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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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세편의 희곡을 통해서 본 ‘과학기술 사회’의 의미
과학기술이 발달하면 개인이 행복해지고 사회가 발전할까요? 얼핏 생각하면 분명 그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는 긍정론에 못지않게 부정론도 팽팽히 맞서 있답니다. 간단히, 황우석 사태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생명공학을 한번 생각해보시죠. 생명공학이 각종 난치병과 불치병들을 치료하여 개인적으로는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믿음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생명공학은 도덕적 가치와 공공의 선을 거스를 뿐 아니라 자칫 심각한 부작용을 낳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들을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와 비판들도 역시 거셉니다. 어디 생명공학만 그렇겠습니까? 오늘날 첨단 과학기술들 가운데 상당수는 마치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유익과 유해라는 두 가지 가능성을 동시에 갖고 있지요. 물론 여기에는 정치적 ․ 사회적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습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과학기술과 떨어져서는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사회를 ‘과학기술 사회’라고 특징지어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이 과학기술에 의존하고 있는 사회라는 뜻이지요. 하지만 동시에 ‘위험 사회’라고도 부릅니다. 과학기술에 의해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위협을 받는 사회라는 의미지요. 생각해보면, 실제로 우리들의 일상적 삶을 구성하는 것들 가운데 과학기술과 연관되지 않은 것을 찾아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우선 휴대폰, 인터넷, 컴퓨터, 네비게이션, 위성방송, 디지털 카메라와 비디오, 전자 금융, 전자오락, 감시카메라(CC-TV) 등을 제외한 현대인의 삶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워졌지요. 그런가 하면 유전자조작 식품, 유전자검사, 배아줄기 세포, 수돗물의 불소화, 환경호르몬, 핵폐기물 등이 우리가 자주 접하는 사회적 이슈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과학기술의 중요성과 위험성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지요. 따라서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더 이상 어떤 과학기술이 유익하느냐 또는 유해하느냐를 밝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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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나는 극작가다
단지 한국만이 극작가의 수도 많지 않고 수가 많지 않으니 희곡을 쓰는 작가들의 역량도 그에 비례해 여러 모로 떨어진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국희곡의 양질전화를 위해서라도 문학전문출판사에서 외국 극작가들의 희곡만 출판할 게 아니라 우리나라 극작가들의 수준 높은 희곡들에도 과감하게 투자해야 한다. 문학평론가들도 시나 소설뿐만 아니라 희곡에 대한 평도 쓸 수 있어야 한다. 연극평론가들이 비평하는 것은 연극이지 희곡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문단 안에서 사고의 획기적인 전환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한국희곡의 발전은 아주 머나먼 나라의 일처럼 요원할 것이다. 나 역시 처음 희곡으로 데뷔한 선배 작가들이 나중엔 희곡을 계속해서 쓰지 않고 어느 순간 시나 소설로 업종을 바꾸는 게 참으로 이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작가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희곡을 지속적으로 생산해 낼 수 있는 문단과 연극판의 환경과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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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첫번째 이야기
다른 경로를 통해 데뷔한 작가로는 고재귀나 조현진, 지경화, 문정연, 이시원 같은 이들의 어떤 희곡들이 품고 있는 독특한 상상력이 좋았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는 말처럼 ‘작가는 작가를 알아본다.’는 말이 있다. 최명숙의 희곡은 ‘내 곁에도 이런 괜찮은 극작가가 있었구나!’ 하는 놀라움과 함께 오랜만에 문학다운 희곡을 읽는 재미를 톡톡히 안겨 준 사례에 속한다. 별 기대 없이 무심코 펼쳐든 희곡집에서 한 편의 희곡을 읽고 난 다음 다른 작품이 궁금해서 또 한 편을 읽게 되고 그 희곡을 읽고 난 후에 또다시 나머지 희곡들을 읽게 되어 나중에는 처음 앉은 자리에서 희곡집에 수록된 모든 희곡들을 읽게 되는 경우는 짧지 않은 독서체험을 돌이켜봐도 그렇게 흔한 경우가 아니었다. 희곡집에 실려 있는 작품들을 다 읽고 나서 바로 작가에게 전화를 넣어 독후감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은 물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