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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먼지 속에서 산란하는 빛: 파란노을 -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
화성의 노을은 푸르다. 대기가 흙먼지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화성의 토양은 산화철을 잔뜩 머금고 있기에 붉고 황량하게 뻗어 있다. 마찬가지로 산화철 성분이 떠다니는 공기는 붉은빛에게만 우호적이어서 나머지 색은 통과시키지 않는다. 대낮의 하늘은 녹슨 철 빛깔로 물든다. 그러나 해가 질 때면 빛이 투과해야 하는 대기가 늘어난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파장이 짧은 파란 빛만이 간신히 먼지를 뚫고 화성의 지표까지 도달할 수 있다. 붉은 낮과 푸른 노을. 지구와는 정확히 반대되는 모습이다. 파란노을은 솔로 뮤지션으로, 서울에 사는 학생이라는 것 외엔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의 정규 2집 은 이러한 화성에서 살아가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화성인은 앨범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다. 2집 전체는 어지럽고 과격한 저음질의 록 사운드에 파묻힌 화성인의 중얼거림 혹은 절규로 이루어져 있다. 화성인은 왜 화성인인가? 그가 비주류이기 때문이다. 음악을 세세하게 따지기 전에 2집을 규정하는 장르만 잠깐 살펴봐도 이 음악이 비주류, ‘아웃사이더’에 속한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은 슈게이징에 Emo를 절묘하게 섞었다는 평가를 받는다.슈게이징이란 말 그대로 신발만을 뚫어져라 쳐다본다는 뜻이다. 슈게이징이라는 장르를 표방하는 밴드들은 하나같이 관객이 아니라 바닥만을 내려다보며 연주한다. 노이즈가 잔뜩 낀 시끄러운 사운드 속으로 들릴 듯 말 듯 가녀린 보컬의 목소리가 스쳐지나가는 것이 이들의 음악적 특징이다. Emo는 emotional(감정적인)의 앞 글자를 딴 말로, 우울한 감정을 가감 없이 표출하며 은둔적, 비사교적, 자기비하적인 색채를 띠는 장르를 지칭힌다.물론 “친구가 10명 이하인 사람만 슈게이징과 Emo를 좋아할 수 있다” 같은 법칙은 없다. 이런 장르를 좋아한다고, 혹은 이런 장르의 음악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아싸’에 속하는 인물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파란노을은 이런 장르들의 특징인 우울감 표출, 자기비하, 소통의 단절에 충실하고, 스스로가 비주류임을 한 치의 가식도 없이 모조리 드러낸다. 의 화자는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전형적인 ‘아싸 백수 오타쿠 남성’이다. 파란노을의 음악을 아직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내가 그를 너무 가혹한 시선으로 재단한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앨범을 여는 곡인 <아름다운 세상>의 가사만 봐도 그러한 전형이 쉽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자신의 망상에 갇힌 채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 한심한 꼴로 돌아다녀 또다시 두 눈과 두 귀를 막아버려”에서 “언젠가는 잘될거야 언젠가는 빛날 거야”로 이어지는 가사는 현실을 외면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자기혐오를 느끼면서도, 또 다시 “언젠가 잘될”거라는, 근본 없고 비현실적이기에 슬프기까지 한 자기위로를 하는 화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나의 비참한 모습을 아무도 보지않았으면”이라는 가사는 화자가 도피하려는 현실의 비참한 상황을 보여주고, “나의 소중한 인연들 이제는 추억속으로만”은 주변에 더 이상 사람이 남아있지 않은 ‘아싸’의 모습을 드러낸다.앨범 전반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일본 문화에서 따온 모티브는 화자의 ‘오타쿠성’을 증명한다. 샘플링된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대사들은 곡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온다. 2집의 네 번째 곡인 <흰 천장>은 <신세기 에반게리온> 2화의 제목인 <낯선 천장>의 오마주이자, 밈(meme)화되어 라이트노벨을 비꼬는 데 흔히 쓰이는, “눈을 뜨자 낯선/흰 천장이 보였다.”라는 익숙한 도입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2집의 다른 그 어떤 곡을 살펴보더라도 가사는 비슷비슷하다. 화성인은, 파란노을이 스스로에게 과격하게 뱉어내는 말 그대로, “찐따무직백수모쏠아싸병신새끼”(2집 7번째 곡, <청춘반란>)다. 이 “찐따무직백수모쏠아싸병신새끼”는 “늦은 밤에 일어나면”(2집 4번째 곡, <흰 천장>)이라는 가사에서 볼 수 있듯 낮과 밤이 바뀐 삶을 살아간다. 가사를 가만 듣자면 화자의 하루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는 해가 질 무렵 일어나서 밤 동안 무의미하게 웹서핑을 하거나 (왠지 나무위키나 디씨를 돌아다니고 글도 몇 개 올릴 것 같다.) 이런저런 영상물을 보며 시간을 때우고 (왠지 일본 애니메이션을 볼 것 같다.) 질리면 음악을 듣기도 한다. (왠지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들려주면 인상을 찌푸리거나 묘한 표정을 지을 것 같은 마이너한 장르의 –이를테면 일본 애니 ost나 슈게이징- 음악일 것만 같다.) “누구보다 간절했었어 무대에도 서고싶었어 락스타가 되고싶었어”(2집 7번째 곡, <청춘반란>)라고 자기혐오로 가득한 일기장에 또 한 줄을 적고는 가상악기 프로그램을 만지작거리며 멜로디를 몇 개 찍어내고, 환호하는 사람들 앞에서 멋지게 기타를 연주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기도 한다. 그러다 마침내 해가 뜨고 사람들의 하루가 시작할 때쯤 되면, 또 하루를 무용하게 흘려보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침대로 들어갈 것이다.그의 하루가 시작하는 시간은 해가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으며 하늘을 붉게 물들일 무렵이다. 그의 하루가 저물어가는 시간의 하늘은 새파랗다. 빨간 낮과 파란 노을이 있는 행성에서 살아가는 그는, 지구에 존재하지만 그곳으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화성인이다. 앨범의 첫 곡부터 마지막 곡까지를 쭉 들으며 분위기의 진행과 가사, 음악을 뮤지션이 배치한 대로 살펴보는 것은 음악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여겨진다. 그 전통을 따라, 이 글에서도 첫 번째 곡 <아름다운 세상>에서부터 마지막 곡 까지 앨범 전체를 분석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이라고는 “나는 사회부적응자 골방외톨이지만, 그래도 더는 도망치지 않고 나아가겠다”는 뻔하디뻔한 메시지뿐이다. 굳이 이런저런 곡의 가사를 이어붙이며 설명하지 않아도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쭉 듣기만 한다면 누구나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는 결론이기에 굳이 그런 분석을 하지는 않겠다. 대신 내가 2집을 들으며 가장 주목했던 부분인 <아날로그 센티멘탈리즘>과 <흰 천장> 사이의 연결성에 대해 다루겠다.우울함으로 얼룩진 앞선 두 곡을 뒤로하고, 세 번째 트랙인 <아날로그 센티멘탈리즘>은 행복했던 유년기를 노래한다. “그날 만났던 당신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나요”, “그날 다같이 보았던 영화 당신은 지금 기억하나요”라며 추억을 끄집어낸 후, 화자는 “6교시가 끝나고 교문 밖을 나오면 / 바로 보이는 분식집에서 콜팝과 슬러시를 사먹고 ······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고 나면 브라운관 티비가 나를 반겨줬어”로 이어지는 구구절절한 나레이션을 늘어놓는다. 음악 전반에는 마치 청소년 주인공들의 일상과 모험을 담은 일본 애니메이션 도입부에 나올 것 같은, 희망찬 이펙터 사운드가 깔려 있다. 환호성을 지르고 손뼉을 치는 어린아이들의 목소리 역시 샘플링되어 들어가 있다. 그러나 “만약 이 모든게 꿈이라면 다시는 깨고 싶지 않을거야”라는 말과 함께 음악은 끝을 맺고, 마지막 기타 소리가 채 잦아들기 전에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가 서서히 들려온다. 저 멀리서 알람이 울리고, 청자는 잠깐 등장했던 밝은 노래는 꿈이었으며 이젠 비참한 현실로 돌아가야 할 때라는 것을 아프게 깨닫게 된다. 그러다 가까운 곳에서 알람이 울리고, 먹먹한 기타 소리와 함께 다음 곡이 시작된다.<흰 천장>은 <아날로그 센티멘탈리즘보다> 한층 느려진 리듬과 낮아진 음조로 두꺼운 벽을 쌓아올리고, 그 속에 우울함의 극치를 달리는 가사를 파묻는다. 화자는 “늦은 밤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 흰 천장과 그다음엔 혐오스런 나의 몸”이라 읊조리며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현실과 온몸으로 부딪힌다. 그는 “무언갈 미워한 채 무언가를 갈망하고 / 땀도 흘리지 않은 채 어리광을 부리고 / 시간만 원망한 채 아무것도 하지않”는 스스로를 증오한다. 음악의 절정 부분에서는 샘플링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흐느끼는 소리, 악을 쓰고 절규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오늘도 일어나면 눈앞에는 흰 천장어제도 일어나면 눈앞에는 흰 천장내일도 일어나면 눈앞에는 흰 천장언제나 일어나면 눈앞에는 흰 천장언제나 언제나 언제나 앞서 언급했듯이 <흰 천장>이라는 제목은 <신세기 에반게리온> 2화의 제목인 <낯선 천장>의 오마주이다. 굳이 특정한 애니메이션을 끌고 오지 않아도, ‘흰 천장’이란 서브컬쳐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다 못해 하나의 클리셰로 굳어져버린 소재다. 이 클리셰 속에서 주인공은 문득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고, 눈앞에는 흰 천장이 보인다. 낯선 방이다. 그렇게 일상은 부서지고 모험이 시작된다.화자는 이러한 소재를 뒤틀어 자신의 절대 부서지지 않는 일상을 조명하는 데 사용한다. 화자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며 “낯선 천장”을, “만화에서나 보던 그런 청춘”을 꿈꾼다. 그러나 달콤했던 꿈이 알람소리에 의해 산산조각난 후에 보이는 것은 지긋지긋한 흰 천장이다. “어제는 오늘 같고 오늘은 내일 같고 내일은 어제 같”은 무기력한 일상은 너무나 굳건하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또한 파란노을의 음악을 들었을 때, 나는 이 글의 독자가 화성인에게 애정을 느끼는지 묻고 싶다. 아마 아닐 것이다. 의 가사는 하나같이 찌질하다. 적나라하고 비생산적인 자기혐오로 점철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인디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으레 추구하기 마련인 시적인 가사와 멋들어진 비유 하나 없이 지나치게 직설적이다. 너무 날 것 그대로라 마치 누군가의 일기장을 그대로 옮겨둔 것 같다. “그저 새벽 디시에 올라오는 우울증 일기장 중 하나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파란노을 티스토리, <가사, 주제 그리고 기타>)라는 말이 무리도 아니다.처음 이 앨범을 접했을 때 나는 전율했다. 이펙터를 잔뜩 사용해 선율과 소음의 경계선에 놓인 일렉 기타 사운드 밑으로 깔리는 기타 리프와 피아노의 단순한 코드 진행이 주는 어딘가 슬프면서도 강렬한 감정에 이끌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레는 마음으로 잘 들리지 않던 가사를 확인해본 나는 곧 크게 실망했다. 가사는 읽는 내게 심적 고통과 참을 수 없는 오글거림을 줄 정도로 볼품없었다. 열등감에 찌들어 골방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아싸 오타쿠 남성’의 전형이 머릿속에 그려지며 뮤지션과의 심리적 거리감이 불쑥 멀어지기도 했다. 은 내가 친구들에게 이 앨범을 소개하며 했던 말처럼, “가사가 잘 안 들려서 다행인” 앨범이었다.두 번째 곡인 <변명>의 마지막 줄 “세상은 아름다워 나같은 놈도 먹고사니까”까지 본 나는 더 이상 가사를 알고 싶지 않아서 읽기를 관뒀다. 가사를 모르는 채로 듣자 슈게이징 음악의 특성상 파란노을의 목소리는 휘몰아치는 기타와 드럼, 이펙터 소리에 묻힌 웅얼거림으로 들릴 뿐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다. 가사를 애써 신경쓰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자꾸 듣다 보니 청자에게 이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노래를 만드는 사람은 대체 어떤 생각을 하면서 코드를 짜고 음표를 찍었을까 스멀스멀 궁금증이 자라난다. 거부감을 참고 가사를 꾸역꾸역 듣다 보니, 또 조금씩 화자에 대한 싫은 감정이 사그라든다. 화성의 산화철 가득한 공기 속에서 숨을 들이쉬면 녹슨 금속 냄새가 날 테고 그건 피 냄새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가 아무리 찌질한 인물이라고 한들, 화성인의 한 숨 한 숨이 무척 고통스럽고 처절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는 그렇게 비참한 매일을 보내면서도 노을의 푸른빛을 포착하고 그 색을 우울(blue), 혹은 일말의 희망을 내비치는 파란색으로 변주해간다. 선뜻 호감이 가는 인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를 응원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음악을 듣고 누군가는 “저렇게는 살지 말아야지” 하며 자신의 삶을 향해 나아갈 수도, 누군가는 큰 공감과 위로를 얻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겐, 흐느끼는 사람의 어깨처럼 반복적으로 들썩이며 이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기타 소리가 가슴 속 깊은 곳을 치고 지나가며 어떤 울림을 주었다. 그러니 이 글의 독자에게도 파란노을의 을 한 번쯤 추천해 보고 싶다. 화성의 흙먼지 속에서 산란하는 빛은 푸르고, 파란색은 우울을 상징하는 한편 희망의 색이기도 하니까. 꿈의 다음 장면을 보기 위해 공기에서 피 맛이 나더라도 조금만 더 나아가 보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