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74)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우리의 약속이 불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했다
사막에서의 돌풍이 기억나요, 그리고 그대가 젊은 시절, 제일 먼저 얼어붙은 땅에서 눈을 헤집고 솟구쳐 오르는 이 꽃 아네모네를 노래한 것도요! 알 와라한! 저는 기절하는 동안 꿈속에서 옛날 메디나에서 제가 간호하던 그 여인네를 보았답니다. 그 여인네는 제게 한없이 그리운 음률로 그대가 젊은 시절 대추나무 아래에서 불렀던 노래를 제게 들려주었지요! 그때 그대는 잿속에서 피어올라 눈을 태우는 불의 꽃을 노래했지요. 그리하여 그대는 잿더미를 슬퍼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위대하신 알라께서는 잿더미 속에서도 선홍빛의 사랑을 부활시킨다고요! 그때, 아네모네의 불타오르는 핏빛을 알라의 놀라운 은총에 기대어 노래하는 그대의 목소리가 어쩌면 그리도 늠름하고도 확신에 차 있던지!” 그리고 리디아는 계속 말하였습니다. “사실은 이번에 다마스쿠스의 사막에서 잠시 알라의 은총을 의심하여 기절한 사이 마신으로부터 참으로 기이한 유혹을 받았답니다!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체온을 나눠주세요 외 1편
체온을 나눠주세요 김사이 해가 꺼지지 않은 밖에서 어둠이 잠을 자는 곳으로 들어와도 어디선가 시시때때로 쇠 치는 소리가 난다 말랑말랑 피가 도는 몸에 깡통이 생겼다 깡통이 커질수록 말랑하던 나는 황폐한 허허벌판으로 변해 가고 있다 찍소리 안 하는 건 적당한 비타협이라고 사랑을 버리는 것이 잘사는 법이라고 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야 산다고 살기 위해 지은 죄는 죄가 아니라고 * 깡통이 끊임없이 주문을 건다 차라리 깡통 안에서라면 살아가는 데 안전할까 자유를 팔면 밥을 살 수 있는지 노란 나비에게 물어나 볼까 내 안의 깡통과 피터지게 싸운들 권력은 세상을 잘근잘근 씹어 먹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깡통과 싸우는데도 홀로 죽어가는 거짓말 같은 새빨간 진실 그대의 체온은 아직 따뜻하신가?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문학카페 유랑극장 후기]‘먼 곳’에 있는 나를 만나러 가는 길
[제2회 문학카페 유랑극장 참관후기] ‘먼 곳’에 있는 나를 만나러 가는 길 ― 소처럼 느리게 문태준을 따라 걷다 박상미(문화평론가) 돌처럼 앉아서 당신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싶다. 곡식이 익는 속도로 천천히 걸어도 된다고 누가 속삭여 주면 좋겠다. 이런 날 읽으면 넉넉한 위안을 고스란히 받아 안을 수 있는 시가 문태준의 시다. 소처럼 느리게 걸으면서 도시에서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맡지 못한 냄새를 맡으며, 느리게 걷는 만큼 깊은 깨달음을 전해 주는 시인. 고향의 완연한 풍경을 담아내는 그의 시에는 불교적 사유가 깊게 스며 있다. 영상으로 살아나는 선명한 이미지를 정갈하게 그려내는 시편들은, 화로와 같이 따뜻했던 고향 마을에서 만났던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보여준다. 너무 빨리 내달리며 기억 따위는 잊어도 무방한 것쯤으로 치부해 버리는 기억상실증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그의 시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