에 임경섭이 극적 무대속으로 차용해 온 인물들, 그러니까 「반짝반짝」에서의무츠키, 『귀향』에서의 에른스트 짐머, 「풀다」에서의 빌름 호젠펠트, 「매치포인트」에서의 슈테피그라프 등등은 이미 메타적 인물들인 셈이다. 이 시편들이 공유하고 있는 점은 모두 가족사 내부의 목소리를 메타적 인물들을 통해 구현하고 있다는 점인데, 굳이 메타적 정보 토대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시편 내부에서 극적 요소들의 부딪힘
을 통해 흔들리는 상징 질서의 구현과 그 바깥을 엿볼 수가 있다.
그렇지 나는 분명 아내에게 오로라를 보여 주고 싶었지
그렇지만 일찍이 스스로 오로라를 보고 싶단 마음도 갖고 있었어
그렇다면 내 말은 내가 오로라를 보기 위한 수단으로 아내를 이용하겠단 뜻일까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꼬았던 다리를 반대로 다시 꼬는 동안 상체를 아내 쪽으로 은근히 숙이며 말했다
죽기 전에 너와 오로라를 보러 가고 싶어
그러자 아내는 푸르르 떨리는 진보랏빛 유성 같은 입술로 물었다
당신은 오로라가 보고 싶은 거야, 오로라가 보이는 곳으로 가고 싶은 거야?
아내의 질문에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래 오로라를 보는 일은 검색으로도 가능한 일이지
그래도 나는 태양의 입자와 지구의 자기장이 부딪는 곳에 서서 그것들의 발광을 목격하고 싶은 마음이었어
그래서 내 말은 오로라가 보이는 곳으로 가되 거기서 오로라를 보지 못해도 된다는 뜻일까
(……)
다시없을 이 밤 아내와의 귀갓길은 그에게 아프지도 않았고 기쁘지도 않았고 허전하지도 않았고 가득하지도 않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헤르베르트 그라프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지나가 버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임경섭, 「플라스마」부분
인용 시에서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아내와 서로 다른 관점에서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다. 아내와 결혼 3주년을 기념해서 오로라를 보러 가자는 남편의 말을 아내는 오로라를 보여주고 싶어 했던 그 마음을 분절시키면서 추궁하기 시작한다. 단지 남편은 오로라를 아내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뿐인데, “오로라가 보고 싶은것”인지, “오로라가보이는곳으로가고싶은”것인지질문을받는다. 남편에게 오로라라는 사태는 아내의 질문을 거쳐 ‘오로라 그 자체’와 ‘오로라의 장소감’으로 전환된다. 또한 아내의 말을 통해 유추해보자면, 남편이 아내에게오로라를 ‘보여주고’싶은 마음이 남편의 주체 스스로가 ‘보고 싶은 것’으로 일단 역전됨으로써, 아내는 이미 이 오로라의 사태에서 빠져나온 타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다시 말해 아내는 사태 바깥에서 사태를 파악하고 있고, 남편은 사태 안쪽에서 무엇이 자신의 최초의 마음이었는지 질문하고 있다. 이러한 국면을 연극적 상황으로 옮겨본다면 극중 남편은 문제될 것이 없는 것들에서 굳이 문제를 찾아가는 방백, 독백을 하는 인물로 대치시킬 수 있다. 반면 아내는 무대 바깥, 상징계 바깥에 있는 해체적 성향의 발화자로 인지될 만하다. 아내가 질문을 통해 질서를 깨부순다면, 남편은 질서 속에서 없는답을 구하려고 애쓰고 있다. 또한 남편과 아내의 대화 속 권력적 상호관계를 아예 무시하고 인지해보자면, 이들은 각자의 상징계 속에서 대화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각자의 질서를 통한 어긋남과 틈의 조직의 구현은, 대화할 수 없음과 대화되지 않음의 부조리함을 극대화시킨다.
그런데 시 말미에서 드러나는 남편 헤르베르트 그라프의 허무주의적 발언은 어떻게 인지해야 할 것인가. 오로라 사태에 대한 답을 구하기보다는 질문을 통해 자신의 정신세계를 쪼개 보았던 이 모든 일련의 상황을 모두 ‘아름다움’이라 일관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아내의 합리적 가르침을 일단 인정하는 것으로, 주체 스스로는 또 다른 고립 국면에 자신을 몰고, 또 다른 오해를 통해 소통을 지연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또 다른 병증 상태로 자신을 몰입시키고 그 몰입 안에서 안주하며 고백이되 소통이 부재하는 현실태를 가족 공간 안에서 축소적으로 보여준다.
내가 알기로 동물원은
움직이는 사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동물원 안에선 그 어떤 사물도 움직이지 않았으니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동물원은 움직이지 않는 동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동물도 스스로 그곳을 선택한 적 없었으니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동물원은 움직이지 않는 동물들을 모아 놓은 곳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모아 놓은 주체가 빠졌으니
나는 그대로 말할 수 없었다
동물원은 인간이 움직이지 않는 동물들을 모아 놓은 곳이었다
그러나 인간도 동물이었으니
나는 그대로 말할 수 없었다
동물원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모아 놓은 곳이었다
그러나 스스로를 가둔 테두리는 보이지 않을 만큼 넓었으니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임경섭, 「슈레버의 일기-라이프치히 동물원」 부분
아내와 남편으로 이루어진 2자 관계가 아닌 ‘아이’가 등장하는 「슈레버의 일기」연작은 기울어진 상징 질서를 보다 다각적인 입장에서 드러낸다. 이와 같은 모습은 현실이 가진 파국의 국면들 중 가장 작은 조직 하나를 집어내어 전시하는 동시에, 알레고리 미학에 충실한 짙은 정치성을 가지고 있다. 그 형식만 보아도 그러하다. ‘일기’라는 형식은 기본적으로 개인 기록의 산물이지만, 시적주체 개인이 스스로에게 고백하는 방식, 그러니까 철저히 1인칭 발화자의 위치에서 서술되는 언술방식이라는 점에서 ‘나’의 자리를 확보시킨다. 그러면서 일기가 작성자 개인이 아닌 타자(들)에게 개폐되었을 때, 그 은폐된 사유를 엿보게 되는 듯한 관음적 시선이 발생할 수 있다는 데에서 타자에게로 향하는 나를 다시금 확보하는 알리바이적 효과를 같이 거둔다. 「슈레버일기」 연작 시편들에서는 일단 슈레버의 시선을 통해 형상화되는 독백의 구조를 외연으로 두고 있지만, 사실 슈레버가 ‘나’의 다른 페르소나일 것임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러면서 일기의 특성상 이미 막 지나간 현재를 연출함으로써 드러나는 극적 효과를 충분히 누리고 있다. 그 기록은 하나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특수 보편의 역사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증상들의 사례집’이라는 효과 또한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은 「슈레버 일기」연작이 가진 형식미이다. 그리고 임경섭에게는 이러한 증상들이 훗날 징후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 것 같다.
인용 시의 부분은, 슈레버가 아이에게 동물원에 대해 설명해주기 위한 사유 과정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말을 막 배우기 시작한 아이는 처음 동물을 인지할 때마다 그것들을 가지고 싶다고 아버지에게 불가능한 요청을 한다. 여기서 슈레버는 동물원을“움직이는 사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판단한다. 동물은 사물이 아니지만 그것을 취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타적인 것, 절대적인 바깥에 놓여 있는 즉물들인 것이다. 동물들은 동물원을 스스로 선택하지도 않았고, 스스로 조직을 형성하지도 않았다. 동물원 바깥에 있는 외부적 힘이 동물들을 구성했지만, 슈레버 또한 그 동물들과 관계할 수 없고 그저 철창 앞에서 구경꾼이 될 수밖에 없으니, 그 ‘경계’의 대면 앞에서 인간 역시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셈이다. 한데 이 사유 과정 속에서 더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슈레버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처지를 반복적으로 읊조리고 있는 독백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취할 수 없는 국면에서 끝끝내 자기 주체를 대면시키면서, “스스로가 스스로를 모아 놓은 곳”이라는 포기의 내면화를 거친 후에야 더 이상 말할 수 없음을 깨달아버린다. 즉, 자신이 무대 위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에 배우가 더 이상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현실 자체에 피로를 느끼는 것처럼, 임경섭은 포기하는 것, 포기하더라도 끊임없는 사유를 통해 그 포기가 가닿는 전부를 구현해내고 싶은 욕망을 발현하고 있다. 때문에 이런 경우라면 허무와 포기를 경험하는 사태 자체보다 그곳으로 가고 있는 과정의 핍진함이 더 아프게 빛난다. 이렇다면 과연 임경섭의 근작시에서 엿볼 수 있는 연극적 차용과 3인칭 고백투의 특징을 임경섭 화법의 새로운 지점이라 볼 수 있을까. 오히려 기존 시의 심화적 양태라 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그러므로 임경섭은 극적 효과를 새로운 비전으로 삼아 사유를 정지시키는 이곳의 황폐화를 더 축소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보다 역사주의적이고 내상의 현상들을 복원시키면서 말이다.
4. 동의하는 자와 동의하지 않는 자
우리는 무엇과 조우하고 있을까. 현실을 내재하지 않고 쓸 수 있는 시가 가능할까. 이 가능성이란 시를 쓰는 주체들의 축소된 각자의 현실 혹은 개별 현실로서의 각자의 시 속에서 현시될 뿐 그 또한 시인이 처한 현실이다. 그러므로 시는 늘 현실과 조우한다. 그 현실이 개별 주체의 현실이든, 일기(임경섭)이든, 외계(김승일)이든 말이다. 시가 현실과 만나는 교착 지점에 관한 탐구는 한 편의 시가 탄생한 실증적·실존적 자리를 가늠할 수 있게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한 편의 시의 미학적 존립을 흔든다. 때문에 시는 동의할 수 없음의 위반적 윤리로부터 우리를 매혹시키는 장르적 책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동의해야만 하는 그럴듯한 그림을 그리는 정물은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 시는 이동하는 것, 움직이는 것, 움직여질 수밖에 없는 모든 정념의 집합체일 수밖에 없다.
최근 젊은 시인들이 시 형식 안에 극적 요소를 가지고 오는 것 또한 이런 필연의 결과물인 듯싶다. 그러나 그 또한 조우하는 것이 아닐까. 브레히트 시에서도 그가 거부했던 감정 이입이 어쩔 수 없이 발생하듯이 서정시가 불가한 시대, 이야만의 시대의 야만에 응전하는 서정이 있는 것이다. 시인이여, 이 파국 속에서도 감흥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예민한 주체들이라면, 나는 당신들의 시를 읽으며 ‘살아 있음’이 아니라 ‘살아 있겠음’의 안부를 느낀다. 우리의 시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움직일 수밖에 없고 모험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굳이 동의를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시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브레히트, 「나의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