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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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시·시조 「대문을 두드리는 것들」외 6편
흐르는 정처, 첩첩의 오리무중, 세상 제멋에 잘도 돌다가 이제야 돌아와 다 낡은 몸뚱이로 부르는 게다 뻔뻔하게 들려주고 싶은 게다 다녀간 것들, 다녀온 곳들에 대하여, 슬금슬금 다가와 산처럼 부딪치고 부서진 생각들 낱낱이 끌어모아 무한과 지평, 의지 밖으로 까마득히 쓸려 가던 것들 누구도 열어 줄 수 없는 문 앞에 수없이 들어가 보았던 문 앞에 한세월의 알리바이, 간절히 고백처럼 저리 서 있는 게다 늙은 아이들 그런 눈빛 본 적 있나 고요하고 무심한데 빤히 들여다보는 것 같은 이미 건너고 다 알아 버린 선각이 차마 말은 못 하고 바라보기만 하는 좌불안석, 스스로 고백하게 만드는, 거덜 나고 돌아온 자식을 품는 눈빛이랄까 하산을 권하는 스승의 눈빛이 저럴까 침묵으로밖에는 담을 수 없는 책망과 자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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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진실은 어떻게 드러나는가-한강 장편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문학과지성사, 2010)
각자의 고통에 빠져 서로의 고통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는, 살아남은 자의 자책 어린 후일담인가. 그 고통의 근원에 가족이, 가난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대물림되는 운명이 있었다는 온갖 슬픈 이야기들의 집결체인가. 혹은, 서인주-이정희-이동주로 대변되는 모성의 세계 반대편에 강석원 그리고 인주와 정희의 전 남편 등으로 대변되는 폭력적인 남성의 세계를 배치함으로써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보다 감동적으로 그려내는 한편의 휴먼드라마인가. 또다시 반복되는 ‘상처와 치유의 서사’인가. 이 소설을 구성하는 전혀 다른 기억들, 욕망들, 언어들에 집중한다면, 어쩌면 여기서 우리는 고정된 하나의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익숙한 전언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라면, 이 소설의 감동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문제는 너무 빤한 우리 삶의 세부가 아니라 그 삶의 요목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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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비평 기억하기를 통한 애도와 지극한 사랑의 실천
이런 자책 속에 죽은 ‘구’는 ‘담’이 자신에 대한 애도를 끝내고서 현재를 살아가기를 바란다. 사랑이란 살아서의 일이고, 죽은 뒤에는 알 수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살아서의 사랑이 영원하기 위해서는 ‘담’이 과거가 아닌 미래를, 안이 아닌 밖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할 일이란 그저 ‘담’의 곁에서 담을 지켜볼 뿐이고, ‘담’이 살아야 자신도 살아가는 ‘담’을 지켜보면서 살아서의 사랑을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담’에 대한 ‘구’의 사랑은 죽음 때문에 직접 말해질 수 없는 상황에서 ‘담’의 기억하기와 애도하기를 통해 드러난다. ‘구’와 ‘담’의 우주가 아주 다르기는 하지만, 그들의 지독한 사랑 이야기는 결코 사그라들거나 잊혀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죽음마저도 그들을 갈라놓지 못하고, 언제나 ‘구’만을 생각하는 ‘담’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담’은 아주 오랫동안 살고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