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3)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우연의 마주침, 그리고 이야기 - 윤성희 장편소설 『구경꾼』
훗날 이층 마룻장에서 처음 그 초성을 발견한 화자의 고모는 방송국 라디오 프로그램에 사연을 보내고 DJ는 ‘ㅅㅇ’과 ‘ㅇㅇ’을 발견한 또 다른 청취자들의 사연이 잇따르자 자신이 상상한 이야기를 들려 준다. 그 상상의 이야기 속에서 목수에게는 세 아들이 있고, 자라서 목수가 된 그 아들들은 아버지처럼 자기 이름을 새겨넣는다. 목수의 우연한 버릇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고모의 삶에서 계속 나타나고 증식한다. 고등학생 때 짝사랑했던 영어 선생님과 그 이후 고모가 사귄 여섯 명의 남자는 모두 이름에 같은 초성 두 개가 들어가고 고모는 그들 모두와 이별을 겪는다. 이것은 한 가지 예일 뿐, 『구경꾼들』의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우리는 비슷한 이야기의 접합과 증식을 만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이야기의 생성 과정에서 윤성희 소설이 상당한 정도로 우연에 대해 열린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호텔 해운대
"네, 청취자님. 부산 해운대에 위치한 특급호텔 〈호텔 해운대〉 숙박권입니다." 그러니까, 특급호텔이란 게, 제주도가 아니라 부산 해운대란 말인가! 수정은 앞장과 뒷장을 바꿔 책을 출판했을 때처럼 머리가 띵, 하고 아파 왔다. '제주도의 푸른 밤'을 실컷 틀어 놓고 해운대 호텔 숙박권을 주다니. 청취자를 우롱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러니 방송국 놈들 이상하다는 말이 나오는 거다. 전화를 끊고도 수정은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초콜릿 호텔이 염전 위의 소금이 되어 입속을 굴러다녔다. 짜고, 짜고, 짠맛. 혓바닥의 짠맛이 입천장과 잇몸, 사랑니까지 구석구석 들러붙었다. 입안이 소금강이 될 듯해서 그녀는 종이컵에 믹스커피 두 포를 뜯어 부었다. 달고 느끼한, 무게감 있는 액체로 소금들을 덮어버려야 했다. * 화요일, 수요일 연차를 내었다. 지난주에 수정이 편집 담당을 했던 단행본이 무사히 출간되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
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비평 헤어짐을 짓지 않기로
청취자가 근친이어서 어머니는 입을 열 수 있고, 과거사의 진실이 인선에게로 이동하여 그대로 엄폐된다. 이후 다큐 영화를 제작하게 된 인선이 자기 인터뷰로 증언하기까지 어머니의 말은 그대로 봉인되어 있었다. 또 하나의 매개물인 ‘눈’은 선형적인 시간의 표상이면서도 동시대성을 가시화한다. 죽은 어머니와 살아 있는 인선을 매개하기도 하지만, 인선과 눈은 지금 이곳의 현상이다. ‘눈’이 어머니와 ‘그 생각’을 매개하면서, 소개령이 발효된 후 학교 운동장으로 피신한 어린 시절의 어머니가 밟았던 눈의 기억은 되살아난다. 그것은 말을 함으로써 봉인을 풀어내는 언어의 제의이며, 언어의 제단을 쌓아야만 위로가 가능한, 죽은 자 앞에서의 윤리다. 『작별』은 1948년 11월부터 그해 겨울 동안의 제주 암흑사를 재현한다. 과거와 현재 간 매개물로 부각되는 몇 개의 이미지가 선명하다. 작가가 자신의 시-소설에서 “대체 무엇일까, 이 차갑고 적대적인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