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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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비평 살아남은 자의 아름다움
살아남은 자의 아름다움 - 편혜영, 『재와 빨강』(2010) 한승은 1. 비루한 연명은 아름답지 못하다. 남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방관하며, 심지어 남의 목숨을 끊어서라도 나는 살아남겠다는 생존 본능은 애달프지만 구차하다. 구차하지만, 내버리고 싶어도 내버리기 쉽지 않은 목숨의 내성이다. 내가 이렇게 살아남은 것은 비겁하고, 이렇게 연명하는 삶은 추할 뿐만 아니라 삶이라고 할 수도 없다는 넋두리는 좀체 면역력이 형성되지 않는 고질적 자조(自嘲)의 현상이다. 죽고 싶지만 죽지 못하고,1 죽지 못한 손에 쥔 칼을 내가 아닌 너에게 휘두를 때, 나의 삶은 어떤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삶도 죽음도 괄호 친 것 같은 생존. 쓰레기 더미를 뒤져 상한 음식을 먹고, 지하 하수도관에 숨어 눈을 붙이는 삶은 삶이라 부르기에 궁색해 보인다. 이 궁색함을 삶의 앞뒤에 괄호 치기로 무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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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등뼈로만 살기
도를 닦지도 구태여 반항하지도 않는 속된 아름다움. 안식일을 지키지 못한 고된 아름다움. 빗줄기가 더욱 굵어졌고 날개가 흙이 됐고, 그림자도 흙이 됐다 소멸을 향해 가는 침울한 술렁임 등뼈만으로 살아야 하는 날들이 남았다 * 지원의 얼굴: 권진규의 테라코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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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만난다는 것, 그리고 잘 만나는 것의 아름다움
주홍미 가만히 인생을, 일상을 돌아보면 우리는 평생을 무언가와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반복하는 시간을 쌓아가며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깝게는 남과 여가 만나 사랑을 하다 헤어지는 일, 직장에서 동료를 만나는 일, 사업 파트너를 만나고 헤어지는 일, 일상적으로 친구를 만나는 일 등 1차적인 나와의 관계 속에서 사람을 만나게 되는 일이 있는가 하면, 또 내가 만드는 무대에 서 예술가를 만나는 일, 또 그 무대를 만나기 위해 온 관객을 만나는 일……. 그리고 무형의 어떤 느낌과 기분과 만나게 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아주 좋은 만남과 헤어짐이 있는가 하면, 차라리 만나지 말았어야 할 것을 만나고야 말았다는 혹은 만나게 했다는 후회도 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잘 만나야 한다는 것인데, 잘 만난다는 게 뭘까? 무언가 만나게 된다는 것에 대해 많은 호기심을 가져서였을까. 난 운이 좋게도 만나게 하는 무언가를 무대화하는 일에 있어서 다른 동료들이나 선배들에 비해 많은 기회를 가졌던 편인데, 음악을 전공한 나는 주로 음악공연과 관련된 일을 많이 해왔다. 〈창작과 실험〉이라는 3년간의 시리즈물을 통해 ‘대중음악과 전통음악’, ‘전통음악과 서양고전음악’, ‘대중음악과 서양고전음악’ 등등을 만나게 하고 이를 조각내고 섞어보고 싶은 욕심에 흥분과 기대로 3년을 보냈었다. 1994년의 일이니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이 되었는데, 이미 짐작하겠지만 이를테면 사물놀이와 록의 협연이라든가 해금과 일렉트릭기타와의 협연이라든가 드럼과 사물의 만남이라든가, 혹은 각기 서로 다른 튜닝구조와 절대음을 가진 타국의 선율악기와의 즉흥 협연을 위한 무대를 만들기도 했는데, 새롭다는 것이나 만난다는 것의 기획의도를 강조하며 무모한 시도와 완성되지 않은 작품을 가지고 무대화했다는 것 때문에 요즘 들어 가끔씩 얼굴이 화끈거리며 창피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즈음에는 크로스오버 혹은 퓨전이라는 이름의 공연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러다 보니 음악계에서는 예술가들과 평론가들이 이 현상에 대한 자기반성적 측면의 세미나와 강의들을 열기도 했다. 지금까지 내게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 국립국악원장으로 계신 김철호 씨의 이야기인데,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이런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해볼수록 느끼는 거지만, 기본적으로 서양고전음악과 한국전통음악은 서로의 강점을 보여주게 하는 서포터로서의 역할이 되어야 한다. 같은 것을 자꾸 찾으려 하지 말고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만남이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전체 음악 분위기 속에서 리듬악기가 강조되어야 할 부분과 선율악기가 강조되어야 할 부분을 얼마나 잘 배열하느냐가 관건이다.” 몇 년 전이었을까. 지금은 서랍 속에 고스란히 종이 몇 장으로만 남겨진 기획서가 되어 버렸지만, 각각의 최고가 만나는 Meet Series를 꿈꿨던 적이 있었는데 이러저러한 이유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었다. 예를 들면, 당대 최고의 Vocal 심수봉과 전인권의 Joint Concert와 같은 것인데, 이는 서로 다른 장르여서 얼핏 보기에 어울리지 않는 조합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최고의 예술가들은 어떤 식으로든 감동을 주기 마련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한 기획이었다. 또한 서로 헤어져 활동한 지 오래되었고 지금도 각각의 영역에서 열심히 활동하지만, 그래도 꼭 그들이었기 때문에 가장 아름다웠던 해바라기의 가수 이주호와 유익종을 무대에서 다시 만나게 하는 것 등등이었다. 그러다 2002년에 문학과 음악이 만나는 무대를 만들어보자는 모 문학단체의 제의를 받고 시작했던 것이 〈문학카페 명동〉이라는 공연이었는데, 이 공연은 서로 만나 좋은 기억이 될 거라 생각되는 문인과 가수의 만남을 토크와 노래를 통해 표현하는 공연 형식이었다. ‘신경림과 한영애’, ‘박완서와 전인권’, ‘천양희와 강산에’, ‘김지하와 오정해’ 등이었다. 〈문학카페 명동〉은 문인의 말과 작품, 가수의 말과 공연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공연예술이 문학에 현장-대중성을, 문학이 공연예술에 사유-생애성을 부여하려는 실험적 시도였다. 원고지와 컴퓨터 앞에서 자기와 싸움하며 고독한 시간을 견뎌야 하는 존재인 문인과, 대중 혹은 관객과의 1차적 커뮤니케이션을 매순간 맞아야 하는 대중가수가 서로 만나 다른 것들을 서로에게 부여한다는 소박하지만 다소 용감했던 의도가 때론 낯설었으나 아름다웠던 기억으로 그들에게 남기를 바라는 맘이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 이듬해 〈고은의 시와 무대예술의 만남 - 사람과 사람들〉이라는 무대도 만들게 됐는데, 이 공연은 시를 소재로 해서 만들어진 다양한 무대예술(작창, 단막극, 무용 등)이 조화롭게 펼쳐졌다는 언론의 평가와 관객들의 찬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주인공인 시인 고은이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 더 나아가 문학과 무대예술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에 대해 내게 지속적인 고민거리를 안겨준 공연이기도 했다. 외화되는 무대예술의 형태, 화려하거나 소박하거나 혹은 어색했거나 매끈했거나 하는 형식적 틀을 기본전제로 하고서라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시 ‘예술가-사람’이다. 왜냐하면 개별적 가치가 인정되고 존중될 때 ‘만남’이 가치 있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터너티브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어쩌다 뒤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삶이 예술이 되고 그럼으로써 예술가가 빛나고, 그 빛남이 서로 만나야 다시 예술이 되기 때문이다. 공연을 만든다는 것은 무엇과 무엇을 ‘만나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무대와 객석을, 예술가와 관객을, 또 예술가와 예술가를, 기획자와 기획자를, 기획자와 연출자를 만나게 하는 일이다. 잘 만나게 해서 서로를 보게 하는 일이다. 많은 공연을 통해 나는 잘 만나는 것을 경험하며 기뻐했고, 또 그렇지 못한 것을 경험하며 아파하기도 했다 각각 다른 사람들과 재료들이 만나서 조화를 이루려면 서로 ‘같음’과 ‘다름’에 대한 통찰과 이해가 있어야 하는데, 일방적으로 ‘같음’을 요구하는 사회 현상에 익숙해져 있는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우리’는 ‘다름’의 불편함에 대해 고개를 돌리기 일쑤다. 만남 속에서 개인들은 서로간의 ‘같음’만을 찾아내려 한다. 한 사회 안의 ‘같은 우리’들은 세상 보는 시선이 ‘같음’을 알아보는 희열과 다시 ‘다름’을 알게 되는 좌절을 경험한다(물론 희열과 좌절이 거꾸로일 때도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항상 이 둘(‘같음’과 ‘다름’)이 점점 멀어져 갈 때의 아득함에 대해 생각한다. 특히나 ‘다름’을 확인하는 극단적 상황을 만나게 될 때 ‘마음의 창’을 닫아버리고 보려하지도 않고, 그래서 보이지도 않고, 그러다 보니 급기야는 깨져버리는. 나는 공연을 통해 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꿈꾼다. ‘다름’과 ‘같음’을 서로의 창으로 비추어 보고 그것으로 인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변화된 일상’을 긍정적으로 경험하는 것, 다시 말하면 ‘다름’을 인정할 때 ‘같음’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 그것이 결국은 ‘잘 만나는 것’이 아닐까.《문장 웹진/20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