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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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파토스 이후, 시는 어떻게 가능한가
고봉준의 젊은 작가 인터뷰 파토스 이후, 시는 어떻게 가능한가 ─ 하재연 시인 인터뷰 고봉준 * 오래 전, 나는 감정의 격한 파동들이 시(詩)의 근원이라고 믿었다. 그 시절 ‘시’는 고백이었고, 상처의 전언이었다. 고백할 수 있는 내면세계와 타인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상처가 없다면 시인은 자신에게 고통을 가해서라도 그런 극단적 경험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고통 때문에 시인들이 조로(早老)하고 단명(短命)한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같은 이유에서 불행한 시대, 그 시대의 정중앙을 관통한 시인들만이 위대한 시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시절, 시를 쓰려 했던 몇몇 사람들은 자신의 재능 없음과 상처 없음을 탓하면서 지독한 염오의 감정을 품었고, 그 독설의 기운을 주체하지 못해 폭발하기도 했다. 90년대를 지나오면서 그러한 정념과 파토스는 한층 낮은 곳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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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묵시록으로 읽는 2008년 소설들
우리의 소설사에서 한동안 희귀했던 분노의 파토스는 지금 이 세계의 파국의 전조이자, 파국을 상상하는 이유와 공모되어 있다. 2. 이들은 왜 분노하는가 - 묵시록 서사의 발생론 2007년에 마지막 읽은 소설과 2008년이 되어 처음 읽은 소설을 떠올려보니 공교롭게도 어떤 공통점이 있었다. 우선, 두 편 모두에서, 우리가 한동안 잊고 지내던 격렬함, 분노 같은 것들을 볼 수 있었다는 점(박민규, 김애란의 소설로 설명되어 온 2000년대식 정서, 예컨대 원한(resentimental) 없는 세계의 유머, 부채감 없는 상상력과 비교해볼 때), 더구나 그 파토스의 구체적인 리얼리티를 논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한동안 ‘쿨(cool)하다’라는 조어가 새로운 시대의 권장 덕목처럼, 혹은 한 시대의 정서적 특징인 양 풍미한 일도 있었고, 마침 우리의 소설에서도 감성의 자기관리술이라고 할 만한 특징들이 주목된 바(예컨대, 김애란, 윤성희 소설에 대해 종종 우리는 이렇게 읽어왔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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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악기(惡記) 23~27 - 연재 마지막회
전락 자체의 이미지이며 하나의 파토스인 괴물 자신은 그런 이유로 그 무엇으로든 전락할 수 없다. 그런 자가 더 작은 동물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을 설립함으로써 비약하도록 허락한 우리가 과연? 인간이 정관적이며 정량적인 분석에 적응되기 쉬울 정도로 그 각도가 기울었다는 증명으로써, 신의 식물로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이변(異變)의 크기로 줄어들고만 인간이 과연? 자신들의 불구에 대한 이유를 얻어내기 위해 증거를 숭배했던 우리가 과연? 자연과 같은 종이면서도 대상과 달라지기 위해 사물을 멈춰 세웠던 우리가 과연? 서로에게서 진실을 듣기엔 나이가 너무 많았던 인간은 이러한 연쇄를 의문한다; 살아남아야 하는 작은 물벼룩 하나의 겨울, 야생으로 남아 원시와 견주는 손길, 그런 형상으로 작은 양(量)들이 더욱 적어진다는 것, 성(性) 조숙이 일어나는 계절, 이들 시간이 우리의 유생상태가 다 자라기 전에 죽음을 시작하는 위대한 번식일지도 모른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