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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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기획소설_HㆍOㆍTㆍEㆍL ②] 유리주의
덩치가 큰 지영과 키는 작지만 다부진 몸매의 정훈이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구경은 좀 나중에 하라는 투로 개량한복을 입고 온 도사와 마리가 정훈의 어깨를 두드렸다. 도사와 마리는 버스에서 내리는 와중에도 팔짱을 풀지 않았다. 정자가 그들을 노려보며 맨 마지막으로 차에서 내려왔다. 버스가 떠나고, 이십대 초반의 여자 가이드가 일행을 호텔 안으로 들여보냈다. 도사 커플이 문 쪽으로 거침없이 걸어가다 동시에 외마디 소리를 내지르며 얼굴을 문질렀다. 건물의 겉면 전체를 통유리로 감싼 호텔이었다. 이곳의 현관문은 직업정신이 투철한 청소부가 닦고 닦고 또 닦아 놓아 흡사 특별한 눈에만 보이는 오로라 같았다. 도어맨이 병덕의 팔을 붙잡고 걸어왔다. 가이드가 겨우 호텔 안으로 들어선 사람들을 뒤로 한 채 전화기를 귀에 대고 유리문 밖으로 뛰어 나갔다. 청소부가 문 옆에 붙어 있는 ‘유리주의 ()’ 글자를 걸레로 한 번 더 닦았다. 바로 밑에 한국어로도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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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유리와 모리
풀들의 얼굴, 풀들의 손가락, 풀들의 입술, 풀들의 성기, 풀들의 발목, 풀들의 발가락, 풀들의 눈물, 유리는 그런 것을 좋아했고, 식물들도 유리의 손을 좋아했다. 유리가 어루만지면 식물들은 좋아서 몸을 가볍게 흔들었다. 유리는 까끌까끌하고 보들보들한 질경이 싹을 천천히 쓸어보고, 촉촉한 흙바닥과 작은 돌멩이들을 쓸어보았다. 유리는 지금 모리의 뺨과 손가락이 만지고 싶었다. 그럴 때면 만질 수 없는 모리 대신에 주변의 풀잎들을 더 예쁘게 만지작거렸다. 여리지만 질기고 뻣뻣한 것들이 유리에게 위안을 주었다. -질경이 싹이 제일 예쁘더군요. 싹이 흩어져 있는 문양이 꼭 만다라처럼 보입니다. 유리가 이야기하면서 고개를 들었을 때, 모리가 유리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유리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유리는 모리의 시선을 받으면 쑥스러움을 느꼈다. 대화는 그래도 조금 자연스러워졌지만, 두 사람 사이에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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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유리방패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고 싶다는 생각이 큰 탓도 있지만 혼자서 시험을 친다는 게 불가능하게 여겨질 정도로 M과 나는 분리될 수 없는 사이였다. 우리는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거나 한 사람의 앞모습과 뒷모습이었다. M이 사라지면 나는 두께가 없는 종잇장처럼 변해버려서 혼자 서 있을 수조차 없을 것이다. 나 역시 M에게 그런 존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서른 번의 입사시험을 함께 치렀다. 백전백패, 승률은 제로였지만 혼자서 시험을 쳐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들지 않았다. 우리는 면접시험도 함께 치렀다. 함께 치른 정도가 아니라 언제나 면접실에 함께 들어갔다. 동성애자가 아니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고, 신입사원은 한 명만 뽑을 거라는 답변을 하는 회사도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막무가내였다. 함께 면접을 봐야 우리의 진가를 보여줄 수 있다면서 인사담당자를 들볶았다. 가끔은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회사도 있었지만 ‘마음대로 하세요’라고 하는 담당자가 더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