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7)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파랑새가 된 사람 - 북해와 향유고래 외 1편
파랑새가 된 사람 이병일 초분(草墳)이라는 말에 한 사람을 묻었다 채마밭 근처, 애도의 자세가 노랗다 저승에 닿는 거리, 나비가 읽지 못하는 사후의 일이다 낮과 밤이 둘로 갈라지듯 뼈와 살은 흙의 얼룩과 빛으로 돌아간다 한 세상 떠돌면서 아직도 멀리 가지 못했는지, 돌부리만 일렁거린다 태풍이 왔지만 초분은 무너지지 않았다 물난리 난 어느 오후의 왕잠자리 나와 놀듯 진흙 두꺼비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땅벌레들 붉은 빛을 훔쳐 와서 아궁이를 굽는다 그사이, 파랑새가 된 그 사람 뺨에 옮겨 붙은 호시절을 서쪽 가지에 걸어 두었다 바람이 바투 붙은 자리마다 구멍이 숭숭 쏟아진다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희다
희다 이병일 한겨울보다 한여름에 죽는 것이 더 많다 훌러덩, 발라당 숨 까진 것만 죽는다 섭씨 42℃ 팔공산의 사과나무를 강원도 홍천에 옮겨 심은 사람도 있다 기후 재앙을 피해 사과 하나만 믿고 높은 곳만 생각한다 고산지대가 좋다는 것은 짐승이든 사람이든 물러지는 일이 없다는 거 우박처럼 조악한 것도 없으니 뭐가 됐든 반반하게 얼굴 내밀고 있다 그런데 전기톱을 가지고 온 벌목꾼들이 소나무 참나무 잣나무들을 벤다 이대로 죽을 줄 알았던 참나무가 기어이 벌목꾼을 깔아뭉갰다 굴삭기로 들어올리는 죽음 앞에서 물고 할퀴고 뜯긴 것은 지구밖에 없다 저기 저 벼락에 타서 죽은 산벚나무도 제 발등에 핀 꽃잎 줄기 하나로 깨지지 않은 죽음을 붙잡아 둔다 마치 발레리나의 발끝에서 피가 번지듯 언제나 불행 안쪽은 꽤 희다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북해와 향유고래 외 1편
북해와 향유고래 이병일 수평선이 굵어지면 북해보다 큰 무지개가 떠오른다 한 삼백 년 거뜬하게 사는 향유고래 북해의 물속에서는 오래 숨을 참지 못해 음파는 커진다 검은빛이 밝은 곳에서는 음파의 색과 방향마저 잃었다 그때 경랍(鯨蠟)이 뇌를 갉았지만 괴로워하지 않았다 해 뜨고 달지는 심해; 그 아늑한 시간 속을 헤치면서 아가리 크게 벌리고 죽어야 큰 무지개 하나 짠다는 것을 안다 저 향유고래, 옆으로 누워 있으니까 조용한 백양나무 두 그루, 더 이상 물거품 내뿜지 않았다 서로 기도하면, 목마름이 조상의 메아리임을 알게 될까? 두려워하지 마라! 물길을 믿으면 모든 구속에서 해방되니까 그러나 향유고래가 낮은 수로에 갇히자 갑자기 물새 떼들이 목이 잠긴다 은빛 금빛 너울들이 향유고래의 시야를 감아들인다 북해에 있는 것들아, 잘 있거라 오늘 향유고래의 흥이 북두칠성 끝자리로 올라간다 백양나무 두 그루, 제 죽은지도 모르고 달빛만 일렁거려 잠을 잘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