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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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소설 하이에나
의자와 거대한 호텔 로비 기둥 사이에 놓여 있던 것은 일전에 영훈이 들어 주었던 그 귤 상자였다. 영훈이 쓸데없이 호의를 베풀며 도와주었지만 예상보다 너무 가벼워 배신감만 느끼게 했던 바로 그 상자. 그의 주름지고 마른 손으로 힘겹게 연 귤 상자 속에는 귤 대신 알 수 없는 A4용지 열댓 장이 들어 있었다. 그중 아무 종이 한 장을 집어서 영훈 앞에 내려놨다. “내가 영훈 씨의 할아버지 되는 사람입니다.” * 개들의 가청 범위는 45,000헤르츠를 넘나들기 때문에 나는 고주파수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한다. 컵이 떨어지는 소리, 휘파람 소리, 흐느끼며 우는 소리, 공기 한 줌을 손바닥 사이에 두고 치는 박수 소리가 그렇다.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자극하는 소리는 깨물 때마다 삑삑거리는 이 장난감 인형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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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내가 아는 선배는
그래 얼씨구나 싶어 그 여자와 잠자리에서 같이 먹을 요량으로 바나나 두 개 홍시 두 개 귤 몇 개인가를 사 비닐봉지에 담아 들고 콧노래 흥얼대며 들어가 잠자리 펴놓고 기다리는데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금방 온다던 사람이 안 오는 기라. 그래 주섬주섬 바지를 꿰어 입고 나가보니 술집은 벌써 불이 꺼져 썰렁하고 달만 휘영청 밝은데 전봇대 밑에다 오줌을 깔기며 닭 쫓던 뭐 모양으로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보다 그 길로 곧장 집에 들어갔던 것인데. 그때까지 잠도 안 자고 기다리던 자식놈이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받아들고 아빠 이게 뭐야 하면서 애비 한입 먹어보라 소리도 안 하고 게눈 감추듯 하는 모양을 보고 무어라 말은 못하고 내 그놈의 집 두 번 다시 가나 봐라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느라 혼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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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아동청소년문학 고백쪽지
“귤! 됐어, 이걸로 찾을 수 있겠어!” 결정적인 증거였다. 이 정도라면 내일 바로 진실을 밝힐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규리도 내 생각에 맞장구쳤다. 그러면서 이제야 아라가 아라답다는 등 칭찬 아닌 칭찬을 했다. “고백쪽지를 받은 게 나일 수도, 이지훈일 수도 있으니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할 거야.” “그래야겠네. 일단 그 책을 읽었을 법한 아이들을 찾는 게 우선이지.” “이지훈이랑 같은 논술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 말하는 거지? 누군지 물어봐야겠다. 그런 다음 걔네들 글씨체를 보는 게 빠르겠어.” “내가 나서야겠군!” 팔을 걷어붙이는 규리가 믿음직스러웠다. “좋아. 귤 네가 있으니 잘 풀릴 거 같아. 무엇이 진실인지 내일이면 밝혀지겠네!” “솔직히 말해 봐. 아라 넌 아직도 고백쪽지가 이지훈에게 온 거라고 생각하지?” 역시 규리는 내 마음을 훤히 읽는다. 정다연이 아니라는 걸 안 순간에도 의심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