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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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시선
시선 박상우 1 내가 두 남자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건 밤 아홉 시경 강남대로 근처에 있는 일본식 선술집에서였다. ‘쇼부(勝負)’라는 제목의, 그러니까 뭔가를 결딴내기 위해 술을 마셔야 할 것 같은 묘한 분위기의 선술집에 혼자 앉아 나는 맹물을 마시고 있었다. 서른다섯의 학원 강사인 내가 그 시각 거기서 맹물을 마시고 앉아 있었던 이유는 만나기로 약속한 여자가 나오지 않아서였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언급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다. 몇 남자에게 다리를 걸치고 살아가는 한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는 것도 한심한 일이지만 그녀를 내 여자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기획 자체가 초장부터 죽을 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생각하면 악마와 악질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악마가 더 나쁜지 악질이 더 나쁜지, 그런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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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시·시조 「포기를 세다」 외 6편
오른쪽 양성종양으로 치료를 받았고 엄마는 오래전 자궁을 잃으셨다 나는 수유를 하지 못했고 엄마는 다섯 아이를 낳고 다섯 명에게 오래 모유 수유를 했다 우리는 자궁근종이 있었고 나는 아직 자궁을 적출하라는 의사의 권고를 귀 밖에 세워 두고 있었다 아이들은 비혼주의를 내세우고 나는 그 생각을 찬성하고 엄마는 아니라고 반대를 했다 선택할 수 없는 것과 선택을 하지 않는 것 사이에는 포기라는 장미가 담장을 넘어섰다 엄마의 선택은 우리를 기름지게 했고 나의 선택은 포기를 받아들이는 것이라 여겼다 지는 것들의 반대편 지는 것들은 꼬리가 길어서 쉽게 달아나지 못하고 밟아도 쉽게 사라지지 않지 하루 종일 대나무를 흔들어 대는 바람은 밤이라는 풍경을 집으로 끌어오느라 신발이 닳았고 어느 집에 들렀다 오느라 제 시간을 놓쳐 버린 봄비는 한여름 폭우처럼 내렸다 넘겨지는 페이지마다 비가 흘러내려 글자는 부서져 내리는 성처럼 앙상한 뼈만 남기고 꽃들은 흐드러지게 피는 것만 열중하고 지는 것은 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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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시·시조 「섬광과 섬망」외 6편
당신의 말들은 수족을 마음대로 부릴 수 없으니 퇴화된 눈만 뻐끔거리고 당신의 해마는 보이지 않지만 수족관에 갇혀 있다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는 우리는 간만의 차이에 따라 축축한 농담과 간발의 차이로 진담이 오가던 당신과의 기억에 갇혀 있다 새의 카탈로그* 새벽닭의 울음에도 계이름이 있다 첨탑 위에 서서 우는 저 으뜸음의 주인에게도 알고 보면 계면쩍은 곡조가 있다 수백 개의 구조신호를 잡기 위해 울음의 사연을 장단으로 줄이고 늘이는 건 외계의 방언을 수집하기 위한 아코디언 제작자의 전략 불협화음이 새장에서 탈출한 밤, 키를 높인 하이힐이 너무 높아 구름의 데시벨을 낮춰 탈수기를 돌리면 샛별들이 젖은 발로 턴테이블을 맴돌고 목울대에 묶어 둔 억센 발음이 새 나갈 것만 같아 축축한 축음기로 쥐어짜는 우주의 진동, 귀 기울여 들어 보면 심장부터 금이 가고 있는 무정란의 흐느낌 박제된 새들의 울음에도 스타카토가 있다 남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