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 > 문학사상
기획특집/ 국악의 가치와 아름다움
판소리와의 첫 만남은 분명 끔찍했다. 알지도 못하는 재미없는 걸 하라니, 아무리 노래가 좋다고 해도 내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날, 판소리의 매력을 세계에 알리고자 하는 열정 넘치는 청춘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그 가치를 알리려는 목적의 방송을 촬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제는 가슴속에서 일어난 소릿불이 타올라 내가 가야하는 길을 밝혀주어서 포기를 모르고 달리는 소리쟁이가 되어버렸다.
자연의 모든 소리를 담다
소리하는 것이 좋은 까닭은 자신을 노래에 실어 하늘로 날려버리는 듯한 자유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답답함에 바람을 타고 날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나는 소리를 바람 삼아서 하늘을 날곤 했다. 판소리는 이런 면에서 어떤 노래보다도 내게 강력한 에너지를 주는 최고의 음악이다. 옛날부터 우리 훌륭한 명창 선생님들께서는 판소리를 절대 노래라고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를 표현해내야 하는 특징 때문이다.
단순히 감정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철학, 만물의 자연을 표현해야 하기에 ‘노래’라는 단어에 이 모든 것을 담기에는 그 그릇이 작기 때문이리라. 소리꾼은 판소리의 언어가 풀어내는 이야기의 속뜻과 깊이를 헤아리지 않고서는 물질의 속성을 담아내는 성음을 절대 얻어낼 수 없다. 어렵고도 어려운 길이다. 하지만 이렇게 풍성한 소리의 깊은 맛을 알 아버렸으니 이 길이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어떻게 이 좋은 것을 함께 나눌 것이냐?’를 고민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기회가 닿는대로 일반 청중에게 들려주는 것을 시도했다. 거창한 공연을 시도한건 아니다. 소리가 자연을 닮았듯이,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소리와 어울릴 수 있을 적시에 살짝이 얹어보는 것이다. 즐거운 사람들과 술을 마시다 분위기가 한껏 달아오르면, 단가 강상풍월의 ‘술과 안주 많이 실어 술~렁 배 띄워라!’ 를 부르며 건배잔을 올린다. 그러 자 술잔의 경쾌한 노랫소리가 났고, 술을 기울이던 사람들의 얼굴엔 벌겋게 들뜬 미소가 함박 묻어났다. 마음의 정이 담뿍 들어 얼굴만 봐도 즐거운 사람들과 목포 유달산에 올라 지는 해의 끝자락이 비추는 흐드러지는 야경을 보며 땀을 식혀주는 바람을 맞았을 때, 님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한 쑥대머리를 부른다. 그러면 그 이상의 노래가 없을 정도의 전율이 느껴진다. 그렇게 시작된 소리는 그야말로 즉석에서 벌어진 판의 소리였다. 사람들과 어우러진 소리는 완벽하게 사람들을 품었다. 판소리의 에너지와 전율을 가슴으로 담고, 그 맛을 느낀 사람들은 종종 내게 소리를 들려 달라 전화를 걸어오곤 한다. 소리를 하는 행복을 맛볼 수 있다. 이렇게 소리에 매료되는 사람들을 볼 때면 판소리는 언제나 유연하게 우리 곁에 있을 수 있음을 분명히 느꼈다. 그것도 아주 최소한의 구성으로 말이다. 고수의 북가락 하나만으로도 훌륭한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설사 북이 없더라도 두드릴 수 있는 무언가만 있으면 된다. 참으로 원시적인 모습이면서도 현대 예술 감각의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을 수 없다. 창자는 한 명이지만 전지적 능력을 가진 인물이 되어 삶을 관조하면서도, 어리석은 인간으로 분하여 감정을 토해낸다.토끼가 되어 산으로 들로 껑충껑충 뛰어다니는 모양새를 소리로 잡아내면, 청중은 ‘얼씨구!’ 라는 추임새가 절로 튀어나온다. 세상 어디에도 이런 구성의 예술은 없을 것이다. 판소리는 일찍이 인류의 미래에 삶의 지혜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추임새’를 통한 공감과 소통이 그것이다. 폭포수 소리를 이겨낼 듯한 소리꾼의 큰 소리로 더 멀리 사람들을 품어내면 ‘얼쑤!’ 하고 응하는 위대한 소통력을 자랑한다. 어쩌 면 판소리는 이미 그 위엄찬 모양으로 세계를 향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플라멩코를 통해 깨달은 전통의 의미
최근 한류가 글로벌하게 들썩이고 있다. 드라마와 K POP , 한식까지 인기가 치솟고 있는 요즘, 나는 그 한류의 중심에 국악이 있기를 희망한다. 내가 영국 런던의 거리에 선 이유다. 맨땅에 헤딩하듯이, 거리에서 사람들을 붙잡기 위해 다양한 소리 대목과 민요를 부르며 내가 배운 것은 사람들에 대한 반응보다 도시 런던이 가지고 있는 문화강국의 위대함이었다.
나를 포함해서 수많은 나라의 다양한 인종들이 버스킹을 하기 위해서 런던 으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영국은 자연스럽게 그 많은 예술가들을 품고 있는 예술인들의 터미널이 되어있었다. 거리공연장의 주변에는 모든 사람들이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내셔널 갤러리가 있었고, 수많은 다양한 뮤지 컬 홍보 벽보가 붙어 있었다. 그때 나는 느꼈다. ‘아, 이 나라는 보통 나라가 아니구나.’ 영국이 문화 강국인 이유는 문화적으로 방대하게 열려있기 때문이고 자국민들이 그것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학부 시절, 라틴아메리카 문화 예술이라는 교양 수업을 통해 스페인의 전통 예술인 플라멩코의 형성과정을 들을 때였다. ‘전통’ 이라 하면 보통 그 지역만의 고유 문화가 순결하게 잘 담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었다. 플라멩코는 15세기 무렵 당시 제일 가난했던 스페인 남부의 안달루시아 지방으로 건너온 인도 집시들의 전통 음악에 기원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문화와 결합되며 오늘날의 플라멩코가 됐다. 약 800년 정도의 지배를 받은 이슬람 음악과 스페인의 카톨릭 문화가 결합이 된 복합문화체인 것이다. 플라멩코는 현재 스페인을 대표하는 전통문화 예술로 자국민의 종교, 의식, 축제에서도 연행되며 자연스럽게 그들의 삶에 자리잡았다. 뿐만 아니라, 필수 관광코스로 포함될 정도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국악을 공부하고 있는 나에게 플라멩코의 형성과정은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생각을 아주 강력하게 위협했다. 그후 나의 사고는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전통은 옛것을 가지고 있으되, 반드시 현재를 향해 활짝 열려 있어야 한다!’
훌륭한 예술일수록 시대와 대화를 하고 인류에게 좋은 메시지를 전달 한다. 이런 아이디어를 제공해준 사람은 바로 예술가 故 백남준이었다. 작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 30주년>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내가 ‘소통’을 이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아마도 백남준의 영향이 9할 일 것이다. 나는 완전히 그의 아이디어로부터 공격받았다. 조지 오웰은 ‘인간은 기술로 인하여 철저하게 감시받고 고립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백남준은 ‘기술을 활용하여 인류는 더욱 화합하게 될 것’이라는 걸 당시의 최첨단 기술이었던 텔레비전을 활용하여 세계에 메시지를 던졌다. 그는 자신의 예술에 현재를 담아 사람들을 다시 한번 사고하도록 했을 뿐 아니라 새로운 미래까지 제시했다. 이런 위대한 그의 아이디어를 통하여, 나는 내가 고군분투하고 있는 판소리와 국악의 역할에 ‘수준 높은 예술’의 모습까지 덧붙여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판소리를 통하여 인류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로 사고하게 할 수 있을까.’
‘세계공연예술의 대모’라고 불리는 프리바이젠은 “21세기 초 공연예술 은 지나치게 서구 중심으로 흘렀는데, 이제 각 지역마다 고유의 예술이 뭔지, 그 기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할 때”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이 말을 이제 어느 한 문화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각 지역의 문화가 다양 하게 공존하여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라는 미래를 제시한 것이라고 여긴다. 한국인의 정서가 응축되어 있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판소리는 이에 대해, 미래에 세계를 향한 한국인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가장 한국적인 예술 문화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확인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리꾼들은 세상에 집중해서 형태와 틀에 구애받지않고 자유롭게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여야 한다는 것을 스페인 전통예술 ‘플라멩코’의 형성과 정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다져 본다.
사람과 세상을 향해 있는 판소리
판소리를 시작했을 12살 때, 나는 이 음악을 평생동안 계속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을까. 밝은 미래를 꿈꾸는 키 작은 어린아이의 김희재가 지금 나에게 묻는다. 판소리꾼의 고행길을 오랜 시간 걸어온 나의 모습은 이상 하게도 이렇게 답한다. 열 번도 더 “예스!” 힘들때면 이 세상의 혹한에 오 한이 들어 수도 없이 머리를 떨구고 소리없이 흐느꼈지만, 소리하는 기쁨을 느낀 나의 가슴은 단 한번도 ‘NO’를 상상한 적이 없다. 그 가슴이 나를 12살의 어린 아이처럼 자꾸 꿈꾸게 하고 찬란한 미래를 상상하게 한다.
판소리는 본래 늘 사람과 세상을 향해 있었다. 소리꾼이 하나의 광대가 되어 사람들을 울고 웃기며 마음이 활짝 열려 있을 때, 세상을 풍자하여 날카롭게 메시지를 전달하여 관객을 생각하게 할 줄 알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사람들과 언제나 틈틈히 주고 받는 추임새가 있었다. 형태 자체만으로 이미 현대적이었던 판소리에게서, 영국인이 예술을 받아들이고 즐기는 태도를, 세상을 향해 화려한 자태를 자랑하는 스페인의 전통 플라멩 코를, 백남준이 보여주었던 현재와 미래를 제시하는 수준높은 예술을 기대하는 것은 그렇게 터무니 없는 일이 아닐 것이라고 본다.
헤르만 헤세는 ‘예술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생이 아름답다고 깨닫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예술을 통하여 인류를 새롭게 사고하게 하려는 것도, 전통의 아름다운 가치와 효용을 생각하는 것도, 그 모든 고민의 끝에는 인생을 어떻게 하면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냐는 인간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나는 판소리라는 예술의 가치를 백범 김구 선생님이 <나의 소원>에 남겨 놓으신 글과 함께 두어서, 문화와 함께 비상 하고 싶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경제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힘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백범 김구 <나의 소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