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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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유리방패
자동차도 있었고 기차도 있었고 총도 있었고 화살도 있었고 방패도 있었다. 대부분 조잡한 것들이었다. M이 칼을 고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리는 플라스틱 칼을 하나 더 샀다. 그리고 투명 플라스틱으로 만든 방패도 하나 샀다. 방패를 처음 봤을 때 나는 그게 유리로 만든 것인 줄 알았다. 떨어뜨리기만 해도 깨지는 방패, 앞은 환하게 볼 수 있지만 적의 공격을 막을 수는 없는 방패, 매일매일 깨끗하게 닦아줘야 하는 방패…… 그런 생각들을 하니 재미있었다. 손을 댔을 때에야 그게 유리가 아닌 투명 플라스틱으로 만든 것이란 걸 알았다. 앞이 보이는 방패는 싸움을 할 때 쓸모가 많을 것 같다. 칼과 방패를 샀더니 라면 열 개 정도 살 수 있을 돈이 남았다. 제대로 된 칼싸움을 하려면 방패를 두 개 사야 했지만 그래도 라면 살 돈은 남겨두어야 했다. 방패에서도 췌엥, 하는 소리가 났다. 칼에서 췌엥, 하는 소리가 나는 것은 어울렸지만 방패에서 소리가 난다는 것은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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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기획소설_HㆍOㆍTㆍEㆍL ②] 유리주의
고스톱 패와 달러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돈과 화투패가 한꺼번에 흩날리는 것이 흡사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때 민화의 코끝에 비릿한 향내가 스쳤다. 오스슥 소름이 돋은 민화가 눈을 크게 뜨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싸움꾼들은 항공 담요 안에서도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뽕브라가 벗겨진 수연의 납작한 가슴이 담요 안의 어둠 속에서 유난히 돋보였다. 연숙의 허리가 접혀 안 그래도 처진 가슴과 툭 튀어나온 뱃살이 한껏 친한 척을 했다. 커튼으로 가려 놓지 않은 통유리가 방 안의 모습을 고스란히 되비추었다. 유리창에 설핏한 사람의 형상이 나타났다. 담요에서 날아온 고스톱 패 한 장이 허공에 머무는 시간이 유독 길었다. 통유리가 뿜어낸 반사광이 호수의 물결과 만나 이루는 빛의 파도가 비경이었다. 빛과 빛이 만나는 지점에 언뜻 나타났다 사라지는 호수의 괴물도 매우 훌륭한 이야깃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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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비평 내가 나의 실패에 대해 말하겠다
관련하여 박상영이 그려내는 것은, '진짜'가 '똥'이 되고, 그 '똥'이 진정성 운운하는 자들에 의해 '진짜'로 발견되는 "역겨운 세계"라는 논의가 앞서 이루어진 바 있다(노태훈‧이은지‧이재경, 「되풀이된 공감 이상의 실감을」, 『문학동네』 여름호, 2017). 6 「조의 방」 전반부에서 '나'는 유리창을 손으로 짚다가 일전에 조가 유리에 대해 해준 이야기를 떠올린다. 조는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유리는 인간이 인식하지 못할 만큼 아주 천천히 흐르고 있는 액체"라고 말하는데, 소설 마지막의 '나'의 말 또한 이러한 유리의 특성에 긴밀히 결부되어 있다. 실패의 연장, 그 관성 「조의 방」을 뒤덮는 정조는 비애감이다. 어떤 사실이나 사람에 대한 확실하고 단단한 마음을 가질 수 있던 시기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어느 순간 끝나버렸음을 알아차리는 데에서 비롯되는 비애감은 「조의 방」을 비롯하여 「햄릿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