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00)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저녁의 이치
제 운명도 모르면서 아직 숨 붙은 것들이 측은할 따름이라고 대답했다. 몸뚱이 지닌 것들은 결국 알게 될 것이라고, 저녁의 이치라고, 그가 말해 주었다. 개를 잃은 사람들에게 내 개의 이름은 쿠모, 캐러멜 팝콘 더미같이 생겼다. 처음 만났을 때의 쿠모는 누군가 짓이겨버린 발 매트처럼 생겼었다. 그러나 내가 데려다 씻기고 털을 말려 주자 꿀빛 구름처럼 다정해 보였다. 쿠모가 수건에 감싸인 채 별빛 같은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이 내 마음에 스며들었고, 나는 그 애에게 좋은 일이 생기기를 빌었다. 목욕을 시킨 뒤 나는 쿠모를 동물병원의 유기견 보호센터에 맡겼다. 그러나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나는 다시 쿠모를 데리고 왔다. 원룸 촌 담벼락 아래에서 발견한 쿠모를 집에 데리고 와 씻긴 일은 결국 내 삶을 구하는 일이 되었다. 개를 키우면 안 된다는 조건이 달린 월세방에서 우리는 숨죽이고 행복해했다.
-
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수필 「유능제강 약능승강」외 1편
흙으로 빚어진 토기는 수천 년 세월에도 마치 어제 것인 양 멀쩡하다. 그에 반해 쇠붙이로 만들어진 검은 하나같이 벌겋게 녹이 슬어 바스러지기 일보 직전이다. 토기는 흙 특유의 부드러움 덕분에 기나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 원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었지만, 검은 쇠가 지닌 성정의 단단함으로 인해 오히려 본래의 형태를 유지할 수 없었던 게다. 칼이 처음 대장간에서 시퍼렇게 벼려졌을 때는 세상에 두려울 상대가 없는 무적의 권능을 뽐낸다. 그 앞에서는 대다수 형태 지닌 것들이 순식간에 꺾인다. 하지만 이 절대의 강자가 가장 부드러운 존재인 물을 만나면 꼼짝없이 허물어지고 만다. 그래서 음양오행에서도 수극금(水剋金)의 법칙으로 가르치고 있는가 보다. 이야말로 참으로 오묘한 대우주의 철리가 아닌가. 태풍이 불어닥칠 때, 플라타너스와 수양버들의 모양새를 눈여겨 살펴보라. 플라타너스가 중동이 쉬 꺾여버리는 데 반해 수양버들은 설사 휘어는 질지언정 웬만해서 부러지진 않는다.
-
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시·시조 피붙이 외 6편
기업가는 그의 불안과 현재를 공매했고 그는 난폭한 신화 속에서 제 이름조차 돌려받지 못했다. 아니다, 실은 이건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서, 오래되어 너무나 먼 이야기라서, 우리는 그를 알 수 없고, 그저 모든 것이 아닐 뿐이라서, 내가 아니라서, 아니어야 해서, 우리는 땅에 떨어진 초콜릿바에 모인 눈먼 개미라서, 유리 조각으로 만든 밥알을 그를 닮은 저녁의 아이에게 떠먹일 뿐이라서 작가소개 / 김안 2004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및 동대학원 박사 과정을 졸업했다. 시집으로 <오빠생각>, <미제레레>, <아무는 밤>이 있다. 제5회 김구용시문학상, 제19회 현대시작품상, 제7회 딩아돌하작품상을 수상했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