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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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수필 가슴에 불덩이를 안고 산다.
유치원에 다니는 손녀가 핼러윈 행사로 얼굴에는 호랑이 무늬 페인팅을 하고 이상한 옷차림을 한 사진을 보내왔다. 즐거워하는 손녀를 보니 외국에서 들어온 정체불명의 축제라고 못마땅하던 마음이 슬그머니 꼬리를 감췄다. 내 자식에게는 해주지 못한 일이 많아 두고두고 후회되는데 사진을 남겨준 유치원 교사가 고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출, 퇴근마다 떠밀려 한 발짝씩 안으로 들어가는 버스 안, 키가 작은 사람은 중간에 끼어 숨쉬기조차 버거운 지하철 안, 지하철 계단을 떠밀려 오르니 과밀에 익숙해져서 위험을 감지하지 못 할 수 있다. 누구의 잘못을 따지기 전에 사고의 정확한 진단이 먼저다. 경찰의 대처가 미흡했다 하고, 이태원역 1번 창구를 폐쇄하지 않았다 하고, 대통령실을 용산으로 이전해 사고가 일어났다 하는가 하면 외국 방문 중인 대통령 전용기가 떨어지라 비는 사람까지 인간의 도리를 잊고 남의 탓이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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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난장이의 죽음에 나는 잘못이 없다
당연히 미국 땅에서 걸려온 전화인 줄 알았다가 놀림을 당한 기분이었다. 볼에 찻주전자의 김이 닿은 것처럼 안면이 후끈했다. 영미네는…… 너무 멀었다. 이천구년도 칠월에 영미를 보고 그동안 못 보았다. 올여름에는 서울에 잠깐 들어올 수 있을지 모른대서 이달 말 28일에 도배를 하기로 했다. 지물포에 가서 실크벽지를 봐두었다. 영미가 못 들르고 바로 중국으로 갈 수도 있다지만, 도배를 해두어서 나쁠 일은 없었다. 이천구년도에 손님방과 거실만 새로 도배를 하고 그간 안 했으니 꽤 되기도 했다. 멀긴 멀어도 영미네가 미국에 남기로 결정한 건 잘한 일이었다. 영미를 힘들게 공부시킨 보람이 있었다. 애들 아버지는 고루한 사람이라 늦게 둔 딸을 유학 보내는 데 반대했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조실부모하고 고학으로 사범대를 나온 나는 공부를 더 하지 못해 한이 많았다. 영미는 내가 기대한 만큼 다 따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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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외계로 사라질 테다
룸메이트가 물었다. 눈물 자국이 창궐한 얼굴이 조금 전보다 더욱 그로테스크했지만 예뻤다. 나보다 한 살 많고 대학생이지만, 언니라고 불러본 적이 없다. 대학생이 놀 생각이나 공부할 생각은 안 하고 집에서 TV나 보고 있는데 언니라고 부를 이유가 없다. -응, 오늘은 술 안 마시고 들어와서 놀아줄게. 드라마 좀 작작 봐. 문을 닫고 나오자, 햇살이 얼음 투성이 남극의 펭귄 털처럼 눈부셨다. 맑은 소주 한잔의 상쾌함이 생각났다. 내가 일하는 삼겹살 가게는 손님들에게 떠밀리고 있었다. 이렇게 장사가 잘 되는 가게란 사장에겐 대박, 알바들에겐 극악이다. 게다가 내가 들어온 지 2주일 만에 이렇게 바빠졌다. 사장 오빠의 말에 따르면 내 복이라고 한다. 하지만 복은 무슨, 개코같다. -나는 하는 알바마다 왜 이래. 어서 오라고 인사하는 사장 오빠에게 앙탈을 내밀고 툴툴거렸다. 그는 손님들에게 떠밀려 정신을 꺼내놓고 있었다. -빨리 옷 갈아입어, 복뎅아. 이따 단체손님 예약도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