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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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제8회_립스틱
흥미로운 것은 우리 시인 채호기도 여인의 입술에서 그런 종교적 황홀의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시인은 보들레르와는 다른 길을 걷습니다. 보들레르가 화장이란 매개를 거쳐서 일종의 관능성에 도달한다면, 채호기는 화장이란 매개 없이 관능성에 도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채호기의 시는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지독히도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색채를 띠는지도 모릅니다. 시인은 입술이 “우리 얼굴에서 유일하게 껍질 없이 자기의 속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입술을 “속내가 겉으로 드러나 있는 솔직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마침내 채호기 시인은 키스와 관련된 해부학적 형이상학에 도달하게 됩니다. “입술과 입술을 마주 대는 것이 즐거운 이유는 더는 숨길 게 없는 솔직함과 솔직함이 맞닿는 지극함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솔직함과 솔직함이 맞닿기 때문에 우리는 키스를 즐기는 것일까요? 역으로 질문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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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검은 돌 앞에서 - 너의 거울 외1
검은 돌 앞에서 채호기 겨울답게 눈이 내리고 있다. 몇 송이는 바람에 가볍게 흩날리며······ 눈이 내리고 있다. 검은 돌의 화면에 희게 긁힌 자국을 내면서······ 어찌할 수 없는 멀건 눈으로 나는 바라본다. 완고하게 닫힌 돌을 안타깝게 노크하는 눈송이들을. 불 꺼진 창 그 안의 어둠 같이 퀭한 눈으로 입을 닫고 있는 돌. 어둠 속에 무슨 단서라도 있는 듯 어떤 대답이 들어 있는 듯…… 검은 돌 앞에서 나는 불 꺼진 내 마음의 어둠을 뒤적거려 본다. 눈이 내린다. 낡은 니트에서 떨어져 나온 보푸라기 같은 것들이 바닥을 굴러다니는데, 검은 돌을 두드리는 다급한 눈들은 금세 사라진다. 나는 내 마음의 어둠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손끝에 걸리는 대답들을 안타깝게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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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너의 거울
너의 거울 ― 세기말의 자화상 채호기 너는 갇혀 있다. 너만 바라볼 수 있는 너의 거울 안에 너는 갇혀 있다. 네가 잠드는 집과 출근하는 회사, 네가 말하는 언어의 벽들이 너를 감금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 감옥 안에서 너는 안락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도저히 탈출할 수 없다. 아무도 너를 갇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너조차도 네가 자유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너는 거의 포박되어 있다. ―자기 자신의 감옥, 모국어의 감옥, 자각할 수조차 없는 거울의 감옥! 새 봄이 오면 새 풀들이 자란다. 너의 머리에도 머리카락이 자라고 새로운 언어들이 거품처럼 일어난다. 날아갈 듯 파닥거리는 거품은 희망인가? 비눗방울들은 터지고 사라진다. 새파란 목장에는 소들이 풀을 뜯어먹지 못해 야윈다. 풀들이 말한다. 군데군데 흰 꽃들, 손 흔드는 언어들. 소들은 먹는다. 말하거나 침묵하지 않고 되새긴다. 네 통화 방식으로는 소들이 더 이상 파릇파릇한 초록 귀에 속삭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