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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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어느 시인의 자선 사랑시] 기화
[어느 시인의 자선 사랑시] 기화 1) 김현 문을 닫는다. 보리차를 끓인다. 밤은 어떻게 보리차를 맛있게 하는가. 너는 간밤에 혼자 눈 쌓인 공원을 산책하고 돌아온 영혼의 언 발을 녹이는 중이다. 너는 보았고 나는 보지 못했다. 이렇듯 운명이 교차한다. 애인은 어떻게 영혼을 아늑하게 하는가. 물의 열망은 밤으로 소환된다. 수면양말 속에서 발가락은 내 것이 아닌 듯 따뜻하다. 어디에도 없는 아내의 마음을 취조한다. 아내들은 어떻게 밤을 신비롭게 하는가. 모든 순간을 연다. 네가 없다. 발가락을 어루만지던 기분이 영원히 남아 있다. 보리차의 빛깔은 고딕체로 선명해진다. 영혼은 어떻게 마음을 떠도는가. 혼자 눈 쌓인 공원을 산책하고 돌아온 영혼이 똑똑똑 문을 두드린다. 보리차는 식어 가고 나는 영혼을 앞에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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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어느 시인의 자선 사랑시] 결벽증 외
[어느 시인의 자선 사랑시] 결벽증 박소란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 무서워 가서는 오지 않는 것들 문 밖에서 멀어지는 한 사람의 발소리를 오래 들었지 알몸으로 누워 우는 사람은 아픈 사람 아마도 그건 시간에 대한 병 너는 어디로 갔니 물을 때마다 시계는 걸음을 재촉해 걷는 법을 잊고 달리는 사람처럼 사는 법을 잊고 그제야 살 수 있는 사람처럼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닐 텐데, 사랑은 희고 빳빳한 삼베 같은 것 또한 아닐 텐데 훗날 남몰래 흙을 열고 나와 강파른 산길을 헤매는 나를 보았지 바랜 삼베 저고리를 풀어헤치고서 나는 나는 어디로 갔니 * 2015년 가을 《시작》 발표. 사랑의 말 지난여름의 일이다. 무더웠던 삼개월여의 시간을 연희문학창작촌에서 지낸 나는 우연한 기회로 그곳에서 열린 한 문화예술체험 프로그램의 일부를 맡아 진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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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어느 시인의 자선 사랑시] 늦은 고백
[어느 시인의 자선 사랑시] 늦은 고백 오성인 문득, 잊고 있던 너의 체취 난다 공기와 공기가 서로 입 맞추며 부푸는 정원 그 속에서 늘 어긋났던 우리 채 여운이 가시지 않은 호흡의 흔적을 따라 무작정 걷다가 마침내 길의 끝에 닿아 숙명 같은 그림자가 투명해질 때쯤이면 엇갈렸던 시간들 한 폭의 구름으로 피어오를까 메마른 정원에 다시 비 내릴까 끝내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이 몹시 아팠다 아픈 길에서 화석이 된 눈물들이 몸을 부딪치며 오랜 울음을 길게 울었다 흰 개미떼 같은 절망이 온몸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더는 달라붙을 절망도 없을 때 너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너는 내가 미처 수습하지 못한 울음 한없이 미안해지는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묵은 고백들을 꺼내 다독인다 제때 불러 주지 못한 너의 이름이 발굴되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유물 같다 풀들이 발에 채일 때마다 지르는 초록의 비명에서 너의 체취 묻어난다 공기와 공기가 서로 입 맞추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