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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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이글루
이글루 이종민 핫팩보다 걸친 옷에 퍼지는 온기 같은 것 히터보다 음식을 담았던 그릇에 느껴지는 열기가 좋아요 바람이 우리를 훑고 지나갈 때 이 시대가 녹아버리면 좋겠어요 말하는 순간 과거로 얼어붙는 지금이 늘 지금처럼 단단했으면 합니다 시간을 믿지 않지만 기호를 신봉하기로 합니다 얼었다 녹은 흙의 감촉과 새벽 공기에 달라붙은 미생물에 끌리는 사람이라서 우리는 살아 있어요 시린 손등을 볼에 가져다 대고 한기를 감내할 줄 아는 우리는 서로의 집이 될 수 있습니다 입구는 낮고 좁고 길게 지을 거예요 깎고 다듬고 쌓느라 서로가 녹아도 더 잘 연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모아온 훈김 빠져나가지 않도록 미미하지만 오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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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똑바로 보려고 하지 않아도
똑바로 보려고 하지 않아도 이종민 사과를 그렸는데 너는 자두가 참 잘 익었다고 말하지 다리를 꼬거나 비스듬하게 서서 언덕 아래를 관망하는 자세로 거리에는 한 블록에 하나씩 삐뚤어진 간판이 걸려 있고 목을 빼고 기침하는 사람과 고개를 들면 머리 위로 쏟아질 것 같은 빌딩 창문 눈 가리지 말고 진실을 보세요 날조된 선동에 넘어가지 마세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외치는 사람들 여기에서 보면 저기는 저기 저기에서 보면 여기가 저기 사과를 자두로 보이게끔 하는 각도와 붉은 사과와 더 붉은 자두의 입장 그보다 강력한 건 지나온 시간과 시간과 시간 눈앞에는 눈앞에 없는 네가 있다 자전거는 손잡이를 한쪽으로 기울여야 길을 따라갈 수 있고 언덕은 땅이 삐뚤어진 게 아니라 기울어진 것 자두가 사과로 보이려면 정확히 얼마큼의 각도로 기울여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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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노을 霞
노을 霞 이종민 비가 들어가는 글자에는 물기가 있고 장마철에 비 맞기 좋아하는 당신과 바다를 좋아하는 내가 앉으면 그렇게 잔잔했나 보다. 무릎을 끌어안고 쪼그려 앉은 당신에게 왜 그렇게 앉느냐 물으면 작게 숨 쉬는 소리만 들려온다. 작은 소리에도 잘 놀라는 당신은 천둥소리는 곧잘 즐기곤 했지만 뒤에서 내가 부르는 소리에는 자주 놀라 주저앉았다. 그런 날이면 우리는 서로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고 내가 쓰는 대부분의 글자는 '미안해'와 결을 같이하는 글자들이었다. 어릴 적 엄마의 머리카락을 잡고 잤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난 뒤로 당신은 머리카락을 잘 자르지 않았다. 큰 바람이 스쳐 지나간 자국처럼 흉이 난 살갗과 비 그치고 처마에서 떨어진 물방울 같은 점이 난 팔을 어루만지다가 눈 밑 점을 처음 눈물점이라고 부른 사람이 흘리지 못한 눈물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이러나 저러나 사는 건 매한가지 죽는 길은 단 한 가지라는 결론에 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