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5)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주머니
주머니 차성환 내가 지금 입고 있는 바지의 주머니는 네 개이고 잠바에도 두 개가 있어서 왼손과 오른손을 이 여섯 개의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며 이리저리 집어넣어 보고 그러다 보면 내가 몸 안에서 덜컹거리기도 해 잘 맞지 않는 공간과 틈이 조금씩 벌어져 나는 헐거워지고 몸 주머니 안에서 빠져나올 것처럼 들썩이다 결정적인 재채기 한 방에 나를 훌렁 벗어 던져 순식간에 불량한 자세로 주머니에 손을 꽂은 내가 걸어간다 (연희문학창작촌에서)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非
非 차성환 차가운 비가 내리는 환한 대낮에 빗줄기가 아스팔트와 건물과 우산을 때리고 있다고 생각했고 갑자기 방안은 어두워지고 사람들이 비를 피하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서둘러 창문을 열어 비 오는 풍경을 보려 했지만 실제로 바깥에는 비가 오지 않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고 비가 아니 온다는 사실 때문에 간신히 조금이나마 들뜬 나를 실망시키기 싫었으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무슨 일인가 일어나기를 조금이라도 무엇이 움직이기를 바랐고 사실 비가 아니 올 수도 있고 환청을 들은 것일 수도 있기에 설령 비가 아니 오더라도 비가 오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가 조금 더 견딜 수 있어서 비 오는 것을 확인하고 그냥 비가 오는구나 싶은 거밖에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까 봐 나는 하루 종일 방안에 누워서 오늘은 비가 온다고 생각했다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구덩이
구덩이 차성환 한 농부가 감자를 심으려고 작은 구덩이를 팠다. 그날따라 유난히 흙은 보드랍고 햇볕은 따사롭게 내리쬐고 어디선가 청록빛 꼬리의 까마귀가 나타나 구슬프게 울음을 울었다. 갑자기 농부는 구덩이 파는 일이 기분 좋아졌다. 구덩이를 왜 파는지도 잊어버리고 구슬땀을 흘리며 열심히 구덩이를 팠다. 손톱이 빠지고 두 손에 피가 흐르는데 좀처럼 구덩이 파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구덩이가 제 무덤인 줄도 모르고 구덩이 속에 구덩이를 만들어 구덩이의 구덩이의 구덩이의 구덩이의 구덩이의 구덩이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구덩이를 벗어나려 해도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다. 지상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햇빛도 닿기 힘든 구덩이만 있는 구덩이 속에서 구덩이를 파는 농부를 기다리던 아내가 죽고 자식들은 고향을 떠나 외지를 떠돌다 더 이상 소식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렸을 때, 농부는 마지막 숨을 거두며 문득 땅 위에 두고 온 감자 생각이 났다. 이것은 구덩이의 묘비에 적힌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