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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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비평 1960s-2020s 반(半/反)예측의 상상력 ③
‘여아불호사상’이라는 한국 가족주의의 집합 의지, 차원 이동 기술과 임상의학 낙태 기술, 거기에다 뭔지 모를 미래학(?)이 뭉뚱그려진, 통치성의 결과로 국가의 결단이 이루어지는 건 합당한 설정이다. 국가-법인은 진리와 친구들이 대면한 끔찍한 문제, 즉 가임기 여성의 몸과 시공간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조절하는 초현실적 테크놀로지를 관장하여 진리와 친구들의 죽음과 망각을 실현한다. 진리는 그에 따른 변화를 ‘정치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핍박받고 망각된 존재들 편에서 1990년 여성들을 압박하는 ‘여아불호’와 소수자 혐오의 집합 의지의 현현에 맞서는 인정 투쟁을 시작한다. 국가라는 ‘보편적인’ 법인의 정치적 결단에 따라 개인의 입장이나 삶이 뒤집히고, 그에 따른 모종의 변화가 집합적인 일반 의지로 현현하는 사태는 실로 역사의 현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명준이 살았던 해방기 한반도가 그랬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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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비평 비판의 비판
또한, 그렇기에, 이른바 ‘비판적 지성’이란, 그러한 부정적 정동의 힘에 의하여, 자신의 주관적 욕망과 느낌으로부터 분리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객관성의 효과를 장악하여 지배적 위치를 획득한 권력의지의 가면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비판적 지성에 기초한 과학이기를 원하는 비평의 진리 주장은 진리에의 의지가 아니라 권력에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게 과학적 진리의 문제는 자주 정치적 권력(힘)의 문제로 대체되고 있지는 않은가? 또한, 그렇기에 많은 과학적·정치적 논쟁들/투쟁들은 진리가 이기는 것을 보여주지 않고, 이기는 것이 진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은가? 과학이 추구하는 것은 진리이다. 비평이 과학이고자 한다면(혹은, 비평이, 유희적 지식이건 진지한 지식이건 어쨌건 지식/인식과 관련된 한에서 과학적이어야 한다면), 비평이 추구하는 것 또한 진리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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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소년, 지구 종말의 날까지 분열하라
정규군이 주도하는 세계, 엄숙한 진리를 설파하는 세상 속 주류를 위한 세상에 섞이지 않겠다는 비주류의 대항마는 이렇게 경쾌하고 도발적인 태도로 진행된다. 진지함이나 진리의 역겨운 설파 따위는 상대하지 않는 무심함은 세계가 흘러가는 흐름을 가르는 분열의 행위로 격상된다. 손바닥이 대걸레가 되는 오늘, 작성된 시나리오에 따라 오른손을 귀 옆에 붙여 들고 발표를 하는 친구 옆에서 깔깔깔, 공부 잘하는 친구 뒤에서 깔깔깔, 온종일 네발짐승처럼 궁둥이를 들고 빛나게 닦은 복도, 장학사가 무심히 지나갈 복도, 우리의 타액이 깔깔깔, 부서지는 아밀라아제, 젖은 눈동자를 그득 채운 물풍선이 깔깔깔, 던져 맞추기에 알맞은 둥그런 표적, 장학사의 완강하고 깔끔한 뒤통수가 깔깔깔깔깔, ― 「장난치기 좋은 날」 중 아이들은 배면에 숨겨진 자본의 논리를 인식하기 이전의 존재다. 다만 찧고 까부는 행위는 세상의 체계에 물들기 이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