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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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포스트(post)의 운명·2
일반적으로 ‘별’과 관련하여 쓰이는 시차(parallax) 개념은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천체의 위치가 다르게 경험되는 현상을 의미하는 천문학 용어다. 천문학자와 수학자들은 시차를 발생시키는 두 시선의 각도 차를 이용하여 멀리 떨어진 천체들의 거리를 측정한다. 이러한 자연과학적 ‘종합’에의 의지는 상이한 시선의 차이에 공통의 지반을 제공하고, 그 지반 위에서 차이를 화해시키려는 동일성의 논리를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진리 담론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시인은 시차(Parallax)라는 천문학적 용어를 시차(視差)가 아니라 시차(時差)로 전유하고 있다. 천문학적인 공간의 문제가 존재론적 시간의 문제로 재전유되고 있는 것이 시인이 굳이 ‘별’이라는 천문학의 대상을 소재로 삼으면서도 ‘시차’라는 단어에 한자(漢字)를 병기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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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오늘의 백야 - 천막과 사막 외 1편
오늘의 백야 문혜연 밀려오는 너의 등, 가끔 그곳에서 길을 잃는 나. 우리의 입술은 열리지 않고, 초침소리만 들려온다. 가만히 초침을 따라 혀를 차보면, 천천히 깊어지는 입안. 내 이름을 부르면 네가 대답하던 밤들도 있었지. 솜털들이 쭈뼛거리는 맨 어깨가 끝없이 멀어질 때, 너와 나 사이에 시차가 생겨나. 너의 아침이 나의 밤이 될 때, 나는 홀로 백야 속으로 걸어 들어갔지. 그 후로 우리는, 같은 시간을 거닌 적이 없어. 우리의 걸음마다, 끊임없이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미묘한 시간의 그늘들. 각각의 밤은 포개진 입술 아래로 가라앉고, 너의 밤에서 생겨난 그림자가 가까스로 잠이 들 때, 백야가 나를 찾아와. 너의 여름을 건너온 백야는, 나의 겨울에서 얼어붙어. 입을 맞출 때마다 생겨나는, 너와 나의 들쑥날쑥한 시간. 너의 들숨과 나의 날숨 사이를 횡단하는 순록들이 고요한 울음을 울 때면, 네 이름이 내 입안에서 끝없이 울려 퍼지고, 나는 너에게 말하고 싶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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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포기의 어려움
난 그녀의 호의가 고마웠지만 사양했다. 그날 밤, 나는 천둥과 번개, 폭우 소리에 몇 번이나 잠에서 깼다. 깨고 나면 동생에 대한 걱정이 들었다. 인터넷이 되지 않아 나는 집에 전화를 할 수도 없었다. 밤은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악마 같았다. 다음날 아침, 날씨가 처음으로 환하게 갰다. 나는 하늘이 내려준 선물에 감사하며 섬을 한 번에 완주하기로 결심했다. 총 40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였다. 먼저 북쪽에 있는 아나케나(Anakena)의 모아이를 향해 자전거를 달렸다. 한 시간 가량 힘겹게 달리자 드디어 내리막길이 나왔다. 30분간 아무도 없는 도로를 질주하는 동안은 나는 새가 부럽지 않았다. 그야말로 나는 해방감을 맛보았다. 어이없게 놓쳐 버린 동생의 결혼이나 혼자 먹는 미역국 따위는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더구나 아나케나 주변의 바다는 수영복을 가져 오지 않은 것을 후회할 만큼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