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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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그가 누웠던 자리
시를 만드는 것은 정념에 질서를 부여하여 그것을 대상화?형식화하려는 의지다. 이 시는 슬픔이라는 정념에 질서를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시는 좋은 시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이 시가 터하고 있는 질서는 내부에서 창안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도입된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특정한 정념을 구조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시야가 확보될 때 질서가 내부에서 창안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시는 더러 이야기를 탑재하기도 하고, 정념은 분출되기보다는 ‘인식’된다. 그러나 정념이 완강하게 주체를 압도할 경우 질서가 외부에서 도입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시가 그렇다. ‘산상수훈’(마태복음)이라는 언술 질서를 외부에서 도입하여 이를 패러디한다. 이 질서는 정념을 인식하는 데 기여하는 질서가 아니라 질서 그 자체에 상처를 입히기 위해 도입된 질서다. 슬픔은 가망 없이 절대화되고 구원의 가능성은 단호히 기각된다. 이것은 일종의 자해이거나 섬약한 야유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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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문학특!기자단]내면의 어둠을 응시하는 리얼리스트 이재웅 소설가와의 만남
또한 문체는 글을 쓰는 사람의 정념에 의해 좌우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정념적 일관성을 가지는 것이 힘들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약 한 시간 반 동안 문학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리얼리스트 이재웅 소설가에게 두 이야기는 불가분의 관계일지도 모른다. 이재웅 소설가는 어둠을 그대로 바라보고 지면에 벼려내 가식이나 기만 없이 소통하고자 하는 ‘리얼리스트’였다. 짧은 시간 동안 소설가와 진행자, 독자들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대화를 했고 행사가 끝난 후에는 서로 고맙다는 인사를 나눴다. 《글틴 웹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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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토르소’의 고독과 ‘관절의 힘’
우리가 이장욱의 간결한 시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의 시가 결국 어떤 구체적인 정념을 품고 있어서라기보다는, 수많은 정념들을 어떤 구체적인 정황(더 정확히 말하면 구체적인 ‘단어’)을 통해 한꺼번에 제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낮’의 시간보다는 ‘밤’의 시간에 관심이 많은 이장욱은 모호한 어둠을 많은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일종의 밤”(「일종의 밤」)을 압축적으로 그려내고자 한다. 가령, “외로울 때는/동사무소에 가자”라고 그가 말할 때 우리가 감지하는 것이 “시작과 끝이 명료한”(「동사무소에 가자」) 인간 삶의 허무나 고독이라고 단순히 말할 수만은 없다. “동사무소에 가자”라는 문장 안에는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한 수많은 감정들이 시작도 끝도 없이 쌓여 있다. 스스로가 생경해지는 느낌에 주목하는 이장욱의 시가 이처럼 단순하면서도 압축적인 어떤 ‘단어’들에 골몰하며 자연스럽게 공감을 유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