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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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글틴유감_10주년 특집] 글틴의 성지 치엘구스또
그날도 우리는 하는 일 없이 모여서 김경주와 칸트, 하마랑 사자가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 따위를 토론하며 밤을 샜다. 어느새 해가 떴고, 죽을 것처럼 피곤했지만 집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기어들어간 곳이 치엘구스또였다. 우리는 테이블에 엎드려서, 혹은 긴 의자에 뻗어서 죽은 듯이 잠을 잤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가 우리를 깨웠다. “저기요, 죄송한데, 나가주세요” 카페 주인이었다. 카페 주인은 “제가 너무 하는 거 아니죠?”라고 덧붙이며 우리를 쫓아냈다. 카페 주인은 우리를 가출 청소년 무리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하긴 그렇게 오해받아도 할 말이 없는 행색이긴 했다. 우리는 그렇게 잠이 덜 깬 채로 치엘구스또를 나와야 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치엘구스또에 발길을 끊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 이후에도 우리는 치엘구스또에서 2500원짜리 레몬티 하나만 시켜놓고 몇 시간이나 죽치고 앉아 있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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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누군가 당신인 듯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른다면
(임마누엘 칸트, 『판단력비판』) 이 시대에도 여전히, 아니 더욱이나 시가 필요한 이유를 밝히고 있는 이들은 셀 수 없이 차고 넘친다. 가까이는 이반 일리치(『성장을 멈춰라!-자율적 공생을 위한 도구』)가 그렇고, 더 가까이는 김종철이 그렇다. 문학적 상상력은 ‘삶에 대한 충실성’이다.(김종철, 『땅의 옹호』) 어찌하여 경제적 수치를 들이대며 시인을 삶에 무력한 자로 몰아붙이는가. 고작 몇 줄만 남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문장들을 지워야 했는지 모른다. 아마도 누군가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게다가 모든 것을 수치화해야만 하는 근대적 이성과 합리성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다. 시가, 아니 문학이 광기에 사로잡힌 무의식과 비이성의 세계를 애써 드러내고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려는 것은 저 근대적 주체의 폭력성을 넘어서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이런 황망한 이야기를 듣고 놀란 것은, 다른 이들의 시선이 이렇게 바닥까지 떨어져 있었는지 내가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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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경계하라, 지금 이순간 황홀한 그녀!...그렇지 않다면?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칸트 선생도 여성은 아닌 것 같다. 단지 자연 선택에 의한 두뇌 사용의 차이를 농담삼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여성비하로 인식되지 않길 간곡히 바란다. 어째든 남녀의 오해와 갈등의 대부분의 원인은 여기에 기인한다고 본다. 그녀는 기분이 중요하고, 나는 문제 자체가 중요하다. 그녀는 기분이 좋으면 문제는 해결된 것이고, 나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기분이 좋아진다. 딸이 어느덧 고등학생이다. 어느 날 딸과도 자연 선택의 결과의 차이로 인해 다투었다. (내용은 다르지만 남녀를 본질적으로 파악해 볼 수 있는 진화론을 유전자적 관점에서 쉽고 재미있게 쓴 책으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와 <눈먼 시계공>을 추천해본다.) 그 싸움이 있은 후, 나는 딸에게 내가 아버지로서 잘한 점 10가지와 잘못한 점 10가지를 적어보기를 청했다. 그 결과 잘한 점은 5가지만 적은 반면 잘못한 점은 무려 68가지를 적어 보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