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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도 창작광장 최우수상 수상작 / 시] 지우개 - 시 창작 연습 홍준석 (필명 : 홍제불능) 수없이 많은 비문을 삼킨 후에야 너는 지워진다. 먹혀 없어진다. 끝이 없는 허기는 너의 사인, 너는 스스로를 삼키기 위해 입을 벌리지. 검은 뼈를 줍고 다니는 청소부야, 말해 봐. 하얀 잿더미 위를 그토록 헤매는 이유, 온몸으로 바닥을 더듬는 이유. 눈먼 자는 세상을 그려 보기 위해 점자를 더듬는다지. 그렇게 읽은 것이 세상의 전부가 된다고 하지. 눈먼 청소부. 손도 없이, 몸도 없이, 너는 입으로 점자를 더듬지. 들려줘, 네가 수거한 점자들의 행방을. 검은 뼈로 그려지는 세상을. 검은 뼈로 쌓은 건물과 검은 뼈로 빚은 인간들. 비문끼리 엮여 비문 아닌 글이 완성되는 곳. 네가 입을 벌린다. 입 안 가득 검은 뼈가 세상을 그리고 있구나. 너는 너를 삼키기 시작한다. 입이 사라질 때까지 입이 입을 삼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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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공모마당 연간 최우수상] 시 바람개비 박원근 바람개비가 달음박질치면 하늘은 넓게 퍼져나간다 사연들이 포개질수록 바람의 언어는 부풀어 오른다 수수밭 저녁 무렵 노을빛 붉은 말言들 쏟아내고 싶어도 바람은 어깨뿐이어서 단모음만 긁어낸다 간혹 비밀들이 모질게 아려오면 바람은 회벽 물무늬로 들러붙어 기억들을 삭혔다 강기슭에 아이들이 소리친다 강은 떠밀려 가는 시선들 자갈밭에 시간의 빗장을 걸어 보아도 물살에 파인 상흔 속으로 계절은 요동쳤다 아이들은 강의 밑바닥이 왜 두꺼워지는지 알고 있을까 왜 울음들은 침잠하는 것일까 강 줄기 저편으로 수무지개가 피어나자 풀씨 회오리치는 들녘으로 젖은 발들이 몰려간다 강과 들의 잿빛 경계가 허물어진다 바람개비가 간지럽게 만진다 바람 속 메마른 목젖을, 강물 속 축축한 눈두덩을, 바람개비가 속살거린다 바람은 떨어져 나온 하늘 강은 흐르는 피안彼岸 길섶 여기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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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도 공모마당 연간 최우수상 수상작 ] 내 발가락 속에는… 김은희(필명 : 위나) 내 발가락 속에는 뭔가가 있지 오른쪽 엄지발가락 안에는 작은 종을, 왼쪽 엄지발가락 안에는 솜털 구름을, 꼭꼭 숨겨 두고 있지 오른쪽 엄지발톱은 빨간색 매니큐어를, 왼쪽 엄지발톱은 파란색 매니큐어를 발랐지 아무도 모르게 꼭꼭 숨기고 덮어 뒀지 내가 걸을 땐 종소리가 흘러나와 내가 걸을 땐 구름처럼 몸이 가벼워 햇빛보다 먼저 눈을 뜨는 아침에 구름처럼 가볍게 일으켜 세워 주고 달빛보다 늦게 잠드는 까만 밤에 은은한 종소리로 나를 재워 주지 세상은 나의 종소리를 듣지 못해 구름처럼 들뜬 나를 알아채지 못해 언젠가 내가 지구 반대쪽 노을의 끝을 여행하게 된다면 내 발가락 속 종소리는 파란 하늘 가득히 물결치고 내 발가락 속 구름은 붉은 노을 사이로 피어오를 거야 내 발가락 속에는 뭔가가 있지 꼭꼭 숨겨 두고 오늘도 노을을 바라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