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29)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낯익은 상처의 블록으로 지은, 낯선 레고의 집
정여울(문학평론가) 1. 권여선: 2005년 판 김승옥의 「야행」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앞으로도 경험할 것 같지 않은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의 몸짓과 표정과 대사 하나하나가 온전히 내 것인 양 느껴질 때가 있다. 열일곱 살, 김승옥의 「야행」(1969)을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도 그랬다. 게다가 남성작가가, 여성의 차마 드러낼 수 없는 욕망의 치부를 그토록 날선 촉각으로 그려낼 수 있다는 사실에 치를 떨었다. 합리적 이성과 사회적 터부의 울타리를 철저하게 걷어낸 자리에, 알몸의 거웃처럼 선명하게 고개를 드는 욕망의 투명한 낯빛을, 「야행」의 현주는 남김없이 폭로했다. 인간의 언어로 ‘대낮의 강간’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사건을 겪은 후, 현주는 생존의 몸부림으로 점철된 일상의 각질 깊숙이 숨겨져 있던 야생적 욕망을 발견한다.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김오순展 - 홀 외 1편
아들 해원이가 훗날 아내가 될 여자친구 강현주를 데려와 처음 보았다. 2013년(56세) 이맘쯤 선미촌 한복판 골목길에 5년쯤 살다가 바로 옆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2017년(60세) 아들 해원과 며느리 현주가 10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선미촌에 도착한 대절버스에 동네 지인들 10명쯤 태우고 서울 결혼식장에 도착했다. 폐백 때 대추를 던져 주며 싸우지 말고 잘살아라, 했다. 명절 때마다 아들 내외가 오토바이를 타고 집에 와서 자고 갔다. 2018년(61세) 9월 난생처음 비행기를 탔다. 아들 부부와 사돈댁 손잡고 간 2박 3일 제주도 환갑여행이었다. 12월에는 한참 비어 있던 옆집에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작은 서점을 차렸다. 매일 들러서 커피 타다 주면 먹고, 결혼했는지도 묻고,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하면서 얼굴을 익혔다. 종종 손금을 봐주다가 관상도 말해 주고 어떤 조상신이 지켜주고 있는지 알려주기도 했다. “여그가 말하자면 물터여 물터. 동초등학교 그쪽부터가 물왕멀이야.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5월_단편소설_응] 고양이
얼마나 시끄러운지 바로 옆에 있는 현주에게도 목청을 높여 말해야 할 정도였다. “억!” 누군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말뚝박기를 하다 거길 잘못 얻어맞은 것 같았다. 남자애들은 박장대소했다. 한 친구가 다가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친구의 허리를 주먹으로 퍽퍽 때려줬다. “그래서 학원은 언제부터 다닐 생각이야?” 현주의 질문에 나는 다시 애니메이션의 세계로 돌아왔다. 현주도 나처럼 애니메이션이 하고 싶어 실업계로 온 소수파였다. 여러 가지로 통하는 게 많았던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중학교 절친에게도 말하지 않은 주유소 알바 얘기도 현주에게는 다 털어놓을 수 있을 정도였다. “다음 달부터 등록할까 해. 학원 다니면서 알바하려면 좀 힘들겠지만 그래도 학원 다니려고 시작한 아르바이트니까…… 해야지.” “부모님은, 아직 모르시는 거지?” “얼마 전에 들켰어. 엄마한테 제대로 맞았지.” “맞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