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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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연재에세이] 콘텐츠의 사회학②
근대까지는 이야기(=소설)가 현실을 재현한다고 여겨졌고, 그 이야기는 시간축을 따라 선형적인 양상을 띤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념이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에 있어서 이야기는 더 이상 현실을 재현한 것으로서의 선형적인 양태를 띤 채 출현하지만은 않는다. 설사 선형적인 형식을 통해 출현하더라도 그 이야기는 포스트모던적인 소비자들에 의해 비선형적으로 소비되기 십상이다. 드라마를 줄거리 중심이 아니라 캐릭터 중심으로 소비하는 시청자들을 떠올리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데이터베이스’라는 용어 자체인지도 모른다. 이나바 신이치로는 전근대 이야기의 양상을 ‘데이터베이스=이야기’라고 정리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편의적인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전근대의 이야기는 공동체의 기억을 담지한 미디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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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비평 사랑의 도착(perversion), 그리고 도착(arrival)
이제 마지막 레몬색 늦여름의 은행나무 여린 꼭대기 가지에 앉아 보려고 한 가지에서 허우적 다른 가지에서 허우적 은행에게는 너무 무거워 발을 자꾸만 헛디디고 긴 날개를 왼쪽으로 펼쳤다 고개를 내렸다 대각선으로 쳐들었다 딛고 섰다 날갯짓을 한다 (…) 허옇고 대중없이 가깝고 먼 하늘에 새들이 움직일 때만 직선의 삼각형 두 쌍이 퍼뜩, (…) 직선으로 솟아올랐다, 비선형으로 다른 면을 탈 때, 먼 대각선으로 헤엄칠 때, 짧은 머리와 긴 꼬리와 삼각형 두 개, 상에서 나온다, 문득 불쑥 은행 레몬 속에서 ―「너는 상」 부분 그 어떤 상(image)의 맺힘도 또는 상상도 아닌 이 실재하는 매미는 짧은 머리와 긴 꼬리, 그리고 그 양쪽으로 삼각형 두 개를 날개로 삼는다. 짧은 머리와 긴 꼬리는 ‘비누’, ‘불결’한 것 그리고 ‘촛불’의 기표다. 그것은 혐오와 욕망이 동시에 뒤얽혀 있는 퀴어한 사랑의 분자구조다. 그것을 달고 매미는 양쪽에 두 삼각형을 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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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비평 진위를 전복하는 평행우주의 사건들
이곳에서 내가 게으름을 조금 부려도 괜찮을 테니 말이다.(①, 「작가의 말」) 첫 작품집에서 작가는 앞머리와 뒷머리에 각각 배치한 작품 두 편을 양손에 들고 읽어보게 한다. 독립적이면서 의존적인 작품들은 텍스트 내 텍스트, 자기 텍스트 인용, 진위 여부가 모호하지만 그것을 가려내는 일마저 큰 의미가 없게 만든다. 첫 작품을 기원으로 이것을 쪼개기‧확산하기‧연결하기‧중첩하기‧변용하기‧전이하기 등으로 자기 원본의 고유성을 부숴 나간다. 등단작 이후의 작품집과 장편소설에서도 이어지는 이러한 전략은 2010년대 한국소설이 전개되는 양상 중 매우 독특한 지점이다. 통합된 세계를 조각내어 그것을 원용하면서 또 다른 서사로 확장하는 작법은 팽창하는 우주와 유사하다. 자신의 등단작을 텍스트의 기원으로 명명할 수 있다면 대체 그것의 고유성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인지 물으면서 문학 수행을 해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