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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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장풍의 역사
장풍의 역사 노희준 아마도 그것은 위기에 몰린 입시학원장의 책상 위에서 탄생하지 않았을까. 단기간에 자신의 노하우를 학생들에게 모두 전수하는 건 미친 짓이었지만 일단은 빚부터 갚고 보자는 심산이었겠지. 그런데 예상 밖의 빅 히트를 친 거다. 사실 효과를 본 건 극소수였으나, 너도 나도 그 몇 명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몰려들었을 거야. 민들레 씨처럼, 아니면 민들레 씨인 척하는 버들개지 솜꽃가루처럼, 녀석은 치맛바람을 타고 엄마들의 ‘나와바리’ 곳곳에 씨를 퍼뜨렸으리라. 뿐이랴. 바깥양반들의 밤 문화를 휩쓸고, 아이들의 일상으로 되돌아와 온갖 형태의 변종으로 번성하는, 때는 바야흐로 속성(速成)의 전성시대였다. 속성파마, 속성다이어트, 속성만남, 속성 게임 아이템, 드라마 속성 폐인 되기 등등. 어디에 가나 ‘속성’이라는 단어가 붙은 간판은 쉽게 눈에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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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약의 역사
약의 역사 오현종 나는 공항 출국장에서 비행기가 뜨길 기다릴 때마다 약을 샀다. 비타민제, 프로폴리스, 오메가3, 홍삼 같은 것들을. 무료해서이기도 했고 필요에 의해서이기도 했으며, 어쩌면 여행 마지막 날의 피로를 풀어 줄 거란 기대에서 시작된 습관일지도 몰랐다. 색조 화장을 즐기지 않기 때문에 다른 여자들처럼 화장품 코너에서 환율을 따져 보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약의 종류가 다양하고 저렴한 홍콩 첵랍콕 공항을 경유할 때는 비타민제는 물론이고, 파스며 연고며 백화유까지 비닐 백 가득 담아 가지고 탑승을 했다. 나는 기내용 캐리어 지퍼를 열고 약병을 챙겨 넣을 때 느끼는 안도감 같은 것을 좋아했다. 당분이 높은 초콜릿 박스를 집어들 때 느낄 죄책감보다는 분명 나았다. * 내가 태어나 가장 처음 먹은 약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두 살 무렵 자라를 끓여먹었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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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서재의 역사
그는 문학과 언어에 있어서 역사성(전승의 문제)과 세계(장소의 문제)를 함께 생각했던 매우 드문 시인이었고, 이러한 문제의 장소로서 문학의 역사성을 가장 첨예하게 만들었던 문인이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문학사는 아직까지도 그를 낱낱이 알지 못하고 있다. 나에게 이것은 ‘문학’의 역사성, ‘문학’의 세계성을 모색하고 사유할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지고 문학이 문학 내에 갇혀 버리는 역사적 징후처럼 여겨진다. 비록 공교로운 일이었을지 모른다 해도, 「별 헤는 밤」의 구절들이 「힌 바람벽이 있어」의 구절들에 대한 기억과 반복으로서 읽히게 된다는 것은 짐작하기 힘들 만큼 불행한 일이다. ‘문학’이 ‘문학’을 준거 삼아 반복하는 것으로서, 무언가를 기억하는 일이 문학 내부에서 일어나는 반향에 불과하게 되고, 외부와의 연결―역사와 세계가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별 헤는 밤」에서 연상을 통해 호출된 사물과 이름은 단조롭고 동어반복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