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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박흥용VS시인 함성호 대담] 물길에 띄운 이정표처럼

  • 작성일 2014-08-01

 

[기획특집 인터뷰]

 

 


물길에 띄운 이정표처럼

― 박흥용 만화가, 함성호 시인 대담

 

 

 

 

    오는 8월 3일까지 서울 대학로에 있는 아르코미술관 제1·2전시장에서 ‘박흥용 만화 : 펜 아래 운율, 길 위의 서사’ 전시가 열린다. 박흥용(55) 만화가의 데뷔작 <돌개바람>(1981)부터 최근작 <영년>(2013, 출간 중)까지 여러 작품을 한데 접할 수 있다. 그의 작가주의 작업 과정을 주요하게 살필 수 있도록, 연대기적 배치를 지양하고 주제와 소재에 따른 전시를 선보였다. ‘주변을 밝히는 길’, '깨달음과 성장의 여정', ‘정지된 공간의 여백', '공동체의 길' 등 4개의 섹션으로 구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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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용 만화가 프로필]

 
    1961년 충북 영동 출생
    1981년 <돌개바람>으로 데뷔
    1982년 <어린 왕자의 노래>로 ‘이서방 문고 현상공모’ 특별상
    1986년 <백지>로 ‘만화광장 신인만화 공모’ 대상
    1996년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으로 ‘대한민국 만화 문화 대상 저작상’ 수상
    1996년 《투엔티세븐》에 <경복궁 학교> 연재
    1997년 《영챔프》에 <내 파란 세이버> 연재
    1999년 <내 파란 세이버>로 ‘제1회 오늘의 우리 만화상’ 수상
    2001년 《영챔프》에 <그의 나라> 연재
    2003년 <호두나무 왼쪽길로> 《한국일보》에 연재
    2004년 <호두나무 왼쪽길로> ‘SICAF 코믹어워드 장편 연재 만화상’, ‘만화스토리상’ 수상
    2005년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한국의 책 100’ 선정
    2013년 <영년>으로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 대통령상’ 수상
    2014년 <영년> 출간 중

 

    《문장웹진》에서는 만화비평서 『만화당 인생』을 펴내는 등 만화에 각별한 식견을 지닌 함성호(51) 시인이 박흥용 만화가의 그림 변화 과정과 작가관 등을 묻는 자리를 마련했다. 만화의 창작 배경을 비롯해 사적 취향, 인생관 등 갖가지 소재들이 질의, 응답으로 오갔다.
    아래는 지난 6월 24일 화요일 오후 3시 30분부터 6시까지 아르코미술관 2층 회의실에서 진행된 대담 전문이다.

 

 

    만화애호가 함성호 시인, 아르코 첫 개인전 연 박흥용 만화가와의 대담

 

    ▶ 함성호 : 예전에 『만화당 인생』이라는 책을 냈어요. 출판사에서 기대하고 엄청 팔릴 거라고 해서 몇 천 부를 찍었는데, 하나도 안 팔렸어요. 책 읽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만화에 관심 없고,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책 읽는 데 관심이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실패한 기획입니다. (웃음) 박흥용 선생님은 어디 박 씨인지요?

 

    ▶ 박흥용 : 밀양 박 가입니다. ‘쓸 용’ 자 쓰고, 가운데 ‘일어날 흥’ 자 쓰고 있습니다.

 

    ▶ 함성호 : 동료들 중에 주로 친하게 지내시는 분들은 누구인지요?

 

    ▶ 박흥용 : 동료들은 얼굴만 익히고 있고, 깊은 대화를 못 했습니다. 후배들은 화실에 같이 머무르고 있어서 카운슬링을 많이 하는 편이고, 제가 가르쳐서 데뷔하는 후배들도 있습니다.

 

    ▶ 함성호 : 만화가들의 데뷔 연령은 주로 어떻게 됩니까?

 

    ▶ 박흥용 : 결혼도 하고 서른다섯이 되어 그때까지 계속 만화를 그리는 후배들도 있습니다. 만화가는 아마추어 기간만 10~12년이 걸립니다. 사람을 마네킹처럼 세워 놓는 게 실력이 아닙니다. 그리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여야 하는데, 그 정도 손으로 캐릭터를 능숙하게 그리려면 10년은 걸려요. 요즘 작가들 중에는 그런 훈련 시간을 갖지 않는다고 하는데, 허영만 선생님이 이런 말을 했다고 그래요.
    어느 웹툰 작가의 그림을 보고 “내가 그림을 잘 그리려고 옛날에 많은 시간을 허비했던 것에 대해서 굉장히 화가 났다. 내용이야 고사하고 그림을 보고 정말 상당히 혼란스럽다.”
    사람들이 유행어처럼 써먹다 보니 특정 작가를 거론하게 되는데요. 이말년 씨를 두고 한 말입니다. 허영만 선생님 얘기에 이말년 씨가 댓글을 달았대요.
    “저도 제 만화 보니까 혼란스럽네요.”라고.

 

    ▶ 함성호 : 웹툰 같은 경우에도 초기에 일군의 작가들이 모여서 그룹을 만들었어요. 그 작가들은 대단했어요. 색채에 엄청 집중하고 유기적인 사건들이 이야기를 파괴하는 작품을 하다가 다 망했죠. 그 후에 웹툰의 특성을 스크롤로 연출하는, 아주 새로운 방식의 <가족 사진>이라는 웹툰을 봤어요. 네이버에 연재된 정병식 작가의 웹툰이에요. 스크롤 내리게 되면 마치 카메라가 훑듯이 장면을 바꿔버려요. 스토리도 좋고요.

 

    ▶ 박흥용 :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 함성호 : 그림도 모딜리아니나 뒤 뷔페처럼 얼굴이나 몸을 길쭉길쭉하게 그리고, 선도 굵직하고 경직된 느낌인데 그 연출하고 이미지가 딱 들어맞더라고요.

 

    ▶ 박흥용 : 웹툰 출발을 보면요. 디지털카메라가 우리나라에 소개되고 DSLR로 넘어오기 직전에 인터넷에 사진을 올려서 근황을 올리는 게 유행하기 시작했어요. 근데 그걸 넘어서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 하면, 사람들이 스토리를 짜서 연기를 해서 웃기는 얘기를 다뤘어요. 디카로 찍고 말풍선 넣어서요. 굉장히 빠르고 쉽게 올릴 수 있었죠.
    그러다 그런 작업에도 싫증이 나서 디카가 했던 걸 낙서처럼 그려 놓은 게 웹툰의 시초예요. 디카로 스토리를 진행하던 사람들은 상업적인 영역으로 계산하면 출연자의 보상이 필요하잖아요. 만화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요. 경제적인 압박이 만들어낸 게 웹툰이에요.
    만화가 경제적인 그림인데요. 만화 하면 ‘펜선’ 얘기가 많이 나와요. 웹툰이 등장하면서 도트피치(dot pitch), 해상도가 펜선을 표현할 수 없는 상태가 돼서, 그림을 그리는 선 두께를 재해석하려고 웹툰에 활용을 해요.
    무슨 얘기인가 하면, 가장 경제적인 문화 활동을 가장 적은 노동력으로 진행하려고 사진을 찍어서 올려놨더니, 사진에 출연한 사람들의 보상이 필요했고 만화는 그런 보상을 무시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그런 것처럼 어떻게 하면 돈을 적게 들이고 경제적 작업을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온 게 인쇄 만화인데요. 인쇄 만화 그리면서 면과 컬러로 표현하면 많은 시간과 돈이 드니까, 선으로 그림을 표현해 보자 한 게 백 년 동안 유지해 온 펜선이에요. 가장 적은 돈으로 산업적 효과를 내요. 눈으로 보기에 가장 불편하지 않고, 눈에 들어오기 좋은 선의 두께가 나온 겁니다. 전 세계 만화가 이 선을 쓰고 있어요. 합의도 안 한 건데 자체 이해 문화가 생겼죠. 시인성이 좋아서 그림이 표현하는 상황을 바로 확인할 수 있어요. 선이 너무 두꺼우면 그림이 둔탁하고 세밀한 그림을 못 보고, 너무 가늘면 가독성이 없어요. 적당히 합의 본 게 그 선 두께예요. 그런데 웹툰 모니터가 만들어지니 그 환경에 맞춰 그리려고 그동안 유지해 온 선의 두께를 깨버린 거예요. 과거의 선은 웹툰에서는 너무 가늘어요.
    최근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요. 해상도가 너무 좋아서 작은 것까지 표현할 수 있는 디지털 기기가 나오기 시작한 거예요. 그래서 처음 인쇄 매체 펜선 두께가 다시 구현되고 있어요. 아이패드에서 옛날 펜선을 원해요.

 

    ▶ 함성호 : 미디어의 발달로 선이 자리를 찾았네요. 그럼 다시 수작업을 해야 하는 건가요?

 

    ▶ 박흥용 : 디지털 펜으로 과거의 작업을 하게 되더라고요. 핸드폰으로 만화를 보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작은 화면으로도 시인성 좋은 화면을 찾으려니까, 그에 맞는 선이 필요하고 그렇게 작업을 하니까 스토리가 소화되고 눈에 확 들어오더라고요.

 

    ▶ 함성호 : 요즘 웹툰 즐기는 사람은 펜선 안 보지 않나요?

 

    ▶ 박흥용 : 독자들은 눈에 잘 들어오기만 하면 되거든요. 게임도 처음에는 그래픽이 8비트였다가 점점 그래픽 카드가 좋아지니까 실제와 같은 장면을 구현해 내는 그래픽을 원하게 되잖아요. 만화도 화면이 좋아지니까, 인쇄 만화 때 즐겼던 것을 다시 찾는 거 같아요. <영년> 작업은 새로 생긴 디지털 기기가 소화하도록 만들어서 그 기기에 띄우면 컬러가 화려해집니다. 컴퓨터 디지털 펜으로도 표현할 수 있는데, 저는 아날로그 세대라 펜선으로 그립니다. 모든 후배들이 이구동성으로 얘기하는 게 디지털 펜선이 날아가는 것 같다고 해요. 아날로그 펜 사용에 익숙해진 분들은 그럽니다.

 

    ▶ 함성호 : 사실 스캔을 받잖아요? 스캔을 받으면 면에 색을 줄 때 펜선을 먹게 되잖아요?

 

    ▶ 박흥용 : 그렇죠.

 

    ▶ 함성호 : 아무래도 색에 면의 색이 섞여 들어가지 않나요?

 

    ▶ 박흥용 :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레이어를 이용해 펜선을 따로 작업합니다. 펜선 필름 따로, 컬러 필름 따로 해요. 펜선도 안 다치고 컬러도 안 다치고, 그러나 출력을 하면 펜선이 몇 개의 컬러가 모여 까만 선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떡이 돼요. 펜선이 뭉개집니다.

 

    ▶ 함성호 : 그게 인쇄해서 시장에 나와야 되잖아요?

 

    ▶ 박흥용 : 그것도 감안해서 펜선을 중요한 곳에만 쓰고 자제합니다. 인쇄할 때 제대로 나오라고요.

 

    ▶ 함성호 : 박흥용 만화를 즐기는 사람은 펜의 속도감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요.

 

    ▶ 박흥용 : 그걸 놓치지 말라고, 인쇄 말고 모니터로 볼 때 펜선 다치지 않게 합니다. 600dpi.로 작업하는데 파일이 되게 무거워요. 웬만한 컴퓨터에선 돌아가지 않아요. 화면이 너무 무거워서 작은 컴퓨터에선 움직이지 않아요.

 

 

    박흥용 만화가의 개성적 연출 언어

    ▶ 함성호 : 이번 전시에서 선생님의 초기작부터 최근 <영년>까지 그림체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 박흥용 : 저희가 하는 얘기가 아마추어 시절을 게으르게 보내지만 않아도 그림쟁이로서 그림 보는 눈이 열린다고 합니다. 아마추어 때는 자기가 그리고 싶어도 그 그림이 데생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검증할 방법이 자신에게 없어요. 그림 훈련을 해서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틀을 찾아내야 해요. 연습하면 눈이 열리고, 잣대가 만들어져요. 표준이 만들어집니다. 그림 훈련을 10~12년 해서 아마추어 시절이 지나면 그런 것들을 보게 되는데요. 눈으로는 바른 그림이 보이는데 내 손으로는 그 눈(데생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검증할 수 있는 훈련된 눈)을 만족시키는 그림을 그릴 수가 없습니다. 그 격차를 따라가지 못해서 그림 갈증을 느껴요. 그러다 보니 좋은 그림을 보면 눈에 묻어요, 그 묻어온 것이 집에서 내 원고를 하면 손에 묻어져 나와요.
    전시에 사용된 초기 그림을 보면 기성 작가 냄새가 살짝 나더라고요, 처음에 전시를 하려고 원고를 보는데 창피했어요. 다른 작품을 직접 보고 카피하지 않았는데 그림의 갈증이 스펀지 역할을 해서 완성도 높은 그림을 보면 손에 묻어 나오는 게 있는 것 같습니다. 디즈니 냄새가 나는 그림도 있더군요. 초기 원고를 지나서는 그런 게 안 보이고 과거와 다른 그림들이 되더군요.

 

    ▶ 함성호 : 개인적으로 선생님 작업을 우연히 처음 접한 게 만화 잡지였는데, 그때가 93년인가 95년이었어요. 작품 제목은 정확히 생각이 안 나는데요. 병원이 나오고 공갈 협박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 박흥용 : <나무 위에 사는 나무> 《주간만화》 34페이지로 발표했던 작품입니다.

 

    ▶ 함성호 : 네, 맞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가 보자기를 망토처럼 두르고 옥상에서 뛰어 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린 아이가 자살하는 장면은 이전의 만화에서도 그렇고 어디서도 볼 수 없었거든요. 그 표정도 복잡했어요. 결연하고, 터무니없고, 장난스러운 데까지. 그림체도 좋았습니다. 아직 <경복궁 학교> 같은 박흥용 특유의 리듬은 아니지만 펜선이 종이에 밀착해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굉장히 안정적이어서 흥미로웠습니다.

 

    ▶ 박흥용 : <경복궁 학교>는 그림을 그려도 상당히 장난쳐도 될 만큼 능숙할 때입니다. <나무 위에 사는 나무>는 《주간만화》에 실렸던 건데요. 잡지 기호, 잡지 언어라는 게 있어요. 일종의 그림 언어죠. 독자들은 잡지 대하면 잡지 안에서 얻고 싶은 텍스트, 그림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 작품은 그런 기호 이미지에 충실했던 거고요.

 

    ▶ 함성호 : 만화가가 잡지의 성격을 생각하면서 그려야 하나요?

 

    ▶ 박흥용 : 마당이 펼쳐지면 춤꾼이 흙인가 마룻바닥인가 신발을 신어야 하나 맨발이어야 하나 마당을 익히듯이, 만화가도 잡지의 성격을 파악해야 합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잡지에 맞는 그림 언어를 찾습니다.

 

    ▶ 함성호 : 묘한 말씀이네요. 그림 언어라는 게 문법이 바뀐다는 거 아닙니까?

 

    ▶ 박흥용 : 어른들이 보는 만화는 텍스트에 힘을 실어 줘야 돼요. 텍스트가 많은 장면 때문에 그림 들어가는 부분이 굉장히 줄어들고 딱딱해질 수 있습니다. 그걸 이겨내기 위해 가로 컷을 쓰거나 롱테이크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텍스트를 분산시켜 가면서 화면을 잡기도 해요.
    주간지에서는 안 돼요. 주간지는 작게 자릅니다. 일간지는 더 안 돼요. 일간지는 조금이라도 정보가 없으면 독자가 덮어버립니다. 어느 날 신문을 사서 보면 앞의 스토리 무시하고 토막 난 내용의 만화를 보기 때문에, 단 한 회라도 이야기가 되도록 정보를 줘야 해요. 일간지는 그림이 단순하고 쉽게 들어와야 합니다.

 

    ▶ 함성호 : 쉽게 얘기하면 이 땅에서는 이런 건축을 저 땅에서는 저런 건축을 하는 것처럼 사이트가 있다는 거네요.

 

    ▶ 박흥용 :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 함성호 : 건축에서 제일 나쁜 건축이 이 땅에도 좋고 저 땅에도 좋은 겁니다. 아무래도 좋은 거죠. 그런 건축은 나쁜 건축입니다. 그래서 건축은 유일무이해야 합니다. 땅의 조건, 건축주의 성향, 기후, 이런 것들이 다 다르니까요.

 

    ▶ 박흥용 : 건축 전문가가 얘기하시니 충분히 이해됩니다.

 

    ▶ 함성호 : 만화의 그림 언어, 저는 처음 들었어요.

 

    ▶ 박흥용 : 고우영 선생님은 일간지에 잘 적응하신 분인데 단행본을 낼 때는 또 다른 연출을 펼치십니다. 일간지에 나온 게 묶여서 책이 되지만, 책에선 다릅니다.

 

    ▶ 함성호 : 묶을 땐 손을 보는가요?

 

    ▶ 박흥용 : 독자들은 감안하고 보니까요.

 

    ▶ 함성호 : 그냥 그리면 되는 줄 알았더니 아니네요.

 

    ▶ 박흥용 : 일종의 매체 언어, 마당 언어죠.

 

    ▶ 함성호 : <그의 나라>나 <영년>에서는 어땠나요?

 

    ▶ 박흥용 : <그의 나라>는 수신자가 청소년입니다. 독자가 나이 어린 친구라는 걸 감안해서 텍스트 위주보다는 이미지 위주로 작업했습니다. 시원한 그림은 <그의 나라>에 많고요. <영년>은 성인 독자를 고려해 좀 더 무거운 화면으로 그린 허구적 이야기입니다. <그의 나라>도 허구적 이야기이긴 하지만, 허구적 리얼리티를 조심스럽게 펼친 게 <영년>입니다. 돌을 던지면 어깨에 힘이 들어갑니다. 어른들이 이해하는 그림들이죠.

 

    ▶ 함성호 : <경복궁 학교>를 보면서 그 뒤틀린 신체를 보며 이 작가가 혹시 무용을 하던 분인가 생각할 정도로 표현이 능수능란해서 놀랐습니다. 사실 한국 만화에서 잘 잡지 않는 카메라 앵글을 사용하시잖아요. 부감을 잡을 때도 평범하게 잡지 않고 목과 팔, 등과 엉덩이의 각도를 각각 다르게 잡잖아요? 그런데 거기에서 굉장한 속도감과 속 시원한 쾌감이 느껴지더라고요. 또 보통 그려야 될 게 있고 그리지 않아야 될 게 있을 텐데, 그 긴장이 좋았습니다. 예를 들어 견자랑 스승이 툇마루에 앉아 있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서 한옥의 구조, 기둥이나 지붕까지 굉장히 세세하게 사실적으로 처리하고 나머지는 텅 비워 두는 것이죠. 그런 파격적인 화면 구성에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생략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의 긴장, 거기에 박흥용 서사의 구조가 엮여 있다고 봅니다.

 

    ▶ 박흥용 : 과거 영화감독들이 그런 얘기를 해요. 피사체가 움직이지 않으면 카메라가 움직인다고요. 관객이 느끼는 진부함을 줄이겠다는 거죠. 그걸 무시한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다다미 앵글 같은 것도 있지만요. 독자라면 이런 화면들이 나와 줘야 전체 화면을 이해하겠다 싶을 때 백(back) 하거나 파고들어가거나 떨어져서, 연출이 만들어내야 할 효과를 찾아냅니다.

 

    ▶ 함성호 : 이해했습니다. 그런 것도 그렇고, 한 컷에서 보통 그려야 될 게 있고 안 그려야 될 게 있을 텐데요. 사실은 제 글에도 썼지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 견자랑 스승이 툇마루에 앉아 있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서 한옥의 구조라든가 기둥을 되게 세세하게 사실적으로 처리하고 나머지는 비워 두잖아요? 그런 연출에 감탄했습니다. 생략해야 될 것과 생략하지 않아야 할 것을 잘 가려 쓰시는구나.

 

    ▶ 박흥용 : 이를테면 날릴 거 날리고 살릴 거 살려서 더 집중하게 하는 거죠. 캐릭터 집중하게 하는 방법으로.

 

    ▶ 함성호 : 즐기시죠?

 

    ▶ 박흥용 : 많이 즐깁니다. 누가 ‘공간의 여백’이라고도 했는데, 그걸로 얻은 효과 때문에 독자들도 같이 즐기자고 사용합니다.

 

    ▶ 함성호 : 묘한 말씀이네요. 그림 언어라는 게 문법이 바뀐다는 거 아닙니까?

 

    ▶ 박흥용 : 그래서 그 얼개를 미리 짜나요?

 

    ▶ 함성호 : 만화 작업이 콘티를 짜놓지 않으면 그런 그림을 계산할 수 없어요. 산만하겠다 싶으면 장면을 많이 가라앉히고, 필요하면 장면을 터트리려고 하죠. 음악의 멜로디처럼 조용히 흐르다가 독자가 따라오다 지칠 만할 때 이미지를 사용하면서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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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흥용 작가의 허구적 리얼리티

 

    ▶ 함성호 : 정교한 연출을 하시니까 누가 그러던데요. ‘박흥용은 왜 여자 얘기를 안 하냐?’고요. 제가 우리나라 만화에서 최고의 에로티시즘 만화가가 박흥용 작가라고 해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한 장면에 오위 장군 딸이 칼을 대고 있고 견자가 칼날을 잡고 있는데, 피가 칼날을 타고 여자의 팔뚝에 쭉 흐르잖아요? 그게 제가 본 한국 만화에서 최고의 에로티시즘입니다.

 

    ▶ 박흥용 : 효과를 좀 보았나 봅니다. 그 장면 꼽는 독자들이 많았어요.

 

    ▶ 함성호 : 이건 하명종과 이혜영이 주연한 영화 <땡볕> 이후에 최고입니다. 저는 <땡볕>에서 전 세계 에로티시즘 통틀어 꼽는 장면이 있는데, 두 배우가 소달구지를 타고 가다가 뒤에 쌓은 볏짚 더미 위에서 벌이는 정사 장면입니다. 그때 카메라가 위로 쑤욱 빠지거든요. 그러고는 소달구지가 가야 할 구절양장의 길들이 조감됩니다. 정사 장면은 보이지 않지만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죠.

 

    ▶ 박흥용 : 그 영화를 찾아보겠습니다.

 

    ▶ 함성호 :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도 피가 칼날을 타는 게 섬뜩하잖아요?

 

    ▶ 박흥용 : 이런 얘기를 해도 되나요? 너무 깊은 얘기가 되면 안 되는데, 땀이든 피든 또는 무엇이든 남자의 액체가 여자의 몸에 흘러내린다는 것은, 성인 만화 아니면 할 수 없죠.

 

    ▶ 함성호 : 성인 만화였어요?

 

    ▶ 박흥용 : 《트웬티세븐》이라는 잡지에 실린 성인 만화였어요.

 

    ▶ 함성호 : 아까도 허구적 리얼리티에 대해 말씀하셨는데요. 중요한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만화의 리얼리즘 계보로 오세영, 이희재 등이 있는데, 문학에서도 리얼리즘 문학이라는 것이 분단 모순이나 민족 모순과 삶이 어떻게 연결이 되느냐를 다뤘습니다. 리얼리즘이 현실이란 말하고도 등치되는 식으로 단순 도식으로 연결되다 보니까, 리얼리즘 이외의 미학적 지평들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많은데요. 그래서 허구적 리얼리티에 동의를 하겠더군요.

 

    ▶ 박흥용 : 독자를 설득하는 언어예요. 화면에서 허구 장면이 등장하면 그 안에서 리얼리티로 독자를 만나지 않으면, 독자가 계속 반론합니다. 왜 이런 게 있냐고요. 그 안에서 벌어지는 리얼리티를 독자에게 펼쳐 놓으면 이해하고 따라와 줘요. 작가를 처음 만나고 대할 때 독자들은 온갖 지식으로 무장을 하고 무기를 지니고, 그 책을 펴거든요. 전쟁을 해요. 저도 아마추어 시절이 있었습니다.
    작가가 나름대로 룰을 가지고 능수능란한 허구적 리얼리티를 구사하면, 이게 실제로는 아닌데 있을 수도 없는데 혹은 있다 해도 있을 수 있을까 하면서도 독자는 무장해제하고 작가가 진행하는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비록 허구지만 그 안에서의 사실로 설득을 해야 해요. 설득이 중요해요.
    칼을 다루는, 무도하는 사람들을 실제로 본 적이 있어요. 우리가 흔히 아는 중국 영화 장면이 아니더라고요. 바로 그 자리에서 푹 하나가 쓰러져요. 공중에 칼이 날아다니고 그런 게 아니에요. 조직 폭력배가 조용히 마주 보고 있다가 상대의 배를 사정없이 찔러대는 걸 화면으로 본 적이 있는데요. 상대의 몸을 향해 칼을 가할 때 멋있지가 않아요. 상당히 감정이 없는 건조한 장면이더군요.
    리얼한 장면을 많이 훑은 다음 생각한 것은, 칼을 쓰면 그 다음 바로 쓰러지는 건데 칼싸움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거였어요. 갈대로 분위기 잡고 바람 날리고 싸움을 끝냅니다. 리얼리티 생각하면서 그런 신들을 계산하는 겁니다.
    남녀가 아무도 없는 빈방에서 만나 몸을 섞어야 되는 장면에서는, 성인 독자라면 너무도 잘 아는 건데 카메라가 따라다니는 건 불성실해 보여서 기왓장 무너지는 걸로 장면을 대치해서 그렸습니다. 기왓장 하나 빠지면 다 무너진다는 것을 고서에서 찾은 거예요. 주인공 마음가짐이 그렇다는 걸로 극중 리얼리티로 표현을 했죠.

 

    ▶ 함성호 :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명장면이죠.

 

    ▶ 박흥용 : 그 배경 힘썼습니다.

 

    ▶ 함성호 : 허구적 리얼리티라는 측면에서 조금 더 얘기를 하자면, 사실 제 생각인지는 모르겠는데, 박흥용 만화가는 무엇을 그리든, 임진왜란을 그리든, 무인도를 그리든, 시대라는 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시대를 다루는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단순하게 얘기하면, 시대를 잡아 놓고 그 시대에서 얘기를 공급받는 작가가 있을 텐데, 선생님의 경우는 이야기를 갖춰 놓고 나서 시대는 하나의 배경이 돼버립니다.

 

    ▶ 박흥용 : 너무 잘 파악하셨습니다. 그쪽으로 많이 연구하지 않으셨습니까?

 

    ▶ 함성호 : 보니까 그렇더라고요. 그렇다면 작가가 하고자 하는 얘기가 무엇이냐에 따라 여러 가지 얘기가 있을 수 있겠지요. 어떤 사람은 ‘구도적이다.’라고 하는데요. 여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박흥용 : 저도 어려운 얘기인데요. 함성호 선생님이 얘기하시듯 저는 시대 그 자체가 필요하지 않아요. 아인슈타인이 종말 얘기를 하면서 ‘제3차 세계대전에는 어떤 무기로 싸울지 모른다. 하지만 제4차 세계대전에는 아마도 몽둥이와 돌을 들고 싸울 것이다.’라고 했는데요. 바로 그 이야기가 그의 나라의 모티브가 됐습니다. 같은 메시지인데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그려도 이야기의 본질이 상하지 않은 <영년>과 비교해 보면 시대가 주는 메시지가 저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 것처럼 시대의 메시지를 활용하지 않는 편이고 다른 메시지를 갖고 시대적 배경을 필요로 하는 거죠. 무대를 활용할 뿐입니다.

 

    ▶ 함성호 : 거기에서 이야기를 공급받지 않은 거죠?

 

    ▶ 박흥용 : 너무 잘 짚으셔서 할 수 없이 취조 받은 거 같아 얘기하는데요, 사극이지만 현대극 다룬 거 같다고 사람들이 얘기합니다.

 

    ▶ 함성호 : 박흥룡이 그리고 있는 역동적인 동작들 얘기를 해볼까요? 등장인물들의 그 뒤틀린 신체는 어쩌면 작가가 얘기하려는 바와도 어떨 땐 동떨어져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마도 작가 스스로도 그걸 의식하고 있다고 보는데요. 왜냐하면 그럴 땐 신체가 만화의 칸을 뚫고 나오거든요. 오히려 그 뒤틀린 신체를 더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 박흥용 : 몸을 전면에 등장시키면 왜 그렇게 등장시켜야 하는가 계산을 합니다. 여체가 등장했다면 뭔가 여체가 갖고 있는 어떤 이미지를 다루려고 해서 나왔고, 계산된 화면들입니다. 조금 전 말씀해 주신 ‘구도적’이란 얘기는 실은 박인하 선생님 평론에서 저도 봤습니다. 평론을 쭉 찾아보는 성격은 아니에요. 누가 얘기해 주면 저도 찾아보고 타당하면 고개를 끄덕거리곤 하는데요. 구도적이라는 건 아마도 이런 시기가 있었기 때문일 거예요. 그림도 아마추어 시절이 있고 눈을 따라가지 못한 시기가 있습니다. 스토리도 메시지도 그런 경우를 거쳤어요. 메시지를 찾아서 열심히 공부해 보면 그런 메시지들을 제공한 다른 장르 전문가들이 너무 많았어요. 왠지 새로 만드는 건 우스꽝스러웠어요. 메시지 재활용이지 새로운 메시지는 있을 수 없다는 거죠. 혹시 있다면 서로 뭉치거나 교합, 분해한 것이에요.
    창작 작업에서 메시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긴 다 했고, 그럼 어떻게 전하는가에서 ‘어떻게’에 관심을 갖게 돼요. 제 얘기를 제가 하게 되는데요. 어떻게 전할까 조금 관심을 갖게 되니깐 정작 고민할 것들이 있더라고요.
    만화 그릴 때 초기에는 어리니까 에너지가 많아서 이것저것 다 해봅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소재가 고갈되는 게 아니라 에너지가 고갈됩니다. 과거에 했던 소재들을 다루면 독자들도 소재 매너리즘에 빠졌느냐 합니다. 해서 새 소재를 찾지만 에너지는 점점 소모됩니다. 새 소재를 찾으면서 에너지 소모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지금 내가 다뤄야 할 이야기에서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에너지를 써도 되나 고민하게 돼요. 새 소재의 작업을 하다가 어쩌면 이게 무덤이 될 수도 있는데, 이 한 작업으로 끝날 수 있는데 이 작업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작가들은 고민하게 됩니다.
    저는 다행히 메시지가 그만한 가치가 있지 않아도 된다고 정의를 했어요. 그 배경이 실은 제 종교하고도 관련이 있어요. 그런 것들이 묻어나니 구도자적이란 얘기가 뭉뚱그려서 나온 거 같습니다.

 

    ▶ 함성호 : 그러면 ‘여기에 내 에너지를 쏟아 부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란 질문에 대한 결론을 내리신 거죠? 없다고요?

 

    ▶ 박흥용 : ‘없다’는 아니고요. 그러니까 모든 작가들은 확신이 없다고 얘기를 합니다. 소재는 찾았는데 정말로 내 무덤이 돼도 되나 계속 생각하는 것이죠. 우유부단해져서 망설이는 작가가 차기작을 못 만들어내는 게 그 때문이고요. 저는 그런 고생 안 하는 게, 메시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교통정리를 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함성호 : 방금 말씀하셨지만 선생님의 초기작들은 가난하고 못 가진 다수와, 사회에서 소외된 소수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이것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그런 대상들에 대한 ‘애정’이라고 하는데 저는 ‘분노’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가는 어떤 분노에 차 있구나. 그런 분노들이 있고, 그 분노의 대상인 사회를 분석해 내는 눈이 있는데, 그 눈이 바라보는 것이 사회를 통과해서 사회의 구성원인 인간의 내면이죠. 그래서 박흥용의 만화는 구도적이다, 라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많은 변화를 거쳤지만 처음부터 일관되게 선생님 만화에서 다뤄지고 있는 스토리텔링은 어떻게 보면 독일 교양소설하고도 많이 닿아 있다고 생각해요. 한 개인의 자기 성장 같은.

 

    ▶ 박흥용 : 이해가 갑니다.

 

    ▶ 함성호 :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이 대표적이고 한국 소설에도 많죠. 그런 성장소설에 살이 붙으면 독일 교양소설 같은 것들로 나가는데, 거기에 더 가깝지 않은가 생각이 들어서요. 혹시 선생님은 소설이라든가 다른 문학 작품을 보셨습니까?

 

    ▶ 박흥용 : 다독했고 쭉 읽어 봤는데요. 전 어렸을 때 특히 사상서들을 보기 시작했어요. 계기가 마련돼서요. 형수님이 시집오실 때 ‘도련님, 혼숫감으로 뭘 가져갈까요?’ 해서 필요 없다고 했어요. 대신 형수님이 가진 사상서를 달라고 했죠. 헌책 60권짜리인가 30권짜리였는데 제가 달라고 하니 주시더라고요. 거기에 푹 빠져서 본 적이 있습니다. 열아홉, 스무 살 때였는데 우연히 형수님 집에 갔다가 너무 재미있어서 그걸 본 겁니다. 불트만이라는 자유주의 신학자가 있는데요. 기독교를 엎어 놨죠. 정통 보수 신학자들을 다 쑥밭으로 만들어 놨어요. 불트만의 글을 보다가 다른 사상가들이나 슈바이처가 쓴 글을 봤어요. 신학자들의 싸움을 본 거예요. 세계적인 석학들이 쓴 것을 어린 나이에 봤더니 너무 재밌더라고요. 슈바이처는 신학자로 남은 인생을 아프리카 의사로 가서 모든 걸 희생했어요. 그는 예수도 살짝 부정하면서 불트만을 난도질했는데요. 지금 웹툰에서 키보드 워리어가 싸우는 것보다 더 재미있었어요. 사상서를 읽으며 세상을 보는 눈을 익히다 보니, 사상서를 보며 나쁜 버릇을 배웠어요. 제가 감당하기 힘든 싸움은 제 뒤에 있는 석학들의 베이스를 활용하기 시작한 겁니다. 쓰다 보니깐 이 수법이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 수법이에요. 자기가 불리하면 배경을 이용하는 거예요.
    과거에 왕들이 백성들이 자기를 공격하면 ‘나는 신의 아들이다’라는 권위를 이용하듯 선지자들도 하느님 말이라 전하면서 하느님의 권위를 이용해요. 선지자들이 권위를 위해 배경을 이용하는 수법을 저도 이용합니다. 학자들의 시각을 이용하는 것이죠. 어쨌든 그분들 때문에 성경을 보게 됐어요. 학자들이 성경 놓고 얘기하기에 한번 보자 해서 스물여덟 살 무렵에 마음 놓고 봤습니다. 얇은 얘기 쓰지 말고 깊은 걸 써보자 하다 보니, 성경을 꼭 봐야겠다 싶었지요. 그래서 슈바이처, 불트만 등의 사상서를 거쳐 성경을 본 것이 저를 예수쟁이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런 얘기들이 만화에 묻어 나오니깐, 성장 코드가 베이스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꾼은 주인공을 만들어야 해요. 주인공 만들면서 걱정하는 게 있어요. 정말 이 주인공은 이 이야기를 하는 데 적합한 주인공인가, 이 주인공이 태어나야 할 의무가 있나 고민합니다. 신이 되는 거예요. 얘의 과거는 어때야 하나, 왜 태어났나, 결말은 어떤가 생각합니다. 필요한 부분만큼 잘라 쓰더라도. 무대 뒤편 이야기를 걱정하지 않고서 앞의 것을 다룰 수 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가 얇아져요. 이야기 전면에 등장하지 않지만 주인공 전후의 이야기, 뒷얘기를 걱정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신의 입장이 돼서 캐릭터 고민도 하는 겁니다. 주인공 나름대로의 삶이 있습니다. 엑스트라를 소개할 때도 그들 나름대로의 삶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을 그냥 등장시킬 수 없는 거예요. 왜 우연히 등장하게 하나 캐릭터의 등장을 당위성을 갖고 시나리오를 고민하게 됩니다. 인물 하나하나 다 고민하다 보니 인물이 왜 태어나고 이 인물들이 죽으면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신이 걱정할 걸 본의 아니게 제가 걱정하는 겁니다.

 

    ▶ 함성호 : 전지적 작가 시점이 생기는 거네요.

 

    ▶ 박흥용 : 만화에 등장하는 인물들뿐만 아니라 작업을 하는 저까지 또 다른 엑스트라로 보고 있다면 저는 어디서 왔을지 고민하는 거죠. 장자가 얘기한 거예요. 사마귀가 매미를 잡아먹는데, 카메라가 좀 빠지니까 사마귀를 잡아먹으려는 새가 있고, 새를 잡아먹으려는 사냥꾼이 있었대요. 그럼 혹시 카메라가 좀 더 빠진다면 ‘나는 어디서 왔고, 앞으로 갈 데가 어딘가?’ 어렸을 때부터 고민했습니다.
    큰 시나리오를 쓰는 신이 있지 않나, 나를 관찰하는 더 큰 이야기꾼이 있지 않나 했어요. 주인공을 하나하나 소홀히 대할 수 없어 신중하게 고민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 함성호 : 트리스탄 차라라고 표현주의 프랑스 시인이 한 얘기가 ‘일차원은 이차원의 그림자이고, 이차원은 삼차원의 그림자다. 그렇다면 이 삼차원도 어떤 차원의 그림자일 것이다.’라는 거였어요. 그 사람은 순전히 물리적인 바탕으로 그런 얘기를 했는데, 아까 장자 얘기로 돌아가면 그런 공간 차원의 먹이사슬이 사실은 어딘가에서 만나는 지점들이 있겠죠. 선생님이 말씀하시려는 것도 먹이사슬을 얘기하려는 게 아니라 빠져나오려는 차원의 얘기죠?

 

    ▶ 박흥용 : 차원의 얘기이기도 하지만, 한 명의 캐릭터도 소홀히 대할 수 없었단 얘기고요. 생선토막처럼 딱 잘라서 얘기하지만 잘려진 부분까지 모든 걸 고민하고 얘기하는 게, 제가 작업에 매달리는 자세 같습니다. 그래서 제 만화를 보는 분들이 구도자적이다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너무 쉬운 것을 어렵게 얘기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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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흥용 만화, 독자에게 고민의 문턱 이정표 제시

 

    ▶ 함성호 :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보면서 얼핏 떠오른 만화가 김민의 <불나비>였습니다.

 

    ▶ 박흥용 : 아, 그렇습니까?

 

    ▶ 함성호 : <불나비>의 주인공은 절도사로 마을에 온 사람의 아들인데, 이 아들이 칼로 항상 최고가 되려고 무술을 연마하다가 절대 고수를 찾아가서 겨루기를 하거든요. 그런데 도저히 이길 수가 없는 높은 벽을 느끼고 절망합니다. 그 절망이 오고 난 후에는 배우는 거죠. 그래서 결국 스승을 쓰러뜨려요. 그리고 이제 검 하나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거죠. 양상은 많이 다르지만요.

 

    ▶ 박흥용 : <불나비>는 못 봤고, 책이 있다는 것도 알고 기억이 나는데, 그런 내용이었군요.

 

    ▶ 함성호 : 피가 쫙 나오는데, 김민 선생님은 장미로 표현했어요.

 

    ▶ 박흥용 : 그 당시에는 심의 때문에 그랬을 겁니다.

 

    ▶ 함성호 : 김민 선생님은 칼 하나로 심오한 깨달음을 추구한 것 같아요. 박흥용 선생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깨달음은 어떤가요?

 

    ▶ 박흥용 : 전 모양만 낸 거죠. 사실은 또 다른 이정표를 제시하는 내용인데요. 또 다른 길이 있다는 걸 보여줬는데요. 흔히 아는 길이 있듯이 그런 길 이외에도 또 다른 길이 있다 하고 꺼낸 것이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에요.

 

    ▶ 함성호 : 자세하게 설명해 주세요.

 

    ▶ 박흥용 : 세상에서 인간들이 내 몫을 얻기 위해 보편적인 인생, 통념적인 삶을 살고 있는데요. 그래서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는 혁명도 그중 하나의 길로 등장해요. 황정학이나 견자라는 인물을 통해 또 다른 삶의 방식이라고 이정표를 제시하는 거예요. 깨달음이라기보다 너무 흔한 질문과 고민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던 것이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입니다. ‘나는 도대체 어디서 왔느냐’, ‘마침내 어디로 가게 되는가’와 같은 내용을 주인공이 극중 환경 내에서 고민하게 했기 때문에 구도자적이란 얘기들이 나오는 것 같아요.

 

    ▶ 함성호 : 제가 생각할 때 선생님이 구도자라는 얘기를 듣는 혐의가 있긴 있어요. 그 혐의가 재미있어요. 사실 선생님이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놀랐어요. 선생님 만화가 가진 문제의식은 거의 다 불교에서 왔고, 불교에 친연성이 있더라고요.

 

    ▶ 박흥용 : 한국 독자들이 자신을 고민하는 문턱까지만 이야기로 제공한 겁니다.

 

    ▶ 함성호 : 박흥용 작가는 문제의식을 불교에서 갖고 오고, 이정표는 기독교에서 가져왔네요.

 

    ▶ 박흥용 : ‘기독교가 답이다’ 얘기하면 그만큼 맥없는 만화가 있을까요? 그 어떤 힘이 나를 이 세상에 내보낸 이유가 있을 텐데,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건 아니고요. 모든 독자들에게 문턱까지만 얘기합니다. 어떤 종교든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상당히 궁금해 합니다. 독자에게는 그런 궁금증의 한 축을 제시만 하지 답을 준다면, 그만큼 독자의 생각을 간섭하는 것이 되는 거죠. 극중 환경 내에서 구도자적이라는 흥미를 제공했다면, 정확하게 얘기해서 이정표를 제시한 것입니다. 또 다른 길만 노출한 거죠.

 

 

    박흥용 작가의 이야기 헌팅(취재) 과정

 

    ▶ 함성호 : 취재는 따로 하시죠?

 

    ▶ 박흥용 : 저희 용어로는 이야기 헌팅이라고 하는데요. 헌팅은 정말 겁 없이 해야 돼요. 방짜를 하시는 분을 만나려면 충분히 알고 가야 해요. ‘방짜가 뭐예요?’ 하면 그 작업을 하시는 전문가는 어이없어 하죠. 굵직한 재료를 얻고 그 분야 대가의 생각을 알려면 공부해야 하니까요. 그것이 예의 같아요. 방짜 하시는 분도 만나고 판소리 하시는 분도 만났는데, 제가 얻으려던 것보다 깊이 있는 얘기를 얻기가 엄청 힘듭니다. 만화에 등장하는 짧은 장면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이야기 소재를 얻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도 헌팅은 중요합니다.
    경륜 감독을 직접 만나서 콘티를 짜서 물어본 적이 있는데요. 자기네들과 차이는 있지만 허구적 리얼리티를 인정하셨어요. ‘누가 만화 같은 게임을 하느냐? 그래도 극적이다. 말은 된다.’ 하면서도 만화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려드렸더니 ‘힘을 축적해 왔다면 가능하다.’고 하더라고요.

 

    ▶ 함성호 : <내 파란 세이버>의 주인공은 왜 게임을 해야 하는지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잖아요?

 

    ▶ 박흥용 : 자전거 선수로서의 의미를 잃어버리죠.

 

    ▶ 함성호 : 저는 그게 개인적으로 덜컹 했어요.

 

    ▶ 박흥용 : 시작이야 남들 자전거 타는 것처럼 주인공도 타게 되지만 주인공의 자전거에는 많은 사건이 얹혀서 가벼운 자전거가 아닙니다. 특히나 거지의 죽음이 연루되고요. 주인공의 자전거에는 생명의 값이 청구됩니다. 놀이나 게임이 아니라 등장하는 모든 동료 인물들이 겪는 삶과 아픔들이 또 나름대로 주인공의 자전거에 올라탑니다. 그 무게를 덜어내기 전에는 주인공의 자전거는 가벼워질 수가 없죠. 자전거로 끝장을 봐야 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이 무거운 짐을 어떻게 내려놓느냐에 포커스를 맞췄습니다.

 

    ▶ 함성호 : 그럼 선생님에게 만화라는 것은 어느 순간에, 아무 의미도 없게 될 수 있을까요?

 

    ▶ 박흥용 : 그 부분을 정리한 것 같아요. 제 신앙 고백처럼 얘기한다면, 내가 세상에 나와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집안 환경 때문에 조금 남보다 그림을 쉽게 그릴 수 있어 이런 직업인이 되었는데요.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신이 있다면 재능은 목적을 띠고 주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게 오토바이 사고가 세 번이나 났습니다. 다 부러졌는데 손만 안 부러졌어요. 오토바이 사고 후에 기도를 하면서 신중하게 물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신이 나를 ‘만화쟁이’로 세상에 내보냈나 보다.
    이걸로 먹고 살려고 애쓰지 말고 모든 사람들이 고민하는 얘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영화 쪽에서 영화 해보라고 콜이 많이 왔는데요. 외도도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이런 고민 과정만 없었으면 했을 겁니다. 영화 쪽으로 마음이 떠 있을 땐, 예수쟁이니까 교회 가서 기도를 했는데, 저는 만화쟁이였어요.
    오토바이 사고 때 신이 걷어 가시려면 팔도 부러뜨려야 하는데 멀쩡했거든요. 대형 사고였어요. 시속 200킬로에서 난 사고였는데, 제가 걸어 나와서 목발 짚고 퇴계로에 갔어요. 오토바이 마니아들이 ‘너 불사신이냐?’ 그러더라고요. 그 말을 딱 들었을 때, 모공에 바람이 들어오더라고요. ‘내가 왜 살았을까? 왜 이 손만 멀쩡할까?’ 했죠. 그런 고민 과정이 없었다면 덜컥 영화계로 갔을 거예요.

 

    ▶ 함성호 : 어떤 오토바이를 탔나요?

 

    ▶ 박흥용 : 할리서부터 일제 로드스포츠형이라고 불리는 오토바이까지 골고루 탔습니다.
    로드 스포츠라고 해서 레이스를 하는데, 머리를 수그리면 윈도 덕분에 바람의 저항을 느끼지 못합니다. 코너 돌 땐 몸무게를 이용해 추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해요. 오토바이 얘기는 <레드 존>(1994)에서 했어요.

 

    ▶ 함성호 : 도움이 많이 됐겠네요.

 

    ▶ 박흥용 : 어느 정도는요. 스피드를 내면 헬멧 실구멍을 타고 소리가 들어와서 쎄 하고 귀를 찌릅니다. 그 소리 외에는 조용해요. 시속 300킬로로 아스팔트 마을 하나를 지나면, 너무나 속력이 빨라서 오토바이가 바닥에 튀어요. 지평선을 보고 달려야 돼요. 소실점밖에 안 보여요. 거기 한번 빠지면 거의 사고를 당하더군요. 저도 그럴 뻔했는데 손만 멀쩡한 거예요. 목발 짚고 교회 가서 고민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 함성호 : 지금도 오토바이 타십니까?

 

    ▶ 박흥용 : 이제 오토바이는 타지 않습니다. 에너지를 아껴야 하는 나이더라고요. 지금 만화 작업에 모든 걸 투자해야 해서 많은 놀이를 제거해야 하는 상태입니다.

 

    ▶ 함성호 : 바이크는 취재할 필요가 없었겠네요.

 

    ▶ 박흥용 : 겪은 얘기를 하면 됩니다.
   참새가 되게 빠른데요. 파주, 철원 쪽으로 도로가 새로 난 적이 있어요. 차들도 별로 안 달리고 시멘트로 닦아 놓은 도로입니다. 코너링을 조금만 잘못하면 길 밖으로 날아가요. 오토바이는 코너링을 할 때 바퀴 두 개밖에 없기 때문에 너무 숙이면 바퀴가 지면에 닿는 면적이 좁아서 원심력을 잘 조절해야 되거든요. 아스팔트 도로가 아니에요. 시멘트 도로라서 표면이 깨끗하지 않아요. 울퉁불퉁하고 접지력을 유지하지 못해서 밀려나요. 그런 위험한 도로에서 무식하게 달리는데, 가랑잎 하나가 헬멧 앞으로 지나간 거예요. 만약 그 나뭇잎이 헬멧에 붙었다면 200킬로로 장님이 달리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가슴이 확 철렁했어요. 그런가 보다 하고 딱 도착지에서 봤는데, 피가 범벅이 돼 있는 거예요. 가랑잎이 아니라 참새였던 거예요. 백미러에 부딪치면서 피가 제 온몸에, 참새 피가 튄 거예요. 그렇게 많은 피를 뿌릴 줄 몰랐어요. 참새가 백미러에 붙어서 끼어서 말랐거든요. 내장이 터져 나가고 없고, 깃털도 머리 부리도 말랐어요. 하여튼 경험 때문에 취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 함성호 : 선생님에게 오토바이 중독성이 있는 거네요.

 

    ▶ 박흥용 : 어떤 만화라도 중독성을 주고 있습니다. 헌팅을 제대로 하고 이용해서 이야기를 제대로 엮어 가는 과정이 중독입니다. 그런 과정 때문인지 자전거 마니아들이 이분 자전거 타느냐고 출판사에 문의를 해오더라고요.

 

    ▶ 함성호 : <영년>의 돌팔매도 취재하셨나요?

 

    ▶ 박흥용 : 그 흔적들 고증으로 참고할 만한 실질적 자료들이 많이 없어졌어요. 보존되어 있지 않습니다. 해당 지역의 나이 든 분들이 얘기로 전해 주시더라고요. 우리나라에 골고루 퍼져 있습니다.

 

    ▶ 함성호 : 우리나라에 널리 퍼져 있단 얘기는 처음 들었거든요.

 

    ▶ 박흥용 : 원정을 많이 다녔다고 합니다. 어느 마을과 대항을 해서 지면, 이쪽 마을로 소위 외인부대를 불러서 쌀 얼마 정도를 지원받기로 하고, 그 행사가 벌어지면 상품 나눌 것을 생각합니다. 약속을 하고 외인부대가 간댑니다. 이런 얘기가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 함성호 : 다치기도 많이 다칠 텐데요?

 

    ▶ 박흥용 : 선교사가 기록에 썼더라고요. 돌팔매질 경기로 서너 명이 즉사한 기록이 있어요. 어떤 선교사도 같이 참여하다가 우리나라 사람에게 상해를 입혔는데, 우리나라 법에 무죄라고 했더라고요. 우리나라 관례다 해서 그 선교사에게 무죄를 줬어요. 그렇게 즐겼다고 합니다. ‘죽어도 좋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참여를 했대요.

 

    ▶ 함성호 : 선생님 바이크 탄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 박흥용 : 게임 방식이 여러 가지 있는데, 마을 대 마을이 싸울 때 개천에서 싸운다고 해요. 상대 전적을 다 안대요. 상대 돌팔매 실력을 알아서 대치하고 있다가, 돌무더기 쌓아 거리를 유지해서 오면 던지고, 일진이 막 뛰어오고 나면 그 뒤에 있는 이진들이 뛰어온다는데, 그게 그렇게 멋있답니다. 삼진이 달려가면, 일진은 재장전해서 다시 달려가고, 쫓기는 쪽이 마을로 도망 오는 거예요. 마을까지 공격해 들어가면 장독대 깨뜨리고 난리도 아니랍니다. 승자의 유희래요.

 

    ▶ 함성호 : 거의 카니발이구나.

 

    ▶ 박흥용 : 지고 돌아오면 동네 아낙들이 살림이 다 부서지니깐 다시 재장전 시켜서 내보내요. 대동강 주변에 있었던 고증 자료들을 보면 싸움들은 엄청 난 거 같아요. 경기도, 개성, 전라도, 충청도 일부, 경상도 곳곳에 있더라고요.

 

    ▶ 함성호 : 돌팔매 재질은요?

 

    ▶ 박흥용 : 닥나무와 가죽 등입니다. 돌멩이 재우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가죽으로 만들기도 하고요. 세세한 건 2권에 나옵니다. 돌멩이 잘 던지는 고수가 있는데 다른 용어로 불려요. 고수 중의 고수들은 실력을 다 알고, 서로를 잘 알아본답니다.

 

    ▶ 함성호 : 취재는 어떻게 하셨나요?

 

    ▶ 박흥용 : 과거 오토바이 타고 여행할 때 헌팅 해놓은 걸 많이 쓰고 있습니다. 다각적 헌팅으로 외국 사이트나 외국 전례를 찾아 가면서 번역까지 해가면서 봤습니다. 지금은 고수 중의 고수들이 쓰는 용어를 빼고 얘기했습니다. 2권 스토리에 나와서 중요한 얘기는 뺐습니다.

 

    ▶ 함성호 :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 견자가 어느 순간엔가 떨잖아요. 그건 혹시 경험인가요? 이빨이 덜덜덜 부딪치는 미묘한 상황이었는데요.

 

    ▶ 박흥용 : 두려움이요? 저는 살인을 해본 적이 없지요. 주인공이 처음으로 자기 손으로 좋아하는 여자를 찔렀다고 찌른 장면이었는데요. 예전에 사형수들 헌팅을 해본 적이 있어요. 사형대 가기 전에 사형 날짜 밝히지 않는 이유가 면담 왔다고 하거나 식사한다고 하면 안답니다. 사형수들은 직감으로 알아버린대요. 다리 힘이 풀리면서 오줌을 줄줄 싸기도 한대요. 처음엔 사형수니까 형이 낮은 사람들에게 방장 대접을 받다가, 그때부턴 사지의 힘이 풀리면서 재판장부터 이 나라 구조에까지 엄청난 욕을 해댄답니다. 거의 몸이 경직되고 벌벌 떤답니다. 사형 집행 하는 분들 중 간수인 분이 들려주는 얘기를 듣고 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호언장담하던 사형수도 교수대 앞에 서면 그 이후 세계를 모르니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 함성호 : 사형수 차용해서 표현을 하셨네요. 그런 것들이 굉장히 사실적으로 보이는데요.

 

    ▶ 박흥용 : 그 안에서 리얼리티를 표현하려고 합니다.

 

    ▶ 함성호 : 아까 바이크 얘기 나오고 중독성 얘기 나오고, 해서, 그러고 보니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대사가 생각나는군요. 전문은 기억이 안 나는데, 황정학이 나오는 장면에서 ‘넌 사랑하는 여자를 죽였어. 넌 미친 거야.’ 그런 얘기를 하죠.

 

    ▶ 박흥용 : 사회 규제 안에서 또 다른 문제 해결방법이 있다는 걸 주인공이 서서히 알면서 중독이 되는 거죠.

 

    ▶ 함성호 : 제가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까 선생님 만화에서 한 가지 풀리지 않던 게 풀리는 거 같네요. 이정표일 수도 있고, 미친 것일 수도 있고, 중독일 수도 있겠네요.
    초기 작품에서 강하게 보였던 사회성이 어딘가로 녹아 들어가기 시작하잖아요? <영년>에서는 어떻게 보면 자기가 창조한 허구에 굉장히 자신감이 붙어 있는데요.

 

    ▶ 박흥용 : 자신감은 없고요. 그렇지 않고요.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이 소재가 과연 내가 남은 에너지를 다 쏟을 만큼 가치가 있는지 작가들은 점검하는데, 기초적인 작업은 하고 이 정도 가치가 있다 하고 시작하니까 주장이나 자신감처럼 보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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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가의 동시 언어, 텍스트와 그림

 

    ▶ 함성호 :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영화는 어떻게 보셨어요?

 

    ▶ 박흥용 : 딸들 시집보내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교통정리를 했습니다.

 

    ▶ 함성호 : 어릴 적 그림을 그리기 좋은 환경이라고 하셨는데요.

 

    ▶ 박흥용 : 단지 그림을 그리는 데 쉽게 적응할 만한, 복된 환경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스무 살 때 돌아가시고 형은 마흔 넘어서 세상을 떴습니다. 적어도 그분들의 그림 세계를 보여줄 환경 안에서 보여줄 만큼 보여주고 세상을 떴습니다.

 

    ▶ 함성호 : 초기 사회성 짙은 만화들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지 못했나요?

 

    ▶ 박흥용 : 오히려 역설적으로, 많은 반응을 받았어요.

 

    ▶ 함성호 : 만화가로서 운은 되게 좋은 편이네요.

 

    ▶ 박흥용 : 그림 그리는 집안에서 태어났고, 만화를 어렵지 않게 대할 환경이 어느 정도 있었어요.
    신이 준 재능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그림에 기름기가 끼어 있거든요. 그것을 판별해 내는 능력이 제게 있어요. 그러면서 궁금한 게 있어요. 혹시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있는지 모르겠는데, 신이 준 재능은 시시할 수 있잖아요. 어려운 재능은 신이 안 준 재능을 가지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노력해서 얻는 거니까요.
    신이 주신 재능과 자신이 훈련해서 얻은 재능의 차이는 어느 순간엔가 못 느껴요. 결부돼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공부하지 않아도 잘 그리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저도 본 것을 눈짐작으로 흉내 낼 수 있고 액션 동선들을 카메라로 찍은 것처럼 기억하고 있다가 집에 와서 그리면 그 느낌이 그려집니다. 그런데 타고난 능력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이 있어요. 그림의 틀입니다. 달리 표현할 말이 없어서 그냥 틀이라고 했는데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라 그냥 간단히 말하겠습니다. 내가 그린 그림이 맞았는지 확인하는 잣대입니다. 그려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영역입니다. 재능 없는 친구는 더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이 잣대 앞에서는 재능이 있다 없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제가 보기에는 재능도 있어야 하고 입문하면 진짜 공부를 하게 되는 거예요. 진짜 노력도 해야 하는 거죠. 우스운 얘기를 하자면, 중고등학교, 초등학교 시절에 신문사 미술 대회들이 많이 있어서 상을 탔는데 집안이 그런 집안이 돼서 그림 그리는 게 시시했어요. 재미는 있었어요. 하다 보니 학교 대표가 돼서 안 나가면 안 되고 상 못 받으면 안 되고, 그런 상황이 됐어요. 만화계 딱 들어오니깐 그때 그 미술 대회에서 만난 친구들이 쌍코피를 터트리고 있더라고요. 신이 준 재능이다 뭐다 그러는데, 만화가의 훈련에는 이런 게 재평가되고 재조립되는 과정 같아요.

 

    ▶ 함성호 : 소설 쓰는 사람은 언어로 논리적 추이를 쫓아가는데, 그림 그리는 사람은 이미지로 하네요. 신이 준 재능하고 노력해서 얻는 재능을 가진다는 말씀이 이미지로 사고하는 것과 언어로 사고하는 것 그 두 가지가 맞물려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 박흥용 : 거기까지 사고는 못해 봤습니다. 그림쟁이들은 대부분 메모도 이미지로 해요. 사람을 제대로 그리려면, 사람을 모델로 그려요. 사진을 놓고 그립니다. 모델 사진이 많은 잡지를 보면서 모델들 위주로 연습하면 독자들이 좋아하는 캐릭터가 나와요. 4~5년 연습하면 사람 생김새가 조금 보여요. 사람이 보여야 어떤 구조가 보입니다. 전화하면서 메모를 할 때도 글로 쓰는 것이 아니라 만화적 캐릭터로 어디서 만난다고 장소를 그리고 시계를 그립니다. 그게 더 빨라요. 낙서처럼 하는데, 한 장이 꽉 찹니다. 손은 막 움직여요. 텍스트가 아니라 이미지로 트레이닝을 합니다. 어디 길가에서 만나고 걸어가고 그런 스토리가 메모지에서 전개가 돼요. 어떤 만화가들은 만나는 시간을 숫자로 메모하기보다 약속을 정할 때 ‘그래. 그래. 알았어’ 하면서 그 시간을 시계를 그려서 표시해요.

 

    ▶ 함성호 : 만화가는 서사를 짜야 되잖아요? 직접 짜시죠?

 

    ▶ 박흥용 : 이야기 라인이란 게 우리는 흔히 로드맵이라고 표현하는데요. 그림 그리는 후배 가르칠 때 쓰는 용어예요. 길을 잇는, 길을 구성하는 신작로를 구성하는 설치물들이 있어요. 가로수들 전봇대를 들어 비교해요. 전선은 메시지가 이어지는 라인이고요. 전봇대는 사건이나 등장인물에 비교해요. 이런 이미지로 텍스트로 구성해야 할 서사를 고민하죠.
    콘티도 좀 어렸을 때는 1차, 2차, 3차 작업까지 해봤거든요. 토씨 하나까지 다 외우고 있어요. 텍스트 아래에서 그림이 다 움직이고 있죠. 텍스트와 그림이 거의 동시 언어예요.

 

    ▶ 함성호 : 이미지와 텍스트가 만난다는 게 드문데, 행복하게 하시네요.

 

    ▶ 박흥용 : 아까 중독이라고 얘기하셨는데 리와인드를 해요. 계산기가 나타나기 전에는 주판이 있어서 암산으로 셈할 수 있었잖아요? 암산은 머릿속에 주판을 세워 놓고 그 상상의 주판으로 계산을 한다고 해요. 만화가들도 독자들이 모르는 상상 속의 화면 안에서 주인공들을 움직이면서 대사들도 뿌려 보면서 내용을 전개해 봅니다. 한 장면을 여러 번 되풀이하면서 제대로 전개될지 점검합니다. 머릿속으로.

 

 

    박흥용 작가의 세계관

 

    ▶ 함성호 : 이제 얘기를 정리할 때가 온 것 같은데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만화를 봤거든요. 한글을 만화로 뗐는데요. 누나들, 형들이 만화를 빌려오면 상중하, 상하 정리하다가 한글을 알게 돼서 만화를 굉장히 어릴 때부터 봤어요. 저는 만화당에서 만화 빌려오는 역할을 하는 거죠. 아버지는 칼싸움 만화, 누나들은 순정 만화, 형들은 스포츠 만화, 저는 SF 만화, 그렇게 골고루 봤어요. 지금까지도 만화를 보고 있는데 한국 만화계의 흐름이라는 게 보이잖아요? 웹툰까지 등장했는데요. 일상툰이라고 얘기하는 것들이 가지고 있는 구멍들이 있어요. 한국 만화가 이런 식으로 자기의 소소한 일상을 그리는데, 이것도 중요하지만 거기서 어떤 작가주의를 건져낼 수 있을까 싶습니다. 한쪽에서는 막강한 취재력으로 그려내는 분들이 많은데, <신의 물방울>이라든가 <초밥왕> 등 일본 만화에서 자극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일본 만화를 보면서, ‘만화가 사실만 전달해도 되는 거야?’라고 느꼈습니다. 거기 있는 스토리도 뻔하죠. 요리 대회 하는데 이겼고 포도주는 어떤 식이고, 만화를 안 봐도 다른 책에서 되게 많이 다룬 것들입니다.
    아까 이정표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만화를 보면서 건져내는 것들은 어떤 틀에 딱 갇힌 삶이나 누구든지 꾸는 꿈 말고, 그와 다른 어떤 것들을 일탈이라고 한다면 선생님이 말씀하신 서로 다른 꿈들을 만화에서 보고자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거든요. 엄청난 취재력이라든가 소소한 일상이나 스토리를 자극적으로 전개해서 그리는 것들은 만화사에 여럿 있잖아요. 하지만 편향적으로 흐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봐요. 우리가 만화를 보는 것은 어떤 다른 상상력을 일깨우기 때문이에요. 소설이나 미술, 영화와 달리 만화가 줄 수 있는 꿈들이 있어서 그걸 보는데, 요즘은 배경도 사진 찍어 놓듯이 너무 사실적이고, 이걸 보면 ‘충무로구나’ 알 수 있게 해놓는데 이것도 문제이지 않나 싶습니다.

 

    ▶ 박흥용 : 사진 찍어서 활용하는 친구들의 한계가 현대물밖에 그릴 수 없는 것입니다.

 

    ▶ 함성호 : 만화의 리얼리즘은 문학이나 미술의 리얼리즘과는 다른 어떤 것들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봤어요.

 

    ▶ 박흥용 :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취재를 했으면 소화를 시켜야 하는데, 그게 소화가 안 되면 먹은 게 그대로 나오죠.

 

    ▶ 함성호 : 그런 지점에서 박흥용 만화가 당대에 뜨거운 이슈가 되는 게 그런 것들을 잘 소화해 냈기 때문이 아닐까요?

 

    ▶ 박흥용 : 너무 극찬이시고요. 적절한 학습 만화처럼 일상적인 것은 필요에 의해서 나온 것일 테고, 제가 일상이나 취재에서 다루지 못한 것들을 다룬다면, 혹시 알고 있다면, 만화라는 전체 구색 안에서 주어졌다면 다행인데요. 책이 팔리는 것만 봐도, 제 만화는 잘 안 팔리거든요. 시장이 만들어낸 독자층은 굉장히 넓어요. 그 틈새 중에 하나 정도로 기억돼도 되게 좋을 것 같아요. 저는 방금 함성호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만화로 잘 녹여 놓는 것, 그래서 만화 아니면 안 되는 것이 있다면 해보고 싶습니다.

 

    ▶ 함성호 : 그래서 저도 오늘 새로운 팁을 얻었습니다. 박흥용이라는 작가가 가진 캐릭터 중에서, 중독성이라는 것이 취재력을 소화시킬 수 있는 메커니즘이라고 생각합니다.

 

    ▶ 박흥용 : ‘리와인드’라고 말씀드렸는데요. 리와인드는 화면을 다시 한 번 재구성하고 검증할 수 있는 도구예요. 리와인드 되지 않으면 어디에 허점이 있는지 모릅니다. 비교하자면 술을 담는 사람이 항아리에 여러 소재들을 담아서 특별히 다른 사람과 다른 술을 만들기 위해 애를 쓰는데, 소재를 첨가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을 그걸 우리 동료들이 표현하길 화학작용이라고 하는데, 그 화학작용을 알아야 하는 게 작가입니다. 리와인드 작업 들어가면 계속 섬세하게 장면을 확인합니다. 헌팅해서 갖고 온 것을 이야기에 잘 재구성해서 리와인드를 하다 보면, 나오는 게 많고 필요한 것도 얻게 되는 것 같습니다.

 

    ▶ 함성호 : 그렇다면 <검>은 종교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되게 힘들었을 것 같은데요.

 

    ▶ 박흥용 :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 작가가 누구냐고 빨리 자르라고 했대요. <검>이 《국민일보》에 연재될 때 교회 신도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예수가 못이 여기 박혔지. 왜 여기냐?’ 그래요. 저는 더 헌팅 했거든요. 신학생들은 너무 좋아했어요.
    기독교인들한테는 소원이라는 말 말고 서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한테 거래를 하는 거예요. 이거 들어주시면 이걸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건데요. <검> 연재 중에 서원을 하나 한 게 있는데, 저는 ‘하느님, 저는 다시는 선교 만화, 기독교 내의 만화를 안 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뒤로 제 이름으로 나간 선교 만화가 없어요. 세상 만화를 열심히 그립니다. <검> 작업 할 때는 교인들이 하나하나 시비를 겁니다. 밤중에도 전화가 오는 겁니다. 주인공을 왜 그렇게 망가지게 만드느냐고, 좀 하느님을 잘 믿어서 성공하게 만들길 바랐나 봅니다. 실족도 하고 유혹도 당하고 그러니 너무 화가 나는 모양입니다. 육 개월 연재에 분란이 너무 많았습니다.

 

    ▶ 함성호 : 전 무신론자지만 첫 시집에 기독교 신화적인 게 많이 깔렸는데, 어떤 목사가 저보고 어느 날 사탄이라고 욕하더군요.

 

    ▶ 박흥용 : 저는 사탄이 아니라 ‘너 누구냐?’ 그러던데요.

 

    ▶ 함성호 : 정말 종교 만화는 안 그리시는 겁니까?

 

    ▶ 박흥용 : 자유롭게 세상 만화를 그리고 있습니다. 선악과를 앞에 세워 둔 아담이 자유의지를 가졌다 하는데, <검>을 다룰 때 독립적으로 자유의지를 가진 주인공이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고 반대를 선택할 수도 있고, 자기가 자기 주인으로 불완전하고 신께 지배받지 않을 수 있는데, 그걸 그렇게 욕하더라고요. 주인공이 신을 만나는 과정까지 끌어갔는데, 중간 과정에 욕을 많이 얻어먹었습니다.

 

    ▶ 함성호 : 세속 얘기만 하겠다고 하셨는데, 세속에 별별 얘기가 많지요.

 

    ▶ 박흥용 : 어떤 면에서는 세속이 더 관대해요.

 

    ▶ 함성호 : 세속에서 별별 일이 다 일어나니까요. <경복궁 학교>에서는 삼풍 사고처럼 건물이 무너지죠. 이상한 기시감이 느껴졌는데, 박흥용 작가가 보는 현실은 재난 상황 같은 거라서요. 재난을 많이 이용하나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왜란이고, <경복궁 학교>도 재난이고, 사실은 <그의 나라>도 재난입니다. 초기 단편들에서도 못 가진 사람, 가진 사람 구조들이 거의 다 사회적 재난이라는 것인데요.

 

    ▶ 박흥용 : 앞에 말씀하신 단편들은 환경이 안 좋고 사회적으로 약자인 분들이 주변에 많아서 그분들 얘기를 소재로 했고요. 뒤의 얘기들은 일부러 재난을 베이스로 한 게 아니라 그런 재난이 일어나야 얘기가 만들어져서 리와인드 해가면서 검증을 해본 뒤에 활용한 것입니다. 재난을 일부러 선택한 건 아니에요. 일부러 재난을 선택했다면 더 깊은 생각을 했을 거예요. 솔직히 얘기하면, 삶은 재난이죠.

 

    ▶ 함성호 : ‘삶은 고해다’, 부처님 말씀이잖아요?

 

    ▶ 박흥용 : 얘기가 짙다 보니, 그러한 환경이 만들어져야만 전개되는 얘기들이에요. 또 다른 환경도 필요하고요. 따져 보면, 재난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 함성호 : 마지막 질문이 될 것 같은데요. 선생님은 만화적으로는 굉장히 실험적인 구도를 구사하셨는데, 달리 구상하고 있거나 도전하고 싶은 실험이 있는가요?

 

    ▶ 박흥용 : 현재 작업에 매달리면 다른 생각을 일절 안 합니다. 어느 작업에 안주하면 꼭 기자들이 묻는 게 다음 작업인데요. 전혀 생각을 안 합니다. 현재 작업에만 (생략) 매달리기 위해서, 앞으로의 실험을 넓게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작업에 매달리다 보면 혹시 이전 작업은 피해야 할 게 있고 안 그러면 매너리즘에 빠진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항상 이야기를 짜면서 고민합니다. 리와인드 시켜 가면서 만들어 가기 때문에 어떤 실험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아직 없습니다.
    좀 전에 재난 얘기를 했는데요. 제가 이런 얘기를 후배들에게 즐겨 합니다. 어느 신학자가 한 얘기일 겁니다. 큰 웅덩이가 있고요. 어쩌다가 발을 잘못 디뎌서 떨어지다가 나뭇가지를 잡았습니다. 간신히 버티고 있는데 발 아래로 악어들이 입을 적적 벌리고 있고, 쥐가 붙잡고 있는 뿌리를 갉아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잎사귀에 벌들이 꿀집을 만들어 놔서 꿀이 떨어지니까 꿀을 받아먹으면서 위안을 받는 겁니다. 잠깐 동안 미각의 즐거움 때문에 어려움에 처한 것을 모두 잊습니다. 이게 삶입니다.
    실제 삶을 설명하려면 제 작가관 얘기를 해야 하는데…… 구원이라는 개념을 놓고 보자면, 인간은 현재 어디에 있느냐는 거죠. 사실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위치에 있습니다. 사람은 강물에 빠져서 떠내려가는 중이라 외부에서 누군가가 밧줄을 던져 주거나 뗏목이라도 떠내려와야 살아날 텐데요. 물에 빠졌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사람이 현존하는 위치는 자기 자신을 건져낼 수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신학자 얘기를 빌린 겁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을 잊고 살죠.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강둑에 서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강에 뭐가 떠내려가나 관심도 없습니다. 강물에 빠진 사람은 뭐가 떠내려오는지 살피게 돼 있어요. 다들 자신이 강둑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모든 사람이 강물에 빠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시각으로 세상을 이해해요.

 

    ▶ 함성호 : 어떻게 보면 비관적인 세계관이네요.

 

    ▶ 박흥용 : 맞습니다. 세상을 낙관적으로 본다는 사람조차도 꿀방울 때문에 잊어버린 것이지 원래는 낙관적인 세상이 아니라고 봅니다. 병이 나은 건 아닌데 병이 나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중독적인 걸로 마취를 시키고 아프지 않으니까 나았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 마취제는 이성이 될 수도 있겠죠. 만화도 마취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동안 만화를 그리면서, 가족을 먹여야 하니까 밥을 그려야 했어요. 만화를 그리긴 그리는데 초기 때 즐겼던 만화가 아닙니다. 밥과 빵을 그려야 하니까요. 원하는 만화 사이에서 갈등을 하다 보니 만화가 절대 구원의 도구가 아닙니다. 마취제였죠.

 

    ▶ 함성호 : 어떤 사람이 그러더라고요. 박흥용 만화에는 유머가 없다고요. 유머 없는 만화가 있을 수 있습니까? 다 어딘가에 유머가 있는데 저는 ‘엉까는 유머’라고 봐요. 블랙코미디도 아니고, 블랙코미디라고도 할 수 없는, 의뭉스러운 유머가 숨어 있다고 말해요. 그 유머가 어디서 나오는지 알 것 같아요. 강물에 빠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유머 같아요.

 

    ▶ 박흥용 : 사람들은 다 강물에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둑에 서 있다고 정의를 해요. 구경을 합니다. 자기보다 안 좋은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자신을 위안합니다.

 

    ▶ 함성호 : 이건 진짜 마지막 질문입니다. 인물들의 입술이 탐스러운데요.

 

    ▶ 박흥용 : 여자들에겐 죄송합니다. 길 다니면서 여자들 입술을 본 적이 있어요. 캐릭터를 만들려고요. 서양의 영향을 받은 캐릭터들은 입술이 얇아요. 아프리카, 아시아, 우리나라 민족 섞인 거 아시죠? 이쪽은 입술이 두꺼워요. 남쪽 지역은 이렇게 그려야지 하죠. 북쪽에서 내려온 북방 계열은 코가 길어요. 추운 지역에서 와서 숨을 쉬면 따뜻하게 해서 넘겨야 하니까 코가 길어지고, 남방 계열은 눈이 크고 쌍꺼풀이 있어요. 경상도 남쪽 지방 말을 쓰면 남방 계열 느낌이 나도록 캐릭터를 만드는 거죠. 두툼한 입술의 주인공들이 있는데, 한국 사람을 표현하는 캐릭터들은 입술 있는 것이 없는 쪽보다 예뻐요. 입술 얘기까지 하네요. (웃음)

 

    ▶ 함성호 : 박흥용 선생님과 얘기 나누면서 그동안 만화에 갖고 있던 여러 가지 궁금증도 같이 해결해서 기쁩니다.

 

    ▶ 박흥용 : 긴 호흡을 갖고 질문하는 독자들이 흔치 않은데요. 감사합니다. 속에 있는 얘기를 털어놓은 게 있네요. 구덩이 빠진 얘기, 강물에 빠진 얘기. 꺼내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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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어 함성호 시인 간략 프로필]

 
    건축가이자 시인. 1963년 강원도 속초 출생. 강원대 건축과 졸업. 1990년 계간 《문학과 사회》 여름호 「비와 바람 속에서」 등으로 등단. 시집 『56억 7천만 년의 고독』, 『聖 타즈마할』, 『너무 아름다운 병』, 『키르티무카』 등, 산문집 『건축의 스트레스』, 『허무의 기록』, 『당신을 위해 지은 집』, 『아무것도 하지 않는 즐거움』, 『반하는 건축』, 『철학으로 읽는 옛집』, 『만화당 인생』 등 발간. 건축디자인실험집단 EON 대표. 21세기 전망 동인.

 

 

 

   《문장웹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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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8-01
스물의 체스

[에세이] 스물의 체스 유지혜 생애 처음 체스를 배웠다. 체스는 내 왕을 사수하면서 상대의 왕을 공격하는 전략 게임이다. 내 편에는 총 16개의 기물이 주어진다. 앞줄에는 폰(pawn)이 줄지어 서 있고, 뒷줄에는 왕, 퀸 등 다양한 말들이 대칭을 이루며 자리하며 각 기물마다 고유한 움직임이 있다. 킹(king)은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움직임이 적다. 생존이 최우선 인지라 보통 다른 말들의 보호를 받으며 자리를 보존한다. 반면 작은 몸집으로 제일 많이 싸우는 건 앞줄의 작은 말 폰(pawn)이다. 그러나 나는 폰의 쓸모를 무시했다. 한 칸씩만 움직이는 폰이 지루했기 때문이다. 대각선을 가로지르는 비숍(bishop)으로 판을 압도하고 싶었고, L자로 움직이는 나이트(knight)로는 상대가 시야에서 놓친 구석을 공격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나는 근사하고도 빨리 이기고 싶었다. 결국 큰 말을 무리하게 내세우다 졌다. 그때 게임을 같이 두던 상대가 내게 말했다. 폰, 이 쫄병을 쭉쭉 내보내는 것도 중요해. 하찮아 보여도 얘가 뭘 지켜줄지 몰라. 체스판처럼 인생에도 전략과 기세, 무엇보다 여러 번의 기회가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너무 빨리 망하지 말라고, 인생에는 젊음이라는 폰이 주어지는 줄도 모른다. 폰처럼 젊은 날은 가치는 적은 대신 여러 개이기 때문이다. 아직 무엇이 될지 모르는 인생의 한복판에서 기껏해야 한두 걸음 내딛는 시기. 젊음은 헐값에 좋은 것을 쟁취할지도 모를 기회이다. 하지만 스물엔 그 누구도 전지적 작가 시점에 있지 않다. 앞수를 읽는 노련함은 없다. 가장 작은 몸집으로 큰 세상을 향해 나가는 폰의 시점일 뿐이다. 스스로의 위치조차 가까스로 가늠할 수 있을 뿐. 좀 더 가면 헐값에 잡아먹힐 것 같다는 불안이 몰려올 수도 있다. 더 대범했어도 되었다는 건 순전히 그 시기를 지난 사람들의 이야기다. 갓 성인이 된 2011년, 나에게도 스물이라는 핑계로 얼떨떨한 용기를 냈던 기억이 있다. 나는 대학에 진학하지도, 술을 마시지도, 첫 애인을 사귀지도, 여행을 가지도 않았다. 대신 압구정에 있는 모델 학원을 등록했다. 어릴 적부터 사람들은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인 내게 모델을 권했기 때문이었다. 지망했던 대학에 불합격한 나에게는 아득할 만큼 시간이 많았다. 뉴코아 아울렛에서 5만원을 주고 산 빨강색 게스 구두를 신고 몸매를 드러내는 옷차림의 나는 한쪽 벽 전면이 거울인 연습실에서 워킹을 연습했다. 우리 기수에는 타고난 것으로 먹고 살고자 하지만 그렇다 할 독기는 보이지 않는 이십 대 초반 언저리의 남녀가 모여 있었다. 자신감이 충만한 건지 없는 건지 분간하지 어려운, 겉멋이 잔뜩 들었지만 그로 인해 활기찬 사람들이었고 나도 그중 하나였다. 몇몇 친구들과 나는 금세 친해졌다. 그들은 당시 유행했던 발렌시아가 가방을 어디서 제일 싸게 구할 수 있는지를,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립스틱의 품명을, 이마 보톡스의 효과를 알았다. 그들은 어른의 세계에 진입한 이들이었으나 나는 아니었다. 다들 택시를 타고

  • 관리자
  • 2025-08-01
날마다 한 걸음

[에세이] 날마다 한 걸음 고수리 상경했던 날을 기억한다. 버스를 타고 다섯 시간을 달려 강남터미널에 도착했다. 대합실을 나서자마자 길을 잃었다. 인파 속에 덩그러니 나 혼자. 서울 한복판에 뚝 떨궈진 미아가 된 기분이었다. 서울의 첫인상은 삭막한 회빛, 그리고 몹시 추웠다. 눈이 푹푹 내리던 강원도는 사방이 희고도 따뜻했는데. 나는 목도리를 둘둘 고쳐 매고 한 걸음 내디뎠다. 서울은 복잡하구나. 시끄럽구나. 무심하구나. 아무도 웃지 않는구나. 애꿎은 지하상가를 헤매다 얽히고설킨 출구를 빙빙 돌다가 겨우 개찰구를 찾아 전철표를 샀다. 전철을 타 보는 것도 혼자선 처음 해 보는 일이었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전철 손잡이를 붙들고 서서 노선도를 올려다보았다. 풀빛으로 주욱 이어진 선을 따라 도착할 역사는 ‘온수(溫水)’. 따뜻한 물이라는 이름이 그나마 위안처럼 스몄다. 온수역에 내려 자취방을 찾아갔다. 대로변 가로 이어진 인도를 한참 걸어가다가 멈춰 섰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새겨진 해태상을 맞닥뜨렸을 때, 기이한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돌아보니 ‘안녕히 가십시오 서울특별시입니다’라는 표지판이, 바로 맞은편에는 ‘어서 오십시오 경기도 부천시입니다’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나는 경계에 서 있었다. 아니, 이 기이한 기분의 실체는 기시감일지도. 불안하고 난처한 마음 한구석에 익숙하고도 지긋한 체념이 몰려왔다. 나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서울과 부천 사이에 그어진 경계선을 한 걸음 넘어섰다. 거기에 내가 살 방이 있었다. 내 사정 역시 고학생들의 유구한 상경의 역사와 다를 바 없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고, 집안 형편이 어려웠고, 집세는 감당할 수 없으니, 학교 근처에 가장 싼 방을 수소문해 들어갔다. 상경해 처음으로 얻은 방은 월세 18만 원짜리 남녀공용 고시원 방이었다. 한낮에도 침침한 복도를 걸어가 방문을 더듬어 열 때마다, 엄마가 이 방을 안 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형광등부터 켰다. 창문 없는 길쭉한 방. 방문을 걸어 잠그고 웅크려 누우면 어둡고 눅눅한 관 속에 눕는 기분이었다. 얇은 합판을 덧대어 가른 방은 방음이 되지 않았고, 간간이 들리는 기침 소리와 통화 소리, 텔레비전 소리에 사람들이 나란히 누워 살아 있구나 실감했다. 아침마다 등교하는 대학교는 서울시 구로구 온수동에 있었다. 밤마다 돌아가는 고시원은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에 있었다. 나는 어디에 속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고등학교 시절에도 그랬다. 전라북도 익산시에서 3년을 유학하고, 졸업 후에 잠시 강원도 삼척시에서 지냈다. 삼척은 엄마의 고향이자 내가 중학교 시절을 보냈던 도시지만, 거기도 선뜻 내 고향이라고까지 말하긴 어려웠다. 나는 오래전부터 떠돌며 살았다. 아무도 모르게 함구해야 할 사정이란 게 삶을 짓누를수록 나는 가벼워져야 했다. 짐 하나만 꾸리면 잠시나마 살아갈 사람처럼, 짐 하나만 꾸리면 언제라도 사라질 사람처럼. 갑작스럽고 비밀스럽게

  • 관리자
  • 2025-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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