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인터뷰 나는 왜] 고통스러운 이 땅으로 잘못 날아온 시인
- 작성일 2015-05-04
- 댓글수 0
연속기획 공개인터뷰 _ 나는 왜?(제11회)
고통스러운 이 땅으로 잘못 날아온 시인
- 시인 김성규 편
정리 : 안희연(시인)
4월이 되고 걸음을 멈추는 일이 잦아졌다. 꽃이 피면 꽃이 핀다고, 날이 좋으면 날이 좋다고, 봄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툭하면 슬퍼지는 계절. 그런 봄이 되면 불쑥불쑥 김성규 시인이 생각난다. “봄날은 무심히 가네. 나이가 드니 이런 말들이 이해가 돼.” “시간 지나면 허무한 일이지. 이성복 시인의 「아들에게」가 생각나네.” 기억 못 하시겠지만, 김성규 시인이 그간 내게 툭툭 던지곤 했던 말들이다.
그때마다 나는 그가 이 땅으로 잘못 날아왔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망명자가 틀림없었다. 그래서 궁금했다. 어쩌다 그가 이곳으로 잘못 날아왔는지. 그와 함께 떠나는 “폭풍 속으로의 긴 여행”에는 소수의 독자들이 초대되었다. 나도 끄트머리에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여러 분들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두렵다는 말로 그날의 말문을 열었다.
물방울이 둘로 쪼개지듯이
▶ 이영주(이하 이) : 《문장웹진》 연속기획 공개인터뷰 [나는 왜] 시간입니다. 오늘 이 자리는 소규모로 꾸려진 만큼 소중하고 내밀한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먼저 오늘의 초대 손님인 김성규 시인을 잠시 소개할게요. 충북 옥천 출신이고,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하셨네요.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셨고, 시집으로는 『너는 잘못 날아왔다』와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가 있습니다. 김성규 시인,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 김성규(이하 김) : 네, 안녕하세요.
▶ 이 : [나는 왜]의 공식 질문으로 인터뷰를 시작해 볼게요. 김성규 시인을 문학의 길로 인도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나요? 늘 듣는 질문이죠?
▶ 김 : 이런 독자와의 만남 행사를 하면 주최 측은 관객이 많이 와야 좋겠지만, 사실 저는 적게 오는 게 좋아요. 사람은 누구나 감추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이런 자리에서는 자기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두려운 마음이 크거든요.
저는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시를 썼어요. 그때 김소월, 윤동주 시집을 사서 읽곤 했는데, 그때 제가 왜 시집을 사서 읽고 시를 썼던가 생각해 보면 외롭고 슬퍼서였던 것 같아요. 어릴 때 집이 무척 가난했어요.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쌀밥을 먹었으니까요. 제가 6남매인데요. 집이 워낙 가난하다 보니 누나들은 70년대 영화에서나 볼 법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산업체(공장)에 다녔어요. 집 안 분위기도 늘 우울했는데, 아버지께서 거의 매일 술만 드셨어요. 나중에는 집을 못 찾아 오신다거나 병원 신세를 지는 등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할 정도가 됐고요. 아버지가 폭력적이지는 않았으나 늘 취해 계셨고, 그래서 어머니와도 자주 싸우셨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웠고, 누나들이 공장으로 가고 나면 집이 늘 우울했죠.
제가 좀 전에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쌀밥을 먹었다고 했는데 그 이유도 할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이었어요. 어머니께서 마을에 누가 장례를 치르면 쌀을 주는 계를 하고 있어서, 집에 쌀이 생긴 거죠.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금강휴게소로 출근을 하고 누나들도 돈을 벌면서 집이 경제적으로 조금씩 안정을 찾았어요. 그게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이에요. 아마 그 무렵 제 세계가 둘로 쪼개졌던 것 같아요. 물방울이 충격을 받으면 둘로 쪼개지듯이. 가난과 우울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어릴 때부터 생각했고 공부밖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글은 계속 쓰고 싶더라고요. 그때 쓴 유치한 시도 몇 편 있는데 지금은 잊어버려서 하나도 없어요. 뱀 굴 안으로 들어가서 어린 제가 불타는 흙 위에 흩어진 동전을 주워오고 그런 시였던 것 같은데. (웃음)
제겐 글쓰기가 우울을 극복하는 방법이었어요. 세상과 싸운다기보다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일이었고, 패배한 자의 자기위안이었고요. 인간관계도 무척 어려웠어요. 학교 끝나고 집에 올 때 친구들과 같이 가지 않고 혼자 다른 길로 가고 그랬어요. 우울증도 심했고요. 사춘기를 지나서도 그런 상황이 계속됐고 스스로를 비극의 주인공처럼 생각하며 자주 울었던 것 같아요.
▶ 이 : 사실 저와 김성규 시인은 알고 지낸 지 오래된 사이인데, 이런 얘기는 한 번도 나눌 기회가 없었어요. 유년의 체험이 소설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네요. 제가 아는 김성규 시인은 개그에 남다른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서, 어릴 때부터 우울에 지배당했으리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아마도 우울해서 개그에 더 집중하는 스타일인 것 같네요. (웃음) 그럼 다음 질문을 건네 볼게요. 김성규 시인의 시집 제목(『너는 잘못 날아왔다』와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을 보면 비극적인 징후가 강하게 드러납니다. 제목을 지을 때 어떤 기준이나 사연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 김 : 시인들이 시집 제목을 정할 때 잘 팔릴 것 같은 제목을 많이 짓는데, 저 역시도 인상적인 제목을 많이 고민했어요. 특히 두 번째 시집 제목은 여러 가지 제목이 있었는데 제가 강하게 주장했죠. 김소월이나 윤동주나 기형도 같은 시인들 보면 비극적으로 생을 마치잖아요. 어릴 때는 저도 그런 위대한 시인들처럼 비극적으로 생을 마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서른 이전에 죽어야 문학사에 길이 남고 세계적인 작가가 될 것 같잖아요. (일동 웃음) 살다 보니 서른이 되었고 첫 시집이 나왔는데 별로 반응도 없고, 그러다 보니 서른 중반이 되었고 그래서 조금 더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두 번째 책을 낸 거예요. (웃음) 두 번째 시집이 나와서 부모님께 보여드렸더니 제목도 표지도 종말론적이고 왠지 종교 집단에서 만든 책 같은 느낌이잖아요. 아버님 왈, “집에 자주 오는 사람들이 놓고 가는 책 같다.” 그러시더라고요. (일동 웃음) 전도하려고 종교인들이 집에 자주 와서 책자를 놓고 가거든요. 사실 책 나오고 사이비종교 집단에서 좀 사주지 않을까 기대했어요. 그런데 그런 일은 전혀 없더라고요. (웃음) 출판사에서는 좀 더 서정적인 제목으로 가길 원했는데, 그래도 이건 제 일생일대의 책이니까 제목을 양보하기 싫었어요. 우겨서 이렇게 됐어요. 제가 아는 시인은 시집 제목 따라 인생이 흘러간다고 농담처럼 말하는데 그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요. 자기 책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되니까, 제목이 비극적이면 그만큼 침윤되는 것 같고요. 두 번째 시집 내고 나서도 별 반응이 없었는데 오히려 그게 좋기도 해요. 너무 유명해지면 어떻게 해요. 연애도 마음대로 못 하고 사람들하고 술 먹고 싸움도 못 할 텐데. (웃음)
▶ 이 : 두 시집 제목이 연결해서 읽히기도 해요. 두 번째 시집의 “망가진 자” 중에 “잘못 날아온 너”가 있을 것 같고요. 여기서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기 위한 가벼운 질문 하나 할게요. 첫 시집이 공영방송 드라마《시크릿 가든》에 출연해서 화제가 되었잖아요. 그때 기분은 어떠셨는지? 그것과 관련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시집도 좀 나갔죠?
▶ 김 : 네. (웃음) 당시 누나와 같이 살았었는데 텔레비전이 하나라 다툼이 심했어요. 박지성이 맨체스터에서 열심히 뛸 때라 저는 축구 중계만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누나가 절대 양보를 안 하는 거예요. 《시크릿 가든》 보겠다고요. 그래서 제가 중국이 왜 망했는지 설파했어요. 드라마는 현실을 도피하게 하는 마약이다, 중국 인민들이 다 그 아편에 홀려서 현실을 망각하는 거 아니냐, 누나 같은 사람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 그러면 누나는 듣지도 않고 시끄럽다고 하죠. (일동 웃음) 할 수 없이 방에 들어가 컴퓨터로 축구를 보고 있는데 휴대폰으로 문자가 1초에 하나씩 오더라고요. 제 책이 드라마에 나왔다는 거예요. 내심 책이 좀 팔리려나 했지만 내색은 못 하잖아요. 자고로 시인이란 학처럼 고고해야 하니까. (일동 웃음) 아닌 게 아니라 다음날부터 책이 많이 팔린다는 거예요. 신문에도 기사가 나고, 인터넷 서점에서는 ‘《시크릿 가든》 선물세트’ 상품이 생기기도 했고요. 당시 하루에 200권, 300권씩 나갔어요. 궁금해서 서점에 몰래 가본 적도 있어요. 시집에 사진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날 알아보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서 괜히 인문학 코너 저 뒤로 돌아서 몰래 가봤는데 (웃음) 베스트셀러 코너에 진열이 되어 있더라고요. 당시에 5위인가 그랬어요. 주변에서 사람들이 잘 팔리는지 물어 오는데, 기분은 너무 좋은데 내색은 못 하고 “모르겠어요. 좀 팔리겠죠.” 괜히 심드렁하게 대답하고 그랬어요. (웃음)
호두나무와 잉어
▶ 이 : 시집에 관해 좀 더 이야기를 나눠 볼까요? 김성규 시인의 시집을 읽다 보면 ‘호두나무’가 인간의 원형에 해당되는 중요한 사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산문에서도 이 호두나무가 시인의 고향에 실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 나무 이미지가 시인의 삶을 둘러싼 채 시적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것 같아요. ‘호두나무’에 대한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 김 : 고향 마을에 호두나무가 있었는데요. 그 나무를 보면서 나무도 사람과 똑같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늙고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저희 아버지가 80이 넘으셨는데 그 호두나무가 아버지 어릴 때부터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어릴 땐 지금보다 훨씬 컸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작아졌어요. 죽어가고 있는 거죠.
호두나무가 원래 생명력이 강한 나무예요. 호두나무가 한 그루 있으면 그 일대에는 다른 나무가 못 자라요. 껍질에 독이 있어서, 바닥에 떨어지면 그 독이 퍼지는 거예요. 6?25때 미군들은 껍질을 먹고 죽기도 했대요. 배는 고픈데 먹을 줄을 몰라 껍질을 먹은 거예요. 그런 무서움, 삶과 죽음을 포괄하는 게 호두나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나무가 가진 일반적인 상징이 있잖아요. 우주목이라고도 하죠. 지하에는 뿌리가 있고 지상에는 몸통이 있고 천상에는 가지가 있고요. 무당이 굿 할 때 나뭇가지를 흔들잖아요. 나무를 흔듦으로써 천상의 목소리가 무당의 몸에 체화되어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거죠. 그런 상징성과 제가 직접 보았던 나무의 무서움이 뒤섞여 시로 발현된 것 같아요.
▶ 이 : 그럼 이쯤에서 독자 분의 시 낭송을 들어 볼까요?
존재하지 않는 마을
이듬해부터 가지가 찢어지도록 호두가 열린다
노인들은 손바닥에 검은 물이 들 때까지
빈 하늘을 쓸어내리는 바람소리
치맛자락처럼 펼쳐진 호두나무가 쓰러진다 |
▶ 이 : 시인의 이야기 끝에 시를 들으니 시가 확 들어오고 시의 외연도 넓어지는 느낌입니다. 한편 ‘호두나무’와 함께 또 하나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사물이 ‘잉어’입니다. 두 권의 시집에 ‘잉어’(물고기 이미지)가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 김 : 제가 백수였을 무렵 천변을 따라 걷다가 한강까지 간 적이 있어요. 한강에 낚시하는 사람이 있기에 뭘 잡았느냐고 물으니 잉어를 잡았다는 거예요. 잉어를 직접 보니 유선형이 아니라 굉장히 뚱뚱하고 사람 장딴지 같더라고요. 콧구멍도 있고, 수염이랑 입도 있어서 꼭 사람같이 느껴졌어요. 그리고 옛날에 시골에서는 임산부에게 잉어나 가물치를 고아서 먹였어요. 제 큰누나도 몸이 약하고 말라서 아이 낳고 나서 어머니가 잉어를 고아서 먹인 적이 있거든요. 특히 가물치는 육식성이라 식욕도 강하고 생명력이 굉장히 강해요. 대부분 물고기가 물 밖에 나오면 금방 죽잖아요. 그런데 가물치는 몸을 움직여서(기어가서) 강물로 찾아들어가 살아요. 잉어도 호수가 마르면 흙속으로 파고들어 가뭄을 견딘다고 해요. 엄청난 생명력인 거죠. 그러니까 임산부에게 잉어나 가물치를 고아 먹인다는 것은 단순히 물고기를 먹이는 게 아니라 그 생명을 먹이는 거예요.
그리고 물고기에게는 본래 ‘진리’라는 상징이 있어요. 절에 가면 종(풍경)에 물고기가 매달려 있잖아요. 물고기는 눈꺼풀이 없어서 늘 눈을 뜨고 있으니까, 종치면 잠에서 깨어나라 깨어 있어라 하는 거예요. 제 시의 물고기 이미지에는 이러한 인상과 상징들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 이 : 무서운 이야기네요. 특정 사물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의미나 상징을 끄집어내는 것이 바로 상상력의 힘일 텐데, 김성규 시인은 그것에 정말 능한 시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불행의 편에 서서
▶ 이 : 한편 김성규 시인의 시는 항상 불행의 편에 서 있습니다. 두 시집 모두 근대 이후 세계의 부조리함과 구조적 모순을 첨예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고향을 떠나 도시로 온 청년들이 성공하지 못하고 훼손되어 가는 식이지요. 이에 대한 시인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 김 : 근대나 근대화, 도시라는 건 다 신기루예요. 다 성취해야 하는 것들이고요. 고향을 떠나 서울에 와서 돈을 벌면 화려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게 되는데, 망상이죠. 문학도 일종의 신기루지만요.
이십대 초반에 제가 도시로 올라올 때도 그랬어요. 도시에서 시인이 되어 살면 처음에는 고생하더라도 나중에는 중산층 정도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시크릿 가든》에 책이 나왔을 때만 해도 ‘아, 나 이제 살았구나.’ 했는데. (웃음) 저는 아직도 반지하에 살고 있죠.
10대의 착각 중 하나도 그것이었어요. 그때 읽은 책들이 신경림, 박노해, 정희성, 김지하, 김남주 이런 시인들이었고 문학이 사회적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있었던 시기였으니까 문학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혁명 시인, 멋있잖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순진했던가, 그것 또한 환상이었다는 생각이 들죠. 도시에서 화려한 생활을 성취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꿈꾸듯이 문학의 언어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꿈꾸는 게 문학의 이상이 아닐까 해요.
▶ 이 : 도시적 삶의 매혹과 환멸을 동시에 느끼는 것은 근대 이후 모든 인간의 공통된 갈등이 아닐까 싶습니다. 독자 분의 낭송을 한 편 듣고, 계속 이야기 나눠 보도록 할게요.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
아무도 장님인 저에게 돌을 던질 수는 없습죠 땅속으로 파고들어간 방 한 칸, 누가 뭐래도 이 방은 우리의 왕국입니다요 방바닥에는 분유통을 굴리고 노는 어린 동생들, 아무도 우리의 기쁨을 눈치 챌 수 없게, 얼른 문을 닫으라고 어머니는 소리 질렀습죠 방 안 가득 꿈틀거리는 비린내를 배 터지도록 들이마시면
주홍빛 꽃송이가 쏟아지는 하늘, 난쟁이들과 춤을 추는 동생들, 사과를 들고 계단을 오르는 처녀들, 안대를 벗겨 내 눈동자에 새겨진 왕국을 하늘에 펼쳐 주세요
안대를 풀자 배를 가른 어머니와 장님인 다섯 동생들, 웃으며 아무거나 해달라고 나에게 보챘습죠 눈 감아도 훤히 보이는 어둠 속에는 우리를 밟아 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요 차라리 장님으로 행복하게 살고 싶었습니다요 커튼을 열고 눈을 떴습죠
유리창으로 가늘고 가는 빛이 쏟아져 들어와 눈을 찔렀습죠 온몸에 숨어 있던 열기가 두 눈으로 쏟아져 나왔습죠 눈동자에 새겨진 왕국이 하늘로 솟아올랐습죠
흙으로 묻어 놓은 입구를 따라 병든 쥐들이 인도하는 길을 걸으면 어머니는 간과 신장을 팔아 통증의 왕국을 선물하셨네 기억은 언제나 뒤엉켜 꿈을 꾼 흔적들,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 우리를 기다리는 고통이 있다면 누가 뭐래도 이곳은 우리의 왕국이라네
깡통 속에서 서로를 밀치는 동전소리, 장님은 복도를 걸어가며 노래하네
저 짐승 같은 사내에게도 우리처럼 작은 죄가 있었다면 그렇게 허황된 왕국을 떠올리지 않았을 텐데 졸린 눈을 부비며 나는 정거장에 내린 사내를 보네 놀란 여자들은 향수 냄새를 풍기며 복도 쪽으로 비켜서도 빛이 쏟아지는 지하도 끝으로 사내는 지팡이를 두드리며 사라지고 있었네 |
▶ 김 : 명작입니다. (일동 웃음)
▶ 이 : 김성규 시인의 시에서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물 이미지입니다. 유년 시절에 강가에 사셨다고 했는데, 아마 그래서 자연스럽게 물 이미지가 시 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물은 안온하고 따뜻한 모성적 이미지가 강한 반면, 김성규 시인의 경우에는 무섭고 폭력적인 모습으로 인간 사회를 뒤덮고 있는 듯합니다. 홍수가 난다든지, 반대로 물이 빠져서 탈수된 형태로 그려지거든요.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 김 : 마을이 강 앞에 있었기 때문에 홍수가 나면 수위가 굉장히 높아졌어요.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구경이 물 구경, 불 구경, 싸움 구경이라잖아요. 홍수가 나면 별별 것들이 다 떠내려 와요. 돼지도 떠내려 오고, 나무도 떠내려 오고, 소가 떠내려 올 때도 있어요. 수박, 축구공, 승용차, 어쩔 땐 집도 떠내려 오는데 그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몰라요. 어느 날은 배에 탄 사람이 떠내려 오는 것을 봤어요. 물살이 빨라 막 떠내려가는데 그 사람이 물가에 있는 풀을 잡더라고요. 사실 엄청난 위기의 장면이지만 액션 영화를 보는 것처럼 굉장히 스펙터클했어요. 사람이 강물에 떠내려간다는 건 육체나 정신의 죽음이고, 자연이라는 말은 ‘스스로 그러하다’는 뜻이잖아요. 그렇다면 죽음이나 폭력도 강이나 나무처럼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그리고 홍수는 혁명의 이미지와도 닮아 있어요. 모든 것이 휩쓸려간 뒤에 그 폐허의 땅에서 싹이 트듯이 혁명에도 희생과 부활의 이미지가 있죠. 특히 제가 가진 물이나 강의 이미지는 신화적, 체험적 요소가 많아서 묘사 중심으로 썼던 것 같아요.
▶ 이 : 자연이 가지고 있는 무서움이 있죠. 저는 도시에서 자랐고, 자연을 잘 몰라서 더 무섭게 느껴지기도 해요. 반면 체험한 자들은 체험의 실감으로 오는 공포가 있는 듯합니다. 무척 와 닿는 이야기였어요. 더불어 가난과 고통에 대한 구체적인 실감도 시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습니다. 데뷔작도 그렇고, 자본에서 소외된 자들의 심정을 잘 표현하시잖아요.
▶ 김 : 도시에서는 홍수가 나도 그다지 변화가 없고 밋밋한 것 같아요. 시골처럼 나무나 돼지가 떠내려 오는 것도 아니고, 빌딩이 파괴될 일은 없잖아요. 장마 때 한강에 가서 물 구경을 한 적이 있는데 어릴 적처럼 역동적인 일은 없었어요.
제가 막 상경했을 무렵, 서울역 앞에 있는 대우빌딩을 보면서 공룡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나도 언젠가 저 빌딩의 한 칸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꿈꿨었죠. 한번은 지하철을 타려는데 사람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래서 다음 차를 타야겠다, 하고 기다렸는데 다음 차에도 사람이 똑같이 많더라고요. 그게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몰라요. (웃음) 남산에 올라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면 빌딩이며 아파트가 저리 많은데, 저 중에 내 건 하나도 없구나 싶어서 슬프고. 어느 부유한 문학 애호가가 생일 선물로 작업실(통유리로 된!) 하나 주고, 시 창작에 매진하라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혼자 생각해요. (웃음) 그런데 질문이 뭐였죠?
▶ 이 : 가난과 고통이요. (일동 웃음) 한 사람이 많이 갖고 있어서 내 건 없는 거예요. 이게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을 요즘 들어 뼈아프게 느낍니다. 한편 김성규 시인의 시에는 ‘아이들’이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아이들이 주체가 되어 직접 말하는 경우도 있고 시에 동원되는 경우도 있고요. 시인에게 ‘아이들’이라는 대상은 어떤 존재일까요?
▶ 김 : 아이들이라는 말에는 ‘어리다’와 ‘어리석다’가 같이 들어 있잖아요. 순수하면서도 어리석은 존재. 시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보들레르가 말했듯 시인은 ‘천상에서 지상으로 유배된 천사’인데, 현실에서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이 다른 한편으론 반대급부가 있어요. ‘눈 먼 장님’처럼, 아무것도 보지 못하지만 그래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자,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걸 보는 자니까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 보면 주인공이 둘인데, 소냐는 그리스어로 ‘지혜’라는 뜻이고 라스콜리니코프도 ‘단절, 분리된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소냐는 작중에서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유로지비’로 불리는데 ‘유로지비’란 일종의 ‘눈 먼 예언자’와 같은 존재예요. 바보처럼 보이지만 신 앞에서는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죠. 가령 치매 노인이 엉뚱한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예언을 던지는 것처럼, 저 역시도 시에서 아이들(어리고 어리석은 자)의 입을 빌려 예언적이고 잠언적인 말을 던지곤 했어요.
▶ 이 :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아이들’과는 다른 맥락의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현실을 회피하고 도피하려는 ‘미성년’ 화자가 아니라, 철저하게 아이들의 입장에서 행해지는 발화라고 생각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성규 시인의 아이들은 ‘단단한 아이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 마법사
▶ 이 : 자, 지금부터는 독자 여러분의 질문을 받아 보는 시간입니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손을 들고 질문해 주세요.
▶ 독자 질문 : 두 번째 시집에 수록된 「미식가」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 마법사」를 보면 공통적으로 ‘마법’ 모티브가 나오는데, 마법이란 보통의 인간은 사용할 수 없는 특별한 것이잖아요. 아까 말씀하신 신기루, 환상 같은 것과도 연결이 될 듯한데, 이 시들에 등장하는 마법과 마법사의 의미가 궁금합니다.
▶ 김 : 기본적으로 마법사는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자이잖아요. 「미식가」에는 자기 몸에 불을 붙이는(분신하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한 아이가 불붙은 몸의 온도가 몇 도인지 물어보죠. 이 시는 사실 1986년도에 군(軍) 전방입소 거부로 분신했던 이재호, 김세진 씨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착상하게 됐어요. 그 일이 있고 20년 뒤에, 당시 같이 운동했던 동료들을 찾아가는 내용이었는데요. 개중에는 대학교수가 된 사람도 있고, 변호사가 된 사람도 있고, 헌책방을 하는 사람도 있고 다양했죠. 그중 변호사가 된 사람에게 그때 일이 생각나는지 물으니 신림동을 오가는 하루 두 번, 그때마다 매번 떠오른다고 답하더라고요. 그렇지만 그 장소를 다시 가본 적은 없다고요. 무의식적으로 피하는 것 같았어요. 또 다른 한 명은 공대 출신이었는데, 당시 분신을 할 때 몸의 온도가 몇 도일까 생각했대요.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가는데 죄책감도 없이 피부에 불붙이면 몇 도인가라는 생각을 했다는 거예요. 그 얘길 눈물을 흘리며 하더라고요. 죽은 사람의 아버지도 찾아갔는데 아버지에게 자식이 생각나느냐고 하니까 말은 못 하고 고개를 끄덕끄덕하시는 거예요. 자식의 행동을 잘했다고 생각하느냐, 역사에 공헌한 것 같으냐, 당시 같이 운동했던 친구들에 대한 생각은 어떠냐 물으니, 자기 자식은 죽고 그 친구들은 자식 낳고 행복하게 사는 것 같아 미우면서도 그걸 밉다고 말하면 자기 자식이 한 일이 무용한 일이 되니까 늘 마음의 갈등이 있는 거예요. 우리는 누구나 고통을 가지고 있고, 그 고통을 초월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럴 수 없는 거잖아요. 시인도 그런 존재인 것 같아요. 그런 비극성과 내면의 고통을 환상으로 전환시키면서 쓴 시였어요.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 마법사
눈보라가 괴물의 울음소리를 내며 몰려오고 있었다 내가 죽자 바람이 멈추고 눈송이는 창문에 달라붙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가 사진 속에서 걸어 나와 내 몸을 껴안고 우셨다 나는 천장으로 날아올라 누워 있는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파랗게 식어 가는 내 손을 쓰다듬고 있었다
차라리 잘 되었다 이제 아침을 거르지 않아도,
나는 어머니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어머니는 공기 중을 떠다니는 내 얼굴과 누워 있는 시체를 번갈아 바라보셨다 어머니의 눈동자에서 작은 눈송이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남의 마법을 흉내 내다 괴로워하지 않아도,
그때 찬바람이 방 안으로 몰아치고 문이 열렸다 어머니는 서둘러 사진 속으로 걸어 들어가 눈물을 닦았다 나는 방 안으로 들어온 주인집 노파와 경찰에게 혀를 내밀었다 시체 1구 발견, 시체 1구 발견, 방 안에 널려 있던 종이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경찰은 무전을 쳤고 눈보라가 점점 울음소리를 크게 내고 있었다 월세도 내지 않고 죽어버리다니, 노파는 궁시렁거렸다 천장까지 밀려들어온 찬바람이 내 몸을 밀어내고 있었다
눈보라 속으로, |
▶ 김 :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 마법사」도 마법사가 글 쓰다가 방에서 죽는 얘기인데요. 결국 굶주려 죽는 이야기인데, 시인이 가난해서 (참)이슬만 먹고 살다가 죽을 수도 있단 말이죠. 실제로 그런 일도 있고요. (웃음) 이 시는 나 이제 시 안 써도 된다, 나만의 문장을 쓰려고 노력 안 해도 되니 좋다, 그런 시인데요. 제 안에 두 가지 욕망이 있는 거예요. 가난해도 고고하게 살아서 정말 시인다웠다고 기억되고 싶은 욕망과 다른 한편 이제 더 이상 반지하 동굴에서는 살기 싫다는 욕망이요. 땅 위로 올라와서 강연료도 많이 받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싶은 세속적 욕망, 이 두 욕망이 늘 공존하고 싸우는 것 같아요.
▶ 이 : 저도 그래요, 저도. (일동 웃음) 그런데 우리가 세속적으로 출세하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생각이라도 하면서 잠시 고통을 잊는 거죠.
▶ 독자 질문 :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쓰시는 것 같아요. 시의 근원을 자신의 삶 바깥에서 얻는 경우가 있고 삶에서 얻는 경우가 있잖아요. 김성규 시인은 주로 어떻게 시의 소재를 얻으시는지, 시를 쓸 때 특별한 방법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 김 : 저의 경우, 시에서 개인적인 경험을 초월해 탈출하고자 하는 성향이 강한 것 같아요. 땅 속에 있으면 땅 위로 올라가려 한다거나 굴을 파고 들어가 지구의 끝까지 가본다거나, 사물이나 상황을 극단화시키는 방법으로요. 이를테면 눈이 와도 그냥 눈이 온다고 하지 않고 백 년 동안 눈이 온다고 하거나, 바람이 불더라도 작은 바람이 아니라 폭풍우가 밀려와 다 휩쓸려 간다든지 하는 식이죠. 그런 극단적인 상황과 개인적인 경험을 섞는 거예요. 아무래도 개인적인 경험을 많이 쓰게 돼요. 책을 읽으면서 착상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완전한 허구만으로 시를 만들어내지는 않아요.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잖아요. 물론 시라는 것도 창작이니까 허구를 만들어내는 것은 맞지만 기본적으로 시는 1인칭의 장르잖아요. 거짓말하면 안 된다는 강박증이 있어요.
▶ 이 : 자세한 내용은 영업 비밀이니까요. 이쯤 하시는 걸로. (일동 웃음)
▶ 오창은 문학평론가 : 제가 수업 시간에 학생들하고 김성규 시인 시집을 읽는데 한 학생이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이 시인 아직 살아 있어요? 자살 안 했어요?” 멀쩡히 살아 있다고, 만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해서 실제로 김성규 시인을 만나게 해준 적이 있어요. (웃음) 그만큼 김 시인의 시가 죽음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성규의 시는 죽음이 앞서 있고 점차 생명을 향해 가는, ‘언어로 풀어내는 살풀이’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런 과정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 김 : 제가 만일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됐다거나 권력이 있는 사람이 되었더라도 마음 한편으론 너무 우울했을 것 같아요. 돈이 많아도 갑자기 자살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열심히 시를 썼던 이유도 고통스럽고 우울했기 때문이에요. 현실로부터 도망가기 위해서 극단적으로 책을 읽고 글을 썼으니까요. 예전엔 정말 밥을 굶어 시집을 샀어요. 아마 그래서 제가 키가 안 큰 것 같아요. (웃음) 행복했다면 안 썼을 거예요. 서정주의 시 중에 「바다」라는 시가 있어요. “귀기우려도 있는 것은 역시 바다와 나뿐.”으로 시작되어 “청년아./ 애비를 잊어버려/ 에미를 잊어버려/ 형제와 친척과 동모를 잊어버려,” 같은 구절이 나오기도 하는데요. 시인은 정말 이기적인 인간이에요. 애비 에미를 잊으라는 말은,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사랑 주는 사람을 배신하겠다는 거잖아요. 얼마나 이기적인 거예요. 진짜 나쁜 놈이죠. 제가 6남매인데 제가 다섯째예요. 고등학생 때였는데, 막내인 남동생을 데리고 강가에 나가서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랬어요.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앞으로 나는 시인이 되어 시를 써야 하니 부모님은 네가 건사해라.” (일동 웃음) 보세요, 얼마나 이기적이에요. 시는 신기루이고 사이비종교 같은 것인데 말이죠. 그래도 시라는 사이비종교에 빠졌기 때문에 오늘 여러분 만나서 이런 얘기도 할 수 있고, 이만큼 살아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시 때문에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생존하고 있으니까, 감사한 존재일 수밖에 없죠. 앞으로도 시를 위해서 헌신하며 살아갈 겁니다. (웃음)
▶ 이 : 원래 가족은 남들 안 볼 때 갖다버리고 싶은 존재라잖아요. 위대한 시인인 랭보도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시는 걸 보면서 ‘저기 지옥의 입구가 있구나.’라고 말했다고 하잖아요. (일동 웃음)
▶ 김 : 나이 들수록 부모님 보는 게 아주 슬픈 일이 돼요. 《시크릿 가든》에 10회 연속 시집이 나오지 않는 이상, 현빈이 라면 먹을 때 받치고, 여자 친구한테 읽어 주고, 매회 그런 장면이 계속되지 않는 이상 어려운 일이죠. (일동 웃음)
▶ 독자 질문(나주에서 오성인 시인이 보낸 원격 질문) : 「독산동 반지하 동굴 유적지」는 불후의 명작입니다. 요즘 같은 시국에는 더더욱 말입니다. 시를 쓰는 일은 이처럼 쓸쓸한 유적지를 찾아다니는 일인 바, 앞으로 어떤 유적지를 찾아다니실 계획이며 무엇을 발굴하시고 싶은지 궁금합니다.
▶ 김 : 제가 「독산동 반지하 동굴 유적지」를 쓰고 나서 음독자살한 가족이 있었어요. 뉴스로 보는데 너무 슬프더라고요. 그들이 제 시를 읽었을 리 없겠지만 왠지 내 잘못인 것만 같고 나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 괴로웠어요. 일부 사람들은 시집이 유명해지면 독산동 집값이 떨어질 거라고도 했고요.
앞으로 저는 적당히 타협하는 문학이 아닌, 우리 시가 가보지 못한 길을 가보고 싶어요. 우리 시에 보면 세계에 대한 갈등이 있더라도 그것을 봉합하면서 따뜻하게 화해하는 시가 많거든요. 저는 그러지 않고 극단으로 밀고 가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첫 시집에서는 우울함, 종교적 특징, 환상성을 흐릿하게나마 보여주었고, 두 번째 시집은 그걸 좀 심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앞으로도 비극과 비참을 극단으로 몰고 가면서 환상을 가미한 시가 쓰고 싶어요. 세계의 비극도 물론이지만 주인공 화자가 비극적인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크고요. 한편으로는 잠언적인 서정시를 쓰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브레히트의 「나의 어머니」 같은 시는 묘사 위주의 시가 아니에요. 저는 브레히트의 시처럼, 서정을 진술로 끌어가면서 아포리즘도 가미된, 선이 굵은 서정시를 쓰고 싶습니다.
우리는 근처 호프집으로 이동했고, 꿀맛 같은 맥주를 마시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어떤 이야기 끝에, 김성규 시인이 세 번째 시집에는 ‘오백년 뒤에’라는 제목을 붙여야겠다는 농담을 던졌다. 그러면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 “오백년 뒤에.”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지 않겠느냐고. 웃자고 한 말에 모두들 웃기는 했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 괜히 시무룩해지고 걱정이 되었다. 앞으로 오백 년이나 남았으면 그때까지 망가진 자들은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겠구나, 그리고 우리의 시인은 반지하방에서 (참)이슬만 먹으며 비극과 비참을 찰흙 반죽처럼 주무르고 있겠구나, 싶어서.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덤비는 것 같아 피식 웃고 말았지만, 아니다, 진심으로 나는 바란다. 김성규 시인이 이 오래된 농담에 맞서 끝까지 망가진 자들의 편에 서 계시기를. 화해 없이 용서 없이, 오래도록 그러해 주시기를.
5월호》
추천 콘텐츠
[문장웹진 REWIND] 얼음이 어는 순간과 얼음이 녹는 순간, 그 슬픔의 음역 -강성은의 「고딕 시대와 낭만주의자들」(《문장 웹진》 2008년 6월호) 최하연(시인,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글의 출발점으로 돌아가 생각하면―.’ 떠오른 첫 문장은 이랬다. 이 첫 문장의 그 앞 문장은 없으므로, 돌아갈 곳이 없으니, 불능의 세계인데, 나는 없는 출발점으로 자꾸 돌아가고 있다. 어쩌면 나는 몇 덩어리의 문장을 쓴 뒤에, 원래의 첫 문장을 지우고 다시 썼는지도 모른다. 쓰던 글을 재차 읽어 가며 마지막 문장을 쓰고 나면, 그땐 첫 문장을 또 고치게 될까. 그렇게 고친 문장이 사실 저 앞의 문장이라면―아니 고친 뒤에 읽어 보니 아까 것이 나은 듯싶어 고민 끝에, 원래대로 돌려놓은 문장이라면―출발점 없는 출발점은 글 안에 있고, 여전히 불능한 첫 문장은 불능을 모른 채 남게 될 것이다. 2008년 5월호 문장 웹진엔 강성은의 시 「고딕 시대와 낭만주의자들」이 실려 있다. 이 글의 진짜 출발점은 사실 여기이다. 뾰족한 첨탑 위에 갇힌 누군가 구름에 편지를 써요 그럴 때 구름은 검은 빗방울을 뚝뚝 떨어뜨리지요 구름의 얼룩진 편지를 읽은 어떤 이들은 울음을 멈추고 검은 강물 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도시엔 무서운 전염병이 돌고 녹색의 박쥐 떼가 공중을 날아다닙니다 창백한 입술을 잃은 자들은 곧 두 손과 머리털을 잃고 두 눈알과 심장을 잃었지요 점점 희미해져 우리는 우리를 잃었지요 당신과 나의 비밀 이야기는 입속에서 입속으로 공기와 밤의 중얼거림을 통과하고 얼룩진 편지는 얼룩 고양이가 물고 밤의 담장 너머로 사라집니다 우리는 내일의 날씨를 예측할 수 있지만 내일의 악몽을 점칠 수는 없었어요 빗방울은 때로 격렬하게 내립니다 한 방울 뒤에는 수천만 우주의 모든 물방울들이 뾰족하고 오래된 첨탑 위의 편지는 전해 오는 이야기 속에서 날마다 더 아름다워져 갑니다 우리는 첨탑 위로 답장을 보내는 법을 모르고 얼음이 어는 순간과 얼음이 녹는 순간 슬픔의 음역을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고딕 시대와 낭만주의자들」 전문 회고가 실패의 알리바이를 지워 내듯, 전망이 이 지울 수 없는 실패의 유예이듯, 지속 가능한 내일에 대한 일반의 믿음 또한 불능을 모르는 불능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언제나 힘이 셌다. 우리는 그것을 산문의 세계로 불렀고, 시는 산문의 세계로부터 이격해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나아가 그곳에서 늘 첫 문장을 시작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가 “내일의 날씨를 예측할 수 있지만/ 내일의 악몽을 점칠 수는 없”는 것처럼, 그렇게 시작한 시는 늘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산문의 세계로 붙잡혀 돌아오는 “내일의 악몽”이다. 이 정황에는 하나의 커다란 허방이 있다. 누가 누의 내일이 될 수 있는가. 혹은 되어야만 하는가. 시인은 “얼음이 어는 순간과 얼음이 녹는 순간 슬픔의 음역”을 발견한다. 그런데 빙점은 과연 물의 내일일까, 얼음
- 관리자
- 2025-08-01
스물의 체스 유지혜 생애 처음 체스를 배웠다. 체스는 내 왕을 사수하면서 상대의 왕을 공격하는 전략 게임이다. 내 편에는 총 16개의 기물이 주어진다. 앞줄에는 폰(pawn)이 줄지어 서 있고, 뒷줄에는 왕, 퀸 등 다양한 말들이 대칭을 이루며 자리하며 각 기물마다 고유한 움직임이 있다. 킹(king)은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움직임이 적다. 생존이 최우선 인지라 보통 다른 말들의 보호를 받으며 자리를 보존한다. 반면 작은 몸집으로 제일 많이 싸우는 건 앞줄의 작은 말 폰(pawn)이다. 그러나 나는 폰의 쓸모를 무시했다. 한 칸씩만 움직이는 폰이 지루했기 때문이다. 대각선을 가로지르는 비숍(bishop)으로 판을 압도하고 싶었고, L자로 움직이는 나이트(knight)로는 상대가 시야에서 놓친 구석을 공격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나는 근사하고도 빨리 이기고 싶었다. 결국 큰 말을 무리하게 내세우다 졌다. 그때 게임을 같이 두던 상대가 내게 말했다. 폰, 이 쫄병을 쭉쭉 내보내는 것도 중요해. 하찮아 보여도 얘가 뭘 지켜줄지 몰라. 체스판처럼 인생에도 전략과 기세, 무엇보다 여러 번의 기회가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너무 빨리 망하지 말라고, 인생에는 젊음이라는 폰이 주어지는 줄도 모른다. 폰처럼 젊은 날은 가치는 적은 대신 여러 개이기 때문이다. 아직 무엇이 될지 모르는 인생의 한복판에서 기껏해야 한두 걸음 내딛는 시기. 젊음은 헐값에 좋은 것을 쟁취할지도 모를 기회이다. 하지만 스물엔 그 누구도 전지적 작가 시점에 있지 않다. 앞수를 읽는 노련함은 없다. 가장 작은 몸집으로 큰 세상을 향해 나가는 폰의 시점일 뿐이다. 스스로의 위치조차 가까스로 가늠할 수 있을 뿐. 좀 더 가면 헐값에 잡아먹힐 것 같다는 불안이 몰려올 수도 있다. 더 대범했어도 되었다는 건 순전히 그 시기를 지난 사람들의 이야기다. 갓 성인이 된 2011년, 나에게도 스물이라는 핑계로 얼떨떨한 용기를 냈던 기억이 있다. 나는 대학에 진학하지도, 술을 마시지도, 첫 애인을 사귀지도, 여행을 가지도 않았다. 대신 압구정에 있는 모델 학원을 등록했다. 어릴 적부터 사람들은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인 내게 모델을 권했기 때문이었다. 지망했던 대학에 불합격한 나에게는 아득할 만큼 시간이 많았다. 뉴코아 아울렛에서 5만원을 주고 산 빨강색 게스 구두를 신고 몸매를 드러내는 옷차림의 나는 한쪽 벽 전면이 거울인 연습실에서 워킹을 연습했다. 우리 기수에는 타고난 것으로 먹고 살고자 하지만 그렇다 할 독기는 보이지 않는 이십 대 초반 언저리의 남녀가 모여 있었다. 자신감이 충만한 건지 없는 건지 분간하지 어려운, 겉멋이 잔뜩 들었지만 그로 인해 활기찬 사람들이었고 나도 그중 하나였다. 몇몇 친구들과 나는 금세 친해졌다. 그들은 당시 유행했던 발렌시아가 가방을 어디서 제일 싸게 구할 수 있는지를,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립스틱의 품명을, 이마 보톡스의 효과를 알았다. 그들은 어른의 세계에 진입한 이들이었으나 나는 아니었다. 다들 택시를 타고 각자 집으로
- 관리자
- 2025-08-01
날마다 한 걸음 고수리 상경했던 날을 기억한다. 버스를 타고 다섯 시간을 달려 강남터미널에 도착했다. 대합실을 나서자마자 길을 잃었다. 인파 속에 덩그러니 나 혼자. 서울 한복판에 뚝 떨궈진 미아가 된 기분이었다. 서울의 첫인상은 삭막한 회빛, 그리고 몹시 추웠다. 눈이 푹푹 내리던 강원도는 사방이 희고도 따뜻했는데. 나는 목도리를 둘둘 고쳐 매고 한 걸음 내디뎠다. 서울은 복잡하구나. 시끄럽구나. 무심하구나. 아무도 웃지 않는구나. 애꿎은 지하상가를 헤매다 얽히고설킨 출구를 빙빙 돌다가 겨우 개찰구를 찾아 전철표를 샀다. 전철을 타 보는 것도 혼자선 처음 해 보는 일이었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전철 손잡이를 붙들고 서서 노선도를 올려다보았다. 풀빛으로 주욱 이어진 선을 따라 도착할 역사는 ‘온수(溫水)’. 따뜻한 물이라는 이름이 그나마 위안처럼 스몄다. 온수역에 내려 자취방을 찾아갔다. 대로변 가로 이어진 인도를 한참 걸어가다가 멈춰 섰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새겨진 해태상을 맞닥뜨렸을 때, 기이한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돌아보니 ‘안녕히 가십시오 서울특별시입니다’라는 표지판이, 바로 맞은편에는 ‘어서 오십시오 경기도 부천시입니다’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나는 경계에 서 있었다. 아니, 이 기이한 기분의 실체는 기시감일지도. 불안하고 난처한 마음 한구석에 익숙하고도 지긋한 체념이 몰려왔다. 나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서울과 부천 사이에 그어진 경계선을 한 걸음 넘어섰다. 거기에 내가 살 방이 있었다. 내 사정 역시 고학생들의 유구한 상경의 역사와 다를 바 없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고, 집안 형편이 어려웠고, 집세는 감당할 수 없으니, 학교 근처에 가장 싼 방을 수소문해 들어갔다. 상경해 처음으로 얻은 방은 월세 18만 원짜리 남녀공용 고시원 방이었다. 한낮에도 침침한 복도를 걸어가 방문을 더듬어 열 때마다, 엄마가 이 방을 안 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형광등부터 켰다. 창문 없는 길쭉한 방. 방문을 걸어 잠그고 웅크려 누우면 어둡고 눅눅한 관 속에 눕는 기분이었다. 얇은 합판을 덧대어 가른 방은 방음이 되지 않았고, 간간이 들리는 기침 소리와 통화 소리, 텔레비전 소리에 사람들이 나란히 누워 살아 있구나 실감했다. 아침마다 등교하는 대학교는 서울시 구로구 온수동에 있었다. 밤마다 돌아가는 고시원은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에 있었다. 나는 어디에 속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고등학교 시절에도 그랬다. 전라북도 익산시에서 3년을 유학하고, 졸업 후에 잠시 강원도 삼척시에서 지냈다. 삼척은 엄마의 고향이자 내가 중학교 시절을 보냈던 도시지만, 거기도 선뜻 내 고향이라고까지 말하긴 어려웠다. 나는 오래전부터 떠돌며 살았다. 아무도 모르게 함구해야 할 사정이란 게 삶을 짓누를수록 나는 가벼워져야 했다. 짐 하나만 꾸리면 잠시나마 살아갈 사람처럼, 짐 하나만 꾸리면 언제라도 사라질 사람처럼. 갑작스럽고 비밀스럽게 떠나며 살아
- 관리자
- 2025-08-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