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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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인물과 식물
[단편소설] 인물과 식물 류시은 ? KBS 라디오 문학관에서 오디오북을 만나볼 수 있어요 1. 이제 소형은 더 이상 타냐를 생각하지 않았다. 엘우디, 컬럼나리스, 이본느, 반펠츠블루…… 2년생에서 3년생 사이의 사이프러스 묘목들과 씨앗부터 키워 아직 목질화 되지 않은 잣나무와 가문비나무 새싹들. 그 바늘처럼 가느다란 잎들이 타냐의 빈자리를 촘촘히 메워 주었으니까. 하늘로 솟구치는 줄기와 바람에 가지런히 일렁이는 이파리들. 어둔 밤 멀리서 바라보면 교회의 지붕인지 원추형 교목인지 언뜻 구별되지 않는 첨탑 같은 실루엣. 그런 웅장한 생물의 유년을 창가에 두고 볼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벅차고 충만한 일이었으니까. 15층 아파트로 이사 오기 전날, 귀중품은 미리 챙겨 두라는 이삿짐센터의 말에 소형은 침엽수 화분들만 따로 차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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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인물화 외 1편
인물화 정다연 맑은 물에선 오히려 생물이 잘 자라지 않아 네 독성의 이유지 언제까지 미지근한 물로 흔들릴 거니 언제까지 그 얼굴로 버티고 서 있을 거니 너는 징그러운 생수의 맛 세상에서 가장 햇빛을 잘 견디는 직물 위선, 위선이라고 쓰는 지금 넌 얼마나 밝은지 얼마나 괜찮은 인간인지 질겨, 아무리 씹고 잘라내도 네 독성은 얼마나 투명에 가까워지는지 투명 그것은 극도의 배척의 또 다른 이름 어쩐지 킁킁거릴수록 피맛이 나 시체가 타고 남은 냄새가 나 닿는 순간 화상을 입히다가도 순식간에 동사해 버리는 너의 위장술 너의 변온 너의 무취 궤도에 진입한 모든 행성을 밀어내며 무한히 증식하는 너 너라는 이름에만 반응하는 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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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영화에서 - 인물화 외 1편
영화에서 정다연 살려 달라고 비는 남자의 손을 망치로 으깬다 삐끗해서 안 으깨졌을까 봐 또 다시 한 번 망치질한다 피의 도시 위풍당당하게 영화 제목이 올라온다 기대했어야 했나 남자 셋은 영업장을 찾아다니며 꼴리는 대로 손과 발을 절단하고 시체를 토막 살인해 자루에 담아 버린다 영화 속 막내 경찰관은 토한다 스릴을 느꼈어야 했나 남자 둘은 여자 둘을 겁탈하려다가 실패하고 여자 종업원이 남자에게 배를 맞았다고 운다 화가 난 지배인이 욕을 내뱉고 유리병을 들자 곱게 가려던 두목이 기분을 잡쳤고 더 기분이 잡친 부하가 이번엔 도끼로 손을 절단한다 즐거워해야 했나 보다 어쩌다 보니 어처구니없게 두목 맘에 들게 된 여자는 두목에게 성접대를 요구받고 당연히 거절한다 당연히 남자는 성폭행을 시도한다 겁에 질린 여자가 그만 하라고 자기가 하겠다고 조용히 가게 문을 잠근다 치마를 내린다 흥분했어야 했나 여자의 애인으로 보이는 깡패 하나가 벽에 기대 슬픈 표정을 짓고 집으로 돌아온 여자의 뺨을 치며 좋았냐고 묻는다 죽자고 한다 동정했어야 했나 가끔씩 남자 주인공이 등장해 던지는 위트 있는 농담에 웃었어야 했나 그가 아주 깔끔하게 두목과 그 부하들을 처리하는 장면을 지켜봤어야 했나 완벽한 엔딩을 숨 가쁘게 기다렸어야 했나 나는 영화 하나 끝까지 보지 못하고 극장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물갈이되는 기사를 곱씹는다 매일매일 토막 되는 알몸 시체들과 투신자살한 아내들과 소녀들 연령대를 가리지 않는 여성의 목소리와 매일 매일 죽어 나가는 사람의 목소리를 본다 듣는다 매일매일이 매일매일이다 매일매일이 매일매일이다 매일매일이 매일매일이다 시간은 단 하루도 나아가지 않는다 언제나 같은 매일이다 가을밤, 심야 영화 하나 다 보지 못하고 집으로 가는 막차를 기다리는데 애인은 도대체 왜 이 늦은 시간에 심야 영화를 보고 돌아다니는 거냐며 불같이 화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