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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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붙기 전에 外 1편
붙기 전에 고영민 『창비시선 300 기념 시선집』이 그만 변기에 빠져 버렸다 화장실 찬장 선반 위에 올려놓고 볼일을 볼 때마다 내려 들춰보던 책이 쏟아지면서 보기 좋게 변기 속으로 골인을 했다 재빨리 끄집어냈는데도 책 가장자리가 온통 젖어 낱장들이 하나로 붙어 있다 방에 들어와 붙어 있는 낱장을 떼어 낸다 김수영과 정철훈을 떼어 내고, 정철훈과 허수경을 떼어 내고 허수경과 장석남을 떼어 내고, 장석남과 나희덕을 떼어 내고 고은과 김용택을 떼어 내고, 김용택과 이은봉을 떼어 내고 이은봉과 박형준을 떼어 내고, 박형준과 강신애를 떼어 내고 손택수와 임영조를 떼어 내고, 임영조와 하종오를 떼어 내고 김선우와 이시영을 떼어 내고, 이시영과 장대송을 떼어 내고 문태준과 안도현을 떼어 내고, 안도현과 유안진을 떼어 내고 조말선과 유홍준을 떼어 내고, 유홍준과 최영숙을 떼어 내고 최영숙과 이병률을 떼어 내고, 이병률과 박연준을 떼어 내고 이재무와 신경림을 떼어 내고, 신경림과 이진명을 떼어 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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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전부
전부 이병률 이 기차는 어디로 향하는 기차입니까, 라고 묻고 싶은데 이 나라 말을 알지를 못 합니다 이 기차가 어질어질한 속도로 당신을 데려가 어디에 내려놓을지를 알고 싶은데 물음은 물컹 내 귀에 되닿기만 합니다 당신 옆모습을 바라봐도 된다고 믿고 싶어서 발목은 춥지 않습니다 지도 위에 손가락을 올려 묻고도 싶은 겁니다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지금은 어디입니까 안녕, 이라는 이 나라 말만 알아서 그 말이 전부이기도 하여서 인사만 합니다 기차 밖으로 내리는 유난히 검은 어둠이 마음에 닿으려 합니다 마음이 자꾸 넘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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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아주 넓은 등이 있어 - 한 사람의 나무 그림자 外
아주 넓은 등이 있어 이병률 종이를 잘 다루는 사람이고 싶었다가 나무를 잘 다루는 사람이고 싶었다가 돌을 잘 다루는 이 되고 싶었는데 이젠 다 집어 치우고 아주 넓은 등 하나를 가져 달(月)도 착란도 내려놓고 아주 넓은 등이 있어 가끔은 사원처럼 돌아봐도 되겠다 싶은데 오래 울 양으로다가 고깃국 한 사발 마시고 손도 깨끗하게 씻어 말리고 내 넓은 등짝에 내 얼굴을 묻고 한 삼백년 등이 다 닳도록 얼굴을 묻고 종이를 잊고 나무와 돌을 잊고 한 시절 사람이었다는 사실도 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