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54)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비평 신을 보는 자들은 늘 목마르다
그는 “정말로 정치적 신념을 실천하고자 한다면 문학은 좀더 ‘오염’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페미니즘 문학에는 페미니즘을 모르는, 혹은 페미니즘을 반대하는 현실이 기입되어야” 하며, “그런 더럽고 지저분한 충돌의 과정 없이 뜻하는 바를 거스르는 것들을 깨끗이 도려내고서 의미를 획득하는 문학은 신자유주의의 기율을 내면화한 자폐적 주체에 다름 아니다”라고 적고 있다. 다른 대목에 대해서는 충분히 수긍이 갔지만, 나는 방금 인용한 문장의 마지막 대목에서 문학이 왜 뜬금없이 ‘신자유주의의 기율을 내면화한 자폐적 주체’로 귀결되는지 다소 의아했다. 내가 주목한 부분은 ‘충돌의 과정 없이 뜻하는 바를 거스르는 것들을 깨끗이 도려내고서 의미를 획득하는 문학’이라는 구절이었다. 나는 이은지의 이 말이 동시대의 한국문학의 현장에 등장하는 작품을 조금도 고려하거나 매개하지 않은 비평의 독단적 고성(高聲)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통해서 본 ‘인간공학’의 의미
모든 전체주의 체제가 그렇듯 멋진 신세계에는 행복과 안정을 강압적인 방법으로 실현함으로써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는 문제가 있다는 거지요. 그럼으로써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과학에 의한 욕망의 충족을 통해 이룩하려는 자유주의적 유토피아의 경우 설사 그 목적이 훌륭히 달성된다고 하더라도 만일 그것이 강압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일찍부터 유전공학에 관심을 두었던 윤리학자 한스 요나스(H. Jonas, 1903~1993)는 1987년 출간된 그의 <기술, 의학, 윤리>에서 유전자를 선별하여 종의 개선을 시도하려는 "적극적 우생학(psitive Eugenik)"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했지요. “인간을 사육하려는 시도는 오만불손할 뿐 아니라, 우매하고 무책임한 짓이다.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비평 남편과 사파리 파크와 ‘산 자들’
사토 요시유키는 『신자유주의와 권력』에서 푸코의 고전적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 논의를 명징하게 설명한다. 고전적 자유주의에서 시장 메커니즘이란 '자연' 가격을 형성하는 교환인 데 반해, 신자유주의 시장은 '경쟁'이다. 중요한 것은 신자유주의 시장의 경쟁이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통치에 의한 구축적인 노력의 결과로 산출되는 것"이라는 점이다.8) 신자유주의는 법규, 정책을 통해 경쟁 원리가 가능하도록 시장에 개입한다. 이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자유방임과도 다르고, 공공투자나 사회보장과 같은 방식으로 시장경제의 메커니즘에 개입하는 케인스적 방식과도 다르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규칙, 조건에 개입함으로써 "경쟁이 존재하지 않는 장소에 경쟁을 창출하고, 그에 따라 항상적 통제의 메커니즘을 창출"한다.9) 다시 현자의 숲으로 돌아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