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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소설_HㆍOㆍTㆍEㆍL ②] 유리주의

  • 작성일 2015-06-21
  • 조회수 2,143


[기획소설_HㆍOㆍTㆍEㆍL ②]



유리주의




이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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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유리주의



버스가 올라왔다. 턱시도를 차려 입은 도어맨이 허리를 굽히고 손님들을 맞아 주었다. 차가 현관 앞에 제대로 서지 못하고 조금 더 앞으로 나갔다 후진으로 돌아왔다. 건물 고층에 매달려 유리를 닦던 사람들이 도르래 줄에 달달 끌려 올라갔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새들을 미처 치우지도 못한 상태였다. 사람들이 차에서 내리기 직전에 청소부와 도어맨이 대가리가 터지고 몸통이 부서진 새들을 맨손으로 집어 올렸다. 호수의 수면 아래서 무엇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살이 잘박잘박 흩어지며 햇빛을 튕겼다. 차가 급정거한 느낌도 없는데 좌석 통로 중간에 놓인 쓰레기 박스가 앞으로 쭉 밀려왔다. 생선 장수 병덕이 누가 듣기에도 과한 비명을 지르며 쓰레기 박스를 덮쳤다. 박스에서 빈 소주병들이 튀어 올랐다. 가이드가 병덕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의 아내인 정자는 남편을 외면하고 창밖의 호수만 바라보았다.
운전사가 차문을 여니 복(福) 자가 거꾸로 새겨진 붉은 카펫이 보였다. 가이드와 도어맨의 부축을 받아 제일 먼저 내려온 병덕이 몇 걸음 걷다 말고 허리를 감싸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배가 불룩한 유희와 그녀의 연하 남편 민준이 뒤를 이어 하차했다. 수년간의 복합적인 시술로 나이를 쉽게 가늠하기 어려운 여고 동창 삼인방이 다정하게 껌을 씹으며 내렸다. 덩치가 큰 지영과 키는 작지만 다부진 몸매의 정훈이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구경은 좀 나중에 하라는 투로 개량한복을 입고 온 도사와 마리가 정훈의 어깨를 두드렸다. 도사와 마리는 버스에서 내리는 와중에도 팔짱을 풀지 않았다. 정자가 그들을 노려보며 맨 마지막으로 차에서 내려왔다. 버스가 떠나고, 이십대 초반의 여자 가이드가 일행을 호텔 안으로 들여보냈다. 도사 커플이 문 쪽으로 거침없이 걸어가다 동시에 외마디 소리를 내지르며 얼굴을 문질렀다. 건물의 겉면 전체를 통유리로 감싼 호텔이었다. 이곳의 현관문은 직업정신이 투철한 청소부가 닦고 닦고 또 닦아 놓아 흡사 특별한 눈에만 보이는 오로라 같았다. 도어맨이 병덕의 팔을 붙잡고 걸어왔다. 가이드가 겨우 호텔 안으로 들어선 사람들을 뒤로 한 채 전화기를 귀에 대고 유리문 밖으로 뛰어 나갔다. 청소부가 문 옆에 붙어 있는 ‘유리주의 (glass)’ 글자를 걸레로 한 번 더 닦았다. 바로 밑에 한국어로도 쓰여 있었다.
바다를 등진 산 중턱에 있는 아담한 호텔이었다.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호수를 품고 있는 까닭에 휴양지로도 이름이 높았다. 아름다운 풍광과 통유리 호텔, 제주도에 가는 것보다 더 저렴한 경비 등이 복합되어 꼭 가볼 만한 여행지로 손꼽혔다. 신비한 괴생명체가 산다는 호수 옆의 호텔 스위트룸은 웃돈을 주고 예약을 해야 할 정도로 인기몰이 중이었다. 차를 돌릴 만한 공간이 여의치 않은 까닭에 버스가 후진으로 올라왔다. ‘왕(王)쯔(子)’라고 새겨진 호텔 현판이 검은 매연을 한껏 머금었다. 가이드가 버스 안으로 뛰어 올라갔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가 초록색 여권을 손에 쥐고 내려왔다. 또 전화가 걸려올지 몰라 섣불리 출발하지 못하는 버스 기사와 다르게 가이드는 일행의 체크인 수속을 밟았다. 카드 키와 호텔 방 사용법이 한국어로 적힌 종이를 받아든 사람들이 각자의 짐을 끌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몰려갔다. 로비의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도어맨이 버스 기사에게 이제 내려가도 좋다는 수신호를 보냈다. 담배를 빼문 기사가 한 손에는 반쯤 남은 플라스틱 병 소주를 들고 연신 자동차 열쇠를 돌렸지만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성질 급한 청소부가 차 뒤꽁무니를 한 대 치려는 순간에 기적적으로 엔진이 켜졌다. 미처 치우지 못한 죽은 새를 버스 바퀴가 사정없이 뭉개고 내려갔다. 그것을 모아 쓰레받기에 담으며 청소부가 쉴 새 없이 욕을 했다. 호텔 건물 맨 꼭대기에서 다시 도르래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왕쯔 호텔에서의 첫날이자 여행의 마지막 날 저녁이었다. 식사 시간이 되어 1층의 식당에 모두 모이는 것도 버스에서 하차할 때만큼이나 오래 걸렸다. 여고 동창 삼인방끼리 결계를 치며 앉았고, 나머지 한 테이블에 다른 사람들이 화기애매하게 둘러앉았다. 미리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팔뚝만 한 생선찜과 볶은 자장면, 계란과 가지와 게살이 가득 들어간 국, 돼지비계 청경채 볶음, 고추 잡채와 수십 가지 딤섬이 테이블에 이층 삼층으로 쌓였다. 칼 장인의 기본적인 기예가 덧씌워진 투박한 파인애플 거북이와 붉은 태양을 이빨 사이에 끼우고 곧 천장으로 승천할 것만 같은 당근 이무기도 접시들 맨 위에 올라가 있었다. 사람들은 늘 먹던 탕수육 비슷한 고기 튀김만 몇 젓가락씩 손을 댔을 뿐 각자 가져온 반찬과 찐 밥만 먹었다. 유희가 딤섬 접시를 아예 독차지했다. 군용 깔깔이를 입고 심드렁하게 앉아 있던 민준은 임신한 신부 쪽으로 눈도 주지 않고 연신 맥주만 마셔댔다. 정자는 가게에서 팔다 남은 것을 가져온 티를 내지 않으려고 지느러미와 꼬리를 잘라온 건어물에 볶은 고추장을 찍어 먹었다. 병덕은 이것을 여기까지 가져왔느냐며 타박을 하고는 슬그머니 손을 뻗다가 정자에게 손잔등을 얻어맞았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광천 조미김 한 봉지를 꺼냈다. 맛이 뼛속 깊이 박힌 소주 안주였다. 김 봉지를 뜯은 것은 병덕이지만, 제일 먼저 몇 장 집어간 것은 정자의 손이었다. 아끼던 김 몇 장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본 병덕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마신다는 포즈로 소주를 입안 가득 머금었다. 그들 옆으로 빈 소주병이 낮에 본 왕릉의 기마병처럼 도열했다.
도사와 마리는 사실 어제 처음 만났다. 인천 공항 D구역 여행사 간판 밑에 가장 먼저 도사가 왔고 뒤이어 마리가 도착했다. 두 사람은 이 넓은 공항에서 오로지 당신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듯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긴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자석에 이끌린 쇳가루마냥 빠르고, 나사가 조여지는 것보다 더 완강하게 들러붙었다. 아시아 최고의 허브라는 인천공항 돔 형태의 지붕이 오로지 두 사람을 위한 하늘의 축복처럼 느껴졌다. 속궁합도 잘 맞았다. 영민한 도사는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도취에 젖어 마리에게 온 힘을 쏟았다. 마리는 힘 좋고 돈 잘 쓰는 이 남자가 하냥 좋았다. 지금의 이 ‘느낌’이 여행 기간 내내 지속되어 주기를, 도사의 품에서 헤어 나올 수 없게 되기만 바랐다. 먼 길을 돌아와 이제 겨우 만나게 된 천상의 배필인지 어찌 알겠는가. 마리는 콧소리를 내며 갖가지 음식을 도사의 입에 쉴 틈 없이 넣어 주었다. 도사는 아까부터 박에게 소주 한잔 청하고 싶었지만 체면상 그러지 못했다. 그는 매너 있는 손동작으로 돼지비계를 집어 마리의 입에 한가득 넣어 주었다. 그런 후에 주머니에서 오십 불을 꺼내 가이드에게 내밀며 최고 좋은 고량주 한 병을 부탁했다. 뒤돌아서는 가이드에게 거스름돈은 필요 없다고 굳이 큰 소리로 덧붙였다. 그것을 본 여고 동창들도 같은 것을 주문하며 꼭 영수증을 챙겨 달라는 부탁을 잊지 않았다. 가이드가 샐쭉한 표정으로 술을 가지러 갔다. 민준도 칭따오 맥주를 주문했다. 가이드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이 일행은 어제부터 각자 가져온 술과 반찬을 먹느라 현지 술이나 음식은 사 먹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가이드가 뭐라도 조금 더 권할라치면 입맛에 맞지 않는다거나, 상한 냄새가 난다며 시비를 걸었다. 라텍스와 진주를 파는 쇼핑센터에서는 바가지 씌우지 말라고 강짜도 부렸다. 그녀가 조금 전에 병덕이 식당에 가지고 온 소주를 보고 한숨을 내쉰 것도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오늘이 여행의 마지막 밤이라는 것을 상기했는지 너나없이 술들을 찾아댔다. 가이드는 호텔에서 최고 좋은 고량주는 오백 불이 넘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적당한 선에서 간체로 쓰여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술 두 병을 가지고 왔다. 이제야 일당이 빠진 가이드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이런저런 심부름을 도맡아했다.
정훈은 반찬과 밥을 지영 앞으로 끌어다 주며 요목조목 살뜰하게 챙겼다. 지영은 정훈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고 저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제일 먼저 일어나 방으로 올라갔다. 부부인 듯도 하고 부부가 아닌 것도 같은 커플의 모습에 여고 동창생들이 눈짓으로 쑥덕거렸다. 얼큰하게 취한 와중에도 민준과 유희는 데면데면했다. 그만 좀 먹어. 민준이 타박을 하자 딤섬을 추가해 먹던 유희가 울상을 지었다. 후식으로 당근 이무기를 집어먹던 정자가 애 가지면 다 이러는 법이라면서 제가 가져온 반찬 몇 가지를 유희 쪽으로 밀어 주었다. 유희가 정자의 반찬을 먹으며 남편 눈치를 봤다. 민준이 따라 준 맥주에 소주를 부어 먹던 병덕이 주머니에 있던 한국 돈 몇 천 원을 가이드에게 찔러 주며 노래를 시켰다. 가이드가 어찌할 바를 몰라 애매하게 웃었다. 정자가 병덕의 등짝을 힘껏 내리쳤다.
두 테이블 모두 합해 칭따오 맥주 열다섯 병과 한국 소주 열 병, 고량주 두 병으로 저녁 겸 술추렴이 끝났다. 식사를 하는 시간은 십 여 분 남짓했으나 술은 밤새라도 마실 기세였다. 식당 문 닫을 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남은 술들을 챙겨 각자의 방으로 올라갔다. 병덕이 휘청거리자 정자가 남편의 허리춤을 잡아끌었다. 유희가 민준의 팔짱을 끼려다 거칠게 외면당하는 모습이 또 하필 여고 동창 삼인방의 눈에 띄었다. 식당 직원들은 돈 많은 한국 사람들이 팁을 테이블에 올려 두고 가지 않은 것에 분개했다. 내일 아침에 오늘 남긴 것들을 꺼내다 주겠다는 말들을 주고받았다.


스위트룸의 여고 동창 삼인방 수연, 연숙, 민화는 판판하게 펴둔 항공 담요 주변으로 진지하게 모였다. 그 옆에는 식당에서 가져온 고량주와 집에서 싸온 멸치 볶음과 오이장아찌가 봉지째 놓였다. 한동안 아무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흔들었잖아? 흔들 거나 있어? 쟤 쌍피에, 넌 박 쓰고…… 참, 너 아까 피 한 장만 주던데? 조용히 해, 들을라. 쟤는 머리가 나빠서 기억도 못 해. 기다려 봐, 쟤 다 쌌다. 얼른 좀 와. 고꾼이 너무 자주 자리를 비운다? 변비야. 얼라? 야, 야 낙장불입이지. 넌 늘 이런 식이야. 안 내려놔? 수연이 넌 피박에 민화는 겨우 박 면하고. 아, 고도리 깨졌네! 자, 얼마냐. 광박이니까 너는 이제 이백오십 불, 민화 너는 백이십 불 내놔. 아, 하도 따니까 이제 계산도 귀찮다야. 내일 장뇌삼이나 몇 뿌리 사가게 꼭 딸라로 내놔. 한국 돈 말고. 뭐? 아까 주긴 뭘 줘. 지난번 여름에 명동 호텔서 고 할 때, 너 이십만 원 나한테 안 갚은 것도 있다? 기억이 왜 안 나! 그래, 한국서 진 빚은 한국 가서 받는다 쳐도 오늘 껀 계산 확실히 해라. 세상 깨끗하고 쿨한 척은 혼자 다 하고 살면서 뒤로는 꼭 이런 식이지. 니년은 늘 그래 왔어. 맞아, 너 희진이랑도 이래서 깨졌지? ……야아, 걔 얘긴 왜 꺼내냐.
이국의 고판에서 뜬금없이 희진이 튀어나오자 모두의 안색이 바뀌었다. 나도 모르게 뱉은 이름을 어쩔 거냐는 식으로 수연이 옆에 놓인 고량주 잔을 집어 들었다. 모두의 뇌리에 희진과 정혜 그리고 희진과 동반자살을 한 정혜의 남편 준석의 모습이 다가왔다. 죽은 년 놈들은 그렇다 쳐도, 행방불명 된 정혜는 어쩌고 사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한때 정혜는 교수가 될 사람의 부인이랍시고 목에 힘을 주어 친구들에게 욕을 먹었다. 만년 시간 강사도 교수냐며 연숙이 비아냥거렸지만 정혜는 눈치 채지 못했다. 친구와 남편의 외도도 전혀 알지 못하다가 황망히 그 둘을 떠나보냈다. 모두에게 쏟아진 더러운 거짓말 같던 시간이 지나고 어느덧 환갑을 맞이한 세 사람이었다. 야,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두고 돈이나 내놔. 설마 돈 안 주려고 걔들 얘기 꺼낸 건 아니지?
독수리 오자매의 고등학교 졸업식 날 계획된 환갑 여행이었다. 둘이 사라지고 난 뒤에 줄줄이 과부가 된 세 사람의 처지도 우정을 돈독히 하는 데 힘을 보탰다. 셋은 우여곡절 끝에 사라진 두 사람을 마음에 담고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둘의 기억이 여행 내내 따라다녔다. 산해진미를 먹어도, 신기한 바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때도 마음에 그어진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았다. 애써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즐거웠다가 쓸쓸해지고, 괘씸했다가도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그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급기야 두 사람이 들러붙었다. 중간에 낀 민화만 이리저리 머리채가 잡히고, 티셔츠의 목이 늘어나는 수모를 겪었다. 싸움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고 옛 이야기들까지 들춰 가면서 싸워대느라 밤이 길었다. 둘 사이에 끼어 있던 민화는 오래전에 자살한 희진이 여기에 있다면 싸움의 판도가 달라졌을 것이라 생각했다. 돈 계산 하나만큼은 칼같이 해줬으니까. 어제는 누굴 만나 어떻게 자봤다는 얘기는 사실 무척 재미있었으니까. 겉으로 쿨한 척하며 속으로는 온갖 질투심에 몸을 불태우던 희진이 혹시 이 비행기를 같이 타고 오지 않았을까. 와서 고판이 깨지는 것을 보면서 고소해하지는 않을까. 그렇게 갔으니 좋은 데서 쉬지는 못할 텐데, 올 수나 있을까. 민화는 여러 모로 마음이 복잡했지만 당장 눈앞에서 브래지어 끈까지 잡아당기며 늘어난 거머리처럼 들러붙은 친구들을 떼어 놓느라 더 많은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근데 너는 아직도 뽕이냐는 연숙의 힐난에 수연이 제 가슴을 부여잡고 허리를 굽혔다. 환갑이 되어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한 가지였다. 죽은 남편이 매우 안타깝게 여기던 지점이었다. 이년아, 너처럼 처진 것보다 낫지 뭘 그래? 이건 가슴이냐? 아랫배야? 잠깐 숨을 고르던 연숙이 수연을 향해 일갈했다. 껍데기는 가라, 뽕브라는 가라!
급기야 항공 담요가 허공에 떴다. 고스톱 패와 달러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돈과 화투패가 한꺼번에 흩날리는 것이 흡사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때 민화의 코끝에 비릿한 향내가 스쳤다. 오스슥 소름이 돋은 민화가 눈을 크게 뜨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싸움꾼들은 항공 담요 안에서도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뽕브라가 벗겨진 수연의 납작한 가슴이 담요 안의 어둠 속에서 유난히 돋보였다. 연숙의 허리가 접혀 안 그래도 처진 가슴과 툭 튀어나온 뱃살이 한껏 친한 척을 했다. 커튼으로 가려 놓지 않은 통유리가 방 안의 모습을 고스란히 되비추었다. 유리창에 설핏한 사람의 형상이 나타났다. 담요에서 날아온 고스톱 패 한 장이 허공에 머무는 시간이 유독 길었다.


통유리가 뿜어낸 반사광이 호수의 물결과 만나 이루는 빛의 파도가 비경이었다. 빛과 빛이 만나는 지점에 언뜻 나타났다 사라지는 호수의 괴물도 매우 훌륭한 이야깃거리였다. 소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져 괴물은 바다로 가지 못한 이무기가 되거나, 백 년 묵은 거북이의 현현으로도 강림했다. 터무니없는 소리들이 호수를 배경으로 나름대로 신빙성을 얻었다. ‘괴물의 진실’을 설파하는 가이드들은 제각각의 경험과 상상을 덧붙여 말을 마음껏 허공에 쏘아 올렸다. 오성급 호텔의 통유리 창에 비친 풍경을 보면 도무지 믿지 않을 수 없는 말들이었다. 오늘도 역시 안개가 짙게 드리웠다. 호수의 괴물이 안개 덮인 수면 위로 제 머리를 살짝살짝 끌어올렸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암막 커튼을 쳤던 지영과 정훈은 괴물을 보지 못했다. 옥상에서 도르래 줄을 타고 내려온 청소부들이 커튼 뒤의 유리창을 닦았다. 빗금 같던 새똥 흐른 자국이 말끔하게 지워졌다. 바람이 불어왔다. 청소부들이 타고 있는 나무 의자가 유리창을 두드렸다. 바람 탄 물결 사이로 괴물이 유유히 헤엄을 쳤다.
얼씨구, 이 인간 좀 봐? 여태 못 들어올 거믄 숫제 낼 들어오지 그려? 정자 위에 올라가 있던 병덕이 삼십 분도 넘게 용을 썼지만 몸이 뜻대로 되지 않아 온갖 신음만 내뿜었다. 그렇게 급하믄 차라리 어제 들오든가. 병덕은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오늘도 안 되려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된 지 벌써 오 년 가까이 되었다. 특별히 두드러진 병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내심 억울하기까지 했다. 정자가 온갖 약을 다 구해다 줬지만 병덕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늘 하던 곳을 벗어나 새로운 장소에서 시도하면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싶었다. 병덕은 큰 맘 먹고 가장 저렴한 패키지여행 상품을 예약했다. 정자 몰래 모아 둔 비상금 통장은 결혼 삼십 주년 기념을 위한 남편의 선물로 둔갑되었다. 옆 가게 사장들에게 결혼 삼십 주년 기념 여행이라고 자랑도 한껏 해두었다. 여기저기서 기념 턱을 내라는 통에 술도 여러 번 샀다. 여행을 떠나는 날 직전까지 술을 마시고 들어왔다. 여행 가방을 싸던 정자에게 정강이를 걷어차였다. 여행의 첫날인 어젯밤에도 실패했다. 참을 만큼 참았다는 듯이 정자가 장에서 튀어나온 듯한 소리를 질렀다. 야 이놈의 인간아, 술 좀 작작 처먹으랬지. 어허, 남편헌티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우리가 남이여? 남이지 그럼. 당신이 내 아들이야? 아들이면 때리기라도 해서 가르치것다. 어허, 이걸 어매가 워뜨케 가리킨댜? 인간아 그런 뜻이 아니고, 평소에 몸 관리 좀 하지 허구헌날 술타령만 하니 이게 되냐? 될 것도 안 되겄다. 어허, 이만큼 사는 게 누구 때문인디 자꾸 이것만 갖고 그려……. 안 되는 걸 어쩌라고. 안 되면, 되게 해야지. 특전사 정신 몰라? 안 되면 되게 해라! 왜 이려…… 나, 방위잖여.
부부지간에 응당 오가야 할 운우지정적인, 오르가슴 충만한 대화는 없고 말을 가장한 일방적인 힐난만 가득했다. 아무리 떨어져 누워도 넓기만 한 침대에서 병덕은 차라리 DNA였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엄마 배 위에서 트림을 하고 잠들던 때도 이보다는 좋을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처음 만나던 날…… 에잇, 말을 말아야지. 그는 정자가 한 마디만 더 하면 창밖으로 뛰쳐나갈 마음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하지만 병덕은 내내 뚫어져라 쳐다보던 창유리가 너무 깨끗해서, 밤이 너무 어두운 까닭에, 맨정신으로 십층에서 뛰어내리기는 아무래도 어려운 날이어서 유리창이 아닌 멀쩡한 문을 열고 제 발로 걸어 나왔다. 두 손 가득 한국에서 가져온 소주를 들고, 파자마 주머니에 광천 조미김 몇 봉지를 챙긴 다음이었다. 문을 열고 나오다 누군가와 부딪힐 뻔했다. 앞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할 만큼 병덕의 눈과 마음이 한가하지 않았다. 누가 뒤따라오거나 말거나 오로지 술 생각만 간절했다. 병덕은 무조건 아래로 추락해 버리고 싶은 마음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갔다가 캄캄한 지하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슬그머니 1F 버튼을 눌렀다.
로비의 소파로 걸어가는 동안에 병덕이 더 참지 못하고 소주병을 땄다. 여행 내내 정자의 손 대신 이 플라스틱 소주병을 잡고 다녔다. 소주의 힘으로라도 아내를 만져 보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내의 등만 보고 누워 있는 것보다야 호텔 로비의 소파가 훨씬 편했다. 조도가 낮은 조명등 아래 모여 있던 호텔 직원들이 술을 들고 휘적휘적 걸어오는 병덕을 피해 본인들이 지켜야 할 자리로 돌아갔다.


아무도 호텔 밖으로 나와 짙어진 안개의 안부를 확인하지 않았다. 호수의 괴물은 물속에서 몸을 뒤채다가 일어났다가 누웠다가 헤엄쳤다가 지느러미로 돌을 굴렸다가 곧 심심해졌다. 처음 이곳에 왔을 적에 괴물은 한동안 통유리 안을 구경하는 재미에 빠져 자주 호텔 쪽으로 갔다. 한번은 물에 빠진 아이를 등으로 받아서 밀어 올려준 적도 있었다. 다음날 호수로 올라온 공안을 통해 괴물의 선의가 사람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알았다. 깊게 상처받은 괴물은 그 뒤로 절대 호수에 온 사람들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제 일에만 집중하는 것이 호수의 날들을 무탈하게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터득했다. 관광객들 사이에서는 깊은 밤마다 온몸이 물에 젖은 괴물이 호수를 이탈하여 산 곳곳을 드나든다는 말도 돌아다녔다. 처음에는 그것을 증빙하기 위해 슬쩍 슬쩍 물 바깥으로 나가 보았다. 그 역시도 오래지 않아 흥미를 잃었다. 그렇다고 해서 호수의 생활이 모두 심드렁한 것만은 아니었다. 청소부들이 시시때때로 도르래를 타고 오르내리며 괴물에게 안부를 물어 왔기 때문이었다. 유리 문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어도 이 유리창만큼은 자신의 손을 거쳐야 말끔해진다는 자부심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괴물이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면 뒤돌아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호수의 물이 더 힘차게 찰방거렸다. 청소부들이 밤낮없이 유리창에 걸레질을 하는 덕분에 괴물은 외롭지 않았다.
청소부들은 유리창의 일부나 다름없었다. 안쪽의 시선이 늘 청소부 등 뒤를 향했기 때문이었다. 종종 자신이 ‘마음을 가진 사람’임을 잊고 유리의 일에 열중해야만 이겨낼 수 있는 눈빛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것은 정말로 몸이 투명해지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은 유리 안쪽의 일에 눈을 감고, 바깥의 얼룩을 지우는 일만이 세상의 전부라고 여겼다. 간혹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다가 투숙객의 항의를 받기도 했지만 도르래 줄을 타고 올라가 버리면 그만이었다. 날이 갈수록 허공에서 유리와 호수 쪽으로 손짓하는 각자의 기술이 다양해졌다.
오늘 밤에도 시비가 벌어졌다. 투숙객 한 사람이 두 손 가득 술병을 들고 자꾸 창밖으로 말을 걸어왔던 것이다. 몸이 아파 열이 나는지, 술에 취했는지 모를 정도로 낯빛이 붉었다. 우연찮게 유리 밖의 사람을 본 병덕은 말을 걸고 싶어서 창을 두드렸다. 유리는 물론 꿈쩍도 하지 않았고 창밖의 청소부는 여전히 제 일에만 열중했다. 이제는 저들마저 자신을 무시하는가 싶어 화가 난 병덕이 소주병을 창에 던졌다. 제 앞으로 다시 튕겨 온 병을 되차려다 뒤로 발라당 넘어지려는 병덕을 민준이 떠안았다. 민준이 병덕을 부축하기 직전에 도르래가 돌아갔다. 민준은 아무도 없는 창에다 대고 무엇인가에 홀린 듯 화를 내는 병덕을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 여러 모로 무시당한 노여움에 허리가 꺾인 육십대와 이십대 중반의 갓 제대한 예비역은 애당초 힘겨루기 상대가 되지 않았다. 병덕을 말리러 달려왔던 호텔 직원들은 너무도 순식간에 제압된 그의 모습을 측은히 여기며 돌아섰다. 이것이 두 사람이 1층 로비 소파에 나란히 앉게 된 이유였다.


병덕을 진정시킨다기보다 민준도 갈 곳이 필요했다고 말하는 게 옳겠다. 딱 삼일 전에 전역한 예비역이자 예비 아빠인 민준은 네 살 연상의 신부가 너무 낯설었다. 도통 울음을 그치지 않는 신부에게 밖에서 바람 좀 쐬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방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앞방 문도 열렸다. 급히 뛰쳐나온 것과는 다르게 갈 길을 몰라 하는 갈지자 발걸음도 그렇고, 자꾸 로비의 유리창에 시비를 거는 것도 정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민준은 전역을 한 몸이었지만 아직도 군바리 정신이 충만한 상태였다. 전방 초소에서 간첩을 좇고 비무장지대 민간인들의 어려움을 도맡아 해결해 주던 마음 넓은 김 병장. 누군가 어려움에 빠진 모습을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는 자부심이 가득했지만 정작 곤란함에 처해 있는 것은 바로 민준 자신이었다. 그는 소파에 앉아 두 병째 소주를 따는 병덕의 손목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병덕이 제 입으로 가져가려던 소주병을 민준에게 내밀었다. 각자 술병을 하나씩 들게 된 두 사람은 말없이 호텔 밖을 내다보았다. 민준은 안개 자욱한 밤의 풍경이 자신의 미래처럼 느껴져 소주와 눈물을 한꺼번에 삼켰다.
내 아이가 맞아? 억지 춘향 격이었던 결혼식이 끝나고 신혼여행을 와서도 하루가 더 지난 오늘 밤에야 취기를 빌려 물어본 말이었다. 이러지 않아야 했던 것일까. 유희는 억울하다는 몸짓으로 한 시간도 더 넘게 울었다. 참다못한 민준이 창밖의 안개에 제 몸을 파묻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방문 손잡이를 그러쥐었다. 방을 나오기 직전에 미니바에 비치된 미니어처 양주들을 집어왔다. 애당초 사단장의 고명딸과는 같은 의자 혹은 같은 잔, 같은 이불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같이 몸을 섞는 게 아니었다. 그게 다 이 웬수같은 놈의 술 때문이었다. 술김에 딱 한 번 잔 것 같은데,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느낌이었는데, 전역 즈음에 배부른 유희가 사단장의 지프차를 타고 민준 앞에 나타났다.
민준은 마당에 무릎을 꿇고 있다가 아버지에게 개 줄로 맞았다. 줄이 풀린 채 자유롭게 마당을 활보하던 웰시 코기가 다가와 민준의 허벅지를 갉았다. 어머니는 아내 될 여자의 배를 보고 한숨만 쉬었다. 그럼 간단하게라도 식부터 올리자고 민준의 아버지가 제안을 해왔다. 예비 장인어른은 ‘제대로 된 여행도 다녀와야 한다’며 한술 더 떴다. 서슬이 퍼런 사단장의 기세에 병장으로 전역한 아버지 역시 큰소리를 치지 못했다. 전역식과 동시에 결혼식이 진행되었다. 군 장병들의 우레와 같은 축하 속에 배부른 신부의 웨딩드레스가 처연히 바람에 휘날렸다. 민준은 혼주에게 인사를 할 적에 대성통곡을 해버리는 바람에 장병들의 야유와 처가댁 여러 어른들의 빈축 섞인 덕담을 들었다.
병덕은 세 병째 소주를, 민준이 주머니에서 미니어처 양주를 꺼냈을 즈음에 도사가 나타났다. 지나가다 들렀다고 누가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이며 친근히 다가왔다. 일평생 사람의 기색을 살피는 것으로 업을 삼아 온 도사가 민준에게 소주 한 병을 내밀었다. 민준이 반색하며 병을 받들었다. 눈에 익은 영롱한 초록빛에 이끌린 병덕이 도사 옆으로 비칠비칠 다가갔다. 너른 품의 도사는 민준과 병덕의 말을 모두 받아 주었다. 손님 너무 씨끄럽습니다. 조용히 해씹시오. 호텔 직원이 찾아와 한국말로 주의를 주었다. 도사가 만 원짜리 한 장을 그에게 건넸다. 도르래에 매달려 있던 사람들이 민첩하게 1층까지 내려와 제 할 일들을 마친 시간이었다. 빈 도르래가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다. 마저 끌어올리지 못한 나무 의자 하나가 허공에 떠서 유리창을 두드렸다. 오랫동안 허공에 매달려 있던 청소부들이 기지개를 켜며 호수 쪽으로 걸어갔다.


이 밤에 커플끼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방은 지영과 정훈뿐이었다. 지영의 살결이 매우 뽀얗고 차졌다. 정훈은 키는 작지만 매우 다부진 몸매의 소유자였다. 정훈의 근육질 피부 위에 연두부 같은 지영의 살이 포개졌다. 둘은 오직 상대방의 몸을 핥는 데만 열중을 했다. 여러 번 붙었다 떨어지고, 한쪽이 잠들 만하면 다른 한쪽이 흔들어 깨우는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창밖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던 빈 의자가 유리창을 노크해도 개의치 않았다. 지영의 두 다리가 정훈의 허리를 먹잇감 거머쥔 쌍두사처럼 휘감았다. 매우 로맨틱하고 일견 성공적인 밤이었다.
고스톱 하다 싸우던 여고 동창 삼인방은 팩을 붙이고 누워 있었다. 담요를 뒤엎으며 싸우던 사람들 같지 않게 다정한 모습이었다. 몇 십 년째 반복하는 여고 시절 총각 선생님 이야기부터 첫사랑, 첫 경험, 첫 출산 때 시댁이 어떻게 서운하게 했는가에 대하여 마치 처음 이야기해 보는 사람들처럼 광분했다. 서방도 없는 처지에 친구들끼리나 서로 받쳐 주고 사는 거지 누가 있어 우리를 위로하겠느냐는 자조 섞인 말에도 크게 웃었다. 팩 하면서 웃으면 주름 간다고 타박하는 목소리는 수연인가, 연숙인가. 민화는 조금 전에 얼핏 스쳐 온 누군가의 느낌을 찾아 가만히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민화는 희진이 누구하고 사귀든, 여기저기 이간질하며 살거나 말거나 그냥 내버려둘 걸 그랬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물론 또 언쟁이 붙을까 봐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다시 한 번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면, 살아 있는 정혜에 관한 것이어야 했지만 너무 꽁꽁 숨어버려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다. 졸지에 친구와 남편을 잃고 황망해하던 얼굴을 떠올리면 눈앞이 먹먹하게 흐려졌다. 배신감과 슬픔에 압도된 장례식장에서 정혜를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나마 연숙은 희진의 장례를 치르느라 정혜 쪽으로는 가지도 못했다. 가슴 아프지만 더 찾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 육십일 세들.
유희가 벌써 두 시간째 이불을 뒤집어쓰고 우는데도 민준이 돌아오지 않았다. 유희는 남편이 자신을 버리고 도망가 버린 것은 아닌가 덜컥 겁이 났다. 더 솔직히 말하면 민준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가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수류탄 핀을 뽑은 아버지의 기세에 눌려 결혼을 하기는 했지만 그가 진짜 아이의 아비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아이가 생길 즈음에 잔 사람은 두 명이었으니 확률은 오십 대 오십이었다. 아비가 맞으면 계속 살고, 아니면 산후우울증을 핑계로 이혼을 요구할 계획까지 세웠다. 뱃속의 아이가 어미의 마음을 읽은 까닭일까. 태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드레스 차려 입고 아버지와 함께 버진 로드를 걸어갈 적만 해도 제 어미의 배를 퉁퉁 건드리던 녀석이었다.
자신이 첫 여자라 고백을 해오던 김민준 상병이었다. 군에서 사단장의 딸과 이렇게 될 줄은 본인도 몰랐기에 매우 겁을 냈다. 모르면 알면 되지 않느냐고 몇 번이나 다그치고 나서야 쭈뼛대며 다가오던, 어쩌면 이 아이의 아버지. 그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단 한 번도 되묻지 않았다. 유희는 민준이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궁금해서 더 우는 척을 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급해진 유희가 객실 실내화를 신고 카드키를 빼는 것도 잊은 채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거기서 들었다. 민준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내 아이가 아닌 것 같다며 토로하는 소리를. 로비의 소파에 앉아 있는 실루엣은 분명히 민준이었고, 목소리도 민준이고, 확 풍겨 오는 땀내도 민준이 맞았다. 하지만 남편을 위로하는 저 어둠 속의 목소리는 누구인가. 유희는 벽 뒤에서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호텔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안개 탓에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낮에 본 호수 쪽으로 무턱대고 올라갔다. 이렇게 하면 나중에 민준이 자신을 찾으러 나왔을 때 결백을 주장하고, 모욕당한 신부의 마음을 표현하기에 안성맞춤이라는 계산까지 끝냈다. 유희는 한 손으로 배를 보호한 채 안개를 헤치며 걸었다. 뱃속의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아빠는 저 사람이다, 저 사람이다, 저 사람이다’라고 세 번이나 외쳤다. 그제야 아이가 뭉클뭉클 움직였다.
군복을 찢어 미니스커트를 해 입어도 누가 뭐라고 할 수 없는 사단장의 고명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전국의 군대를 돌아다녔다. 유희는 늘 군용 지프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 첫 경험은 지프차 운전병이었고, 두 번째는 아버지 비서, 세 번째는 동떨어진 막사 안에서 쉬고 있던 최 상병, 네 번째는 누구였더라. 다섯 번째는 피엑스에서 냉동만두를 비벼 주던 정 병장이었다. 기억나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남자들의 질문은 일정한 패턴이 있었다. 처음인지 아닌지의 여부, 오늘 어땠느냐는 식의 확인, 아이의 아비가 누구인지 어찌 아느냐는 식의 발뺌. 어린놈들일수록 경험의 횟수를 궁금해 했고, 사회생활 좀 하다 온 치들은 테크닉과 힘에 대한 질문을 주로 던졌다. 그나마 최근에 잔 두 사람에게 아이에 관한 질문을 던져 각기 다른 답을 들어 봤을 따름이었다. 아비가 누구든지 간에 이 아이만큼은 지켜주고 싶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던 유희가 누군가와 부딪쳤다. 양쪽에서 한국말로 된 욕설과 비명을 한꺼번에 내뱉었다.
욕을 한 쪽은 뱃속의 아이에게 좋은 말로 아비를 세뇌시키던 유희였고, 비명을 지른 쪽은 마리였다. 마리는 몸이 다 닳을 때까지 당신을 사랑하겠노라는 태도로 도사와 한바탕 질펀하게 논 다음에 기절하듯 잠들었다. 술이 모자란 도사가 밖으로 나가고 머지않아 마리가 눈을 떴다. 그 뒤의 일은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다 정신을 차려 보니 도사의 귀중품을 양손에 들고 산 속을 헤매고 있었다. 이미 절도 전과 3범인 처지였다. 아연실색해진 그녀는 여기까지 와서 이러면 안 된다고 도리질을 치며 호텔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밤 깊은 이국의 호수에서 익숙한 한국말을 들으니 겁이 나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누구세요’만 연발했다. 마리는 일단 통성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왕쯔 호텔에 묵는다고 먼저 밝혔다. 나두요, 소리가 덥석 다가왔다.
둘은 잠시 헤어졌다 만난 의자매처럼 팔짱을 끼고 눈앞을 더듬어 안개에 파묻힌 호텔 쪽으로 걸어갔다. 언니는 왜 여기 혼자 계세요. 그냥요. 그쪽은 왜 나와 있어요? 몰라요, 흑. 드디어 기다리던 질문을 들은 유희가 흐느꼈다. 마리는 제가 처한 상황은 순간적으로 까맣게 잊은 채 유희를 달래는 일에 몰두하다가 새신랑이 아이를 의심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이성을 잃었다. 마리가 배를 감싸고 우는 유희를 이끌고 호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무책임한 놈들은 몸의 털을 다 태워버려야 한다는 말을 의기양양하게 내뱉다가 우뚝 멈췄다. 도무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것의 형상이 안개 속에서 튀어나왔다. 말 그대로 ‘짐승’이었다. 괴상한 몸통 밑으로 사람 다리 여러 개가 있었다. 몸통에서 물이 줄줄 흘렀다. 다리들이 물에 흠뻑 젖어 마치 오줌을 싸면서 걷는 것 같았다. 눈앞의 거대하고도 뚱뚱한 지네의 형상에 놀란 마리와 유희는 서로의 팔을 부여잡고 덜덜 떨었다. 조용히 호텔 뒷문을 지나치려던 짐승이 재빠르게 호수 쪽으로 달려갔다. 어둠에 파묻히며 사람 신음소리를 내던 짐승이 몸 쪽으로 다가든 안개들을 거칠게 튕겨냈다.
바다로 향하는 진짜 이무기를 만난 것인지, 여러 발 달린 지네 혹은 어떤 사람들을 만난 것인지 헷갈렸다. 겁에 질린 두 사람은 일단 그것에 대해서는 입을 닫았다. 얼른 화제를 돌려 떨리는 목소리로 민준이 같은 놈은 혼쭐을 내야 한다고 소리치는 마리를 방패 삼아 유희가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이럴 때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혹시 정훈이 로비에 나와 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유희는 옷 속에 가려져 있지만 꽤 단단해 보이는 잔 근육의 매력을 온몸으로 알고 있었다. 벗겨 보지 않아도 투시가 가능할 정도였다. 여행 내내 몸은 민준 곁에 있어도 눈은 정훈을 바라봤다. 그를 매만지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불룩 솟아오른 제 배만 쓰다듬었다. 이제부터 아이 엄마로, 민준의 처로 행동하려면 저간의 것을 잊고 더 많은 부분을 참으며 살 수밖에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그래도 딱 한 번만…….


프런트 직원들은 안개가 강한 날인지라 밖으로 나가는 투숙객들에게만 주의를 주고는 로비에서 술추렴하는 한국인들은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 덕에 로비는 이미 취한 채로 의형제의 연까지 맺은 남자들의 목소리로 왁자했다. 여기가 호텔 로비인지 술집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다행히 관광객이 많지 않은 비수기였다. 민준은 곧 태어날 아이와 제 상황에 대한 푸념을, 박 씨는 오래전부터 앓아 오던 전립선에 대한 고민을 털어놨다. 도사는 마치 이 둘의 스승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지, 암만 그렇고 말고를 연신 남발했다.
현관 쪽에서 유희와 마리가 나타나자 도사와 민준이 차례대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유희의 자애로운 언니이고 씩씩한 위로자이던 마리는 순식간에 연약해졌다. 마리가 도사의 품으로 쓰러지듯 안기며 조금 전에 겪은 일들을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수백 개의 발이 달린 엄청난 괴물을 만나서 유희가 넘어졌고, 안개가 내려와 애 아빠가 누구인지 물어봤다는 내용이었다. 도사는 너무 놀란 탓에 혀가 반 토막 난 그녀의 마음 역시 모두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리가 도사의 손을 엘리베이터 쪽으로 이끌었다. 유희가 온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민준은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의 어깨를 감쌌다. 그는 인생의 고비 때마다 늘 자신의 발목을 잡았던 우유부단한 매력을 마음껏 뽐내며 사내다운 척 유희의 몸을 부축했다. 남편의 손에 이끌리던 유희는 로비에 있는 패키지 일행 중에서 다른 남자들은 다 나와 있는데 왜 정훈만 빠져 있는지 궁금했다. 온갖 소란을 다 떨던 커플들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고, 병덕이 홀로 로비를 지키는 패잔병처럼 앉아 술을 마셨다. 마누라는 자나? 괜히 한번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두 눈을 크게 떴다가 소주 한잔 마시고 까무룩.
마리가 도사에게 매우 선정적인 포즈로 매달렸다. 손에 든 도사의 물건을 들키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볼을 맞대다가 혀를 길게 내밀어 도사의 입술을 들추었다. 어허, 공공장소에서, 이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도사는 굳이 마리를 말리지 않았다. 불뚝 솟아오른 도사의 아랫도리가 유희의 눈에도 들어왔다. 마리는 엘리베이터가 한 층 한 층 올라갈수록 더 과감해졌다. 민준이 헛기침을 하자 유희가 배를 감싸며 민준 쪽으로 한 발 다가갔다. 민준이 얼결에 뒤로 물러섰다. 남편의 변덕에 유희가 몹시 서운해지려던 찰나 마리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던 도사가 눈을 까뒤집고 옆으로 쓰러졌다. 눈물이 맺힌 유희와 마리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민준이 민첩하게 도사의 몸을 떠받쳤다.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민준이 도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열린 문 쪽으로 넘어졌다.
10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문이 토해 낸 이들의 모습이 괴상해서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놀란 마리가 울면서 119를 외쳤고, 유희는 앰뷸런스가 영어로 무엇인지 생각이 나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다가 구급차 좀 불러 달라고 한국말로 울부짖었다. 민준이 벌떡 일어나서 도사의 입을 벌리고 혀를 잡아 뺐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호텔 로비와 병원으로 전화를 하느라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도사의 몸이 로비와 엘리베이터에 반반씩 걸쳐 있던 까닭에 문이 열렸다 닫혔다가 또 열렸다. 마리는 도사의 물건을 손에 쥔 채 바들바들 떨었다. 유희는 배가 딴딴하게 뭉쳐 가는 것을 느끼며 주저앉았다. 민준이 한 손으로는 도사의 심장 마사지를 하고 다른 한 손은 계속 혀를 꽉 잡았다.
밖의 소란에 무심코 방문을 열었던 정훈이 앞뒤 잴 것도 없이 엘리베이터 앞으로 뛰어왔다. 정훈은 민준에게서 다급히 심폐소생술을 이어 받았다. 유희는 절도 있는 정훈의 손동작에 한 번 더 반했다. 그러면서 저 정의로운 손은 혹시 의사가 아닐까 하고 넘겨짚었다. 가운을 챙겨 입을 새도 없이 뛰어 나온 정훈의 벗은 어깨가 유희의 눈에 콕 박혔다. 역삼각형의 몸매가 유독 돋보이는 정훈은 의사가 아닌 큰 수영장의 수석 코치였다. 심폐소생술은 수영선수이던 중학교 때부터 익혀 온 것이었다. 함께 온 지영은 수영장의 상급반 회원이었다. 방 침대에 알몸으로 누워 있던 유부녀 지영은 정훈이 왜 돌아오지 않는지 무척 궁금했지만 나가 볼 수가 없었다. 정훈과 민준의 노력 덕분에 도사의 의식이 돌아왔다. 엘리베이터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웠다. 마음이 놓인 민준은 왜 나에게만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다. 그러다 곧 아내와 아이를 의심한 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민준이 모인 사람들을 헤치고 유희 옆으로 다가갔다.
이 팀의 여자 가이드가 머리띠를 빼지도 못하고 놀란 얼굴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한껏 올린 앞머리와 지워버린 눈썹 때문에 그녀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리지 못했다. 도사가 힘겹게 눈을 떴다. 구급차는 쉽게 오지 않았다. 마리는 도사가 잘못된다면 이 관계를 남들에게 어떻게 밝힐 것인가 재빨리 생각해 두었다. 가이드가 어딘가에 수차례 전화를 건 끝에 앰뷸런스의 도착 소식을 전해 주었다. 구급요원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다. 도사는 이제 괜찮다고 말하다 여러 사람에게 번쩍 들려 갔다. 1층 현관에 뒷문을 활짝 열어 둔 포터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앰뷸런스임을 알리는 초록색 경광등이 차 위에서 깜빡거렸다. 도사와 마리, 가이드가 동승을 했다. 곧이어 차가 안개를 헤치며 산 밑으로 향했다. 유희와 민준이 얼이 빠진 모습으로 방에 들어갔다. 정훈이 제일 늦게까지 남아 마리가 흘린 물건들과 도사의 신발을 챙겼다.


다시 한바탕 밀애를 끝낸 지영과 정훈이 깊이 잠들고, 마스크 팩을 붙인 여고 동창 삼인방이 각자 방 하나씩을 차지했다. 유희가 다시 구슬피 울었다. 민준은 그녀를 위로하느라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병덕은 아예 1층 로비의 소파와 한 몸이라도 되는 것마냥 푹 파묻혔다. 막 앰뷸런스를 떠나보낸 호텔 직원들도 병덕까지 챙기자니 좀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모포를 하나 가져다 덮어 주었다. 머지않아 병덕이 모포를 걷어차고 일어나 지금까지 먹은 것들을 모두 내뿜었다. 속이 시원해진 병덕이 토사물 위로 다이빙하듯 몸을 던졌다.
해가 뜨기 직전에 도사와 마리, 가이드가 돌아왔다. 청소부가 제가 토한 것들 위에서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병덕을 깨웠다. 본인이 왜 로비 바닥에서 자고 있는지 영문을 모르는 병덕에게 가이드가 다가갔다. 그녀는 병덕과 눈이 마주치자 중증 간질 환자에게 술을 주면 어떡하느냐고 비명에 가까운 힐난을 쏟아냈다. 뒤따라온 마리의 얼굴이 샐쭉해지고, 어찌할 바를 모르던 도사가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갔다. 엉망진창이 된 병덕을 드디어 발견한 정자가 조금 전의 사람들보다 더 크게 화를 냈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소리들에 정신을 차린 병덕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들이 왜 화를 내는지 모르지만 여튼 자신이 혼나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병덕은 아예 귀가 안 들리는 사람처럼 말없이 일어나 제 방으로 올라갔다. 청소부가 민첩하게 병덕의 흔적을 지웠다.
팩의 효과로 어제보다 더 얼굴이 번들거리는 여고 동창 삼인방과 정자 그리고 정훈 커플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왔다. 날이 밝고 나서야 잠든 민준 덕에 유희는 밥을 먹지 못했다. 여전히 상거지 꼴인 병덕과 허겁지겁 짐을 챙겨 온 마리와 도사까지 한 자리에 모였다. 모두의 요청으로 마지막 남은 쇼핑센터 스케줄이 취소되었다. 가이드가 공항까지 배웅을 나가는 것도 거절했다. 이 일은 여행객들이 쇼핑센터에서 구비한 물건 값의 오 프로를 수당으로 받는 구조였다. 공항에서 배웅을 하면 남은 돈을 몽땅 주고 가거나 비공식적인 팁을 찔러 주는 사람도 많았다. 밤새 그 고생을 시키더니 이제는 쇼핑도 안 하겠다는 사람들을 가이드가 질린 눈빛으로 쳐다봤다.
“모쪼록 즐거운 여행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내내 건강하세요. 안녕히 얼른 가세요.”
가이드가 서둘러 버스를 출발시켰다. 호텔의 도어맨이 현관문을 막 닫으려는 찰나 청소부가 소파 사이에서 지갑과 휴대폰을 집어 올렸다. 다시 가이드가 운전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많은 것들을 체념한 목소리였다. 버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후진으로 올라오다 호텔 현관문을 쾅 박았다. 문 위에 매달린 왕쯔 호텔의 현판이 툭 떨어졌다. 차 안에서 아무도 내려오지 않았다. 도어맨과 가이드가 입을 떡 벌리고 버스와 현판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청소부가 달려와 빗자루로 버스의 뒤꽁무니를 거세게 내리쳤다.


관광객들이 떠나자 다시 도르래를 탄 사람들이 허공에 떴다. 호수 안으로 들어가 있던 괴물이 기지개를 켰다. 새떼가 날아와 유리창에 부딪쳤다. 날개가 부러진 새를 청소부가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호텔의 현관에 뒤늦게 실금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용히 문을 가른 금이 ‘유리주의(glass)’라고 쓰인 여러 나라의 말들을 뒤덮었다. 커다란 현관문이 세심하게 갈라졌다. 금은 호텔 현판이 있던 쪽으로도 다가갔다. 새를 줍던 청소부와 도어맨이 뒤늦게 문을 붙들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새로운 투숙객들을 실은 버스가 올라왔다. 유리에 금이 가는 것보다 버스가 호텔로 올라오는 속도가 더 빨랐다. 허공의 청소부들이 건물 위로 솟구쳤다. 호수를 유영하던 괴물이 긴 숨을 내뿜었다.
금이 유리호수 쪽으로 맹렬하게 번져 갔다.




작가소개 / 이은선(소설가)

1983년 충남 보령 출생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첫 소설집『발치카 No.9』이 있다.



《문장웹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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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집에 사는 소녀1) 김숨 1 내 방엔 거울이 있어. 빛— 빨간색. 세상의 모든 빛— “지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2 지금, 지금, 그리고 지금, “난 다른 곳에 있고 싶어.” 3 딱딱하게, 딱딱하게, “내 사랑을 받아 주세요.” 다른 곳에선 똑같은 노래가 다르게 흘러, 다르게 슬프게, 다르게 쓸쓸하게, 다르게 외롭게. 다른 곳의 다른 나. 난 나를, 난 나를, 딱딱하게, 딱딱하게, 빨갛게, “난 설레고 싶어.” 4 다섯 살 때 처음 빛을 봤어. 네 곁에, 내 곁에, 빛은 환한 어떤 것. 아, 난 날······. 다섯 살 때 처음 빨간색을 봤어. 엄마가 빨간색을 가져다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았어. 빨간색을 나는 외우고 외웠어. 내가 빨간색을 외우자 엄마가 빨간색을 치우고 노란색을 놓았어. 나는 노란색을 외우고 외웠어. 그리고 파란색, 흰색, 검은색.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들어졌어.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족해. 다섯 색깔 무지개, 다섯 색깔 도마뱀. 분홍색은 꽃에게. 초록색은 달에게.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여 있는 빨간색만 나는 볼 수 있어. 내 방 거울은 흐르지 않아······. 5 딱딱한 벽에 딱딱하게 거울이 걸려 있어. 거울이 날 봐. 거울은 날 봐. 거울은 엄마 몰래 울고 있는 날 봐. 난 날 안 봐. 음, 흐른다는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내가 생각하고 싶은 건 오직 하나. 6 빨간색 크레파스를 선물 받고 난 흥분해 소리 질렀어. “엄마, 난 화가가 될 거야!” 빨간색 크레파스가 흰 도화지 위를 신나게 날아다녔어. (그녀의 엄마) 뭘 그리는 거야? (그녀) 집! 빨갛게, 빨갛게, (그녀의 엄마) 뭘 그린 거야? (그녀) 집! 엄마, 난 집을 그렸어! (그녀의 엄마) 네가 그린 집을 만져 보렴. 엄마가 내 손을 내가 그린 집으로 데려갔어. (그녀의 엄마) 집에 창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지붕이 없네. 난 창문을 본 적 없어, 난 문을 본 적 없어, 난 지붕을 본 적 없어. (그녀의 엄마) 집에 나무도 없네. 7 집에 나무가 있어야 해? 세상에 나무가 있어야

  • 관리자
  • 2024-05-01
원경

원경 성혜령 건강검진을 12월 마지막 주까지 미루는 사람이 자기 말고도 이렇게 많으리라고 신오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기실의 긴 좌석 중간중간 빈자리가 있긴 했지만, 신오는 한구석에 서 있기로 했다. 초음파 검사실 앞 복도는 자기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헐렁한 가운에 느슨한 고무줄 바지를 입고 핸드폰을 보며 기다림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오는 이들 중 내년에는 따뜻한 휴양지에서 연말을 보낼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했다. 혹은, 오늘 치명적인 암이나 뇌동맥류 같은 것들을 발견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인생을 살게 될 사람들은? 그런 일들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었다. 직장 생활을 10년 정도 하니 주위에 아픈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전 직장 동료는 출근길에 쓰러진 뒤 안면마비를 얻었다. 한쪽 입꼬리가 위로 당겨 올라갔는데 그는 멀쩡한 다른 쪽 입꼬리도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곤 했다. 병가에서 돌아온 뒤 매일 웃는 얼굴로 제일 먼저 출근하는 동료를 보면서 신오는 이직을 결심했다. 신오는 모든 일이 가능하지만 대개 나쁜 일들이 더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되도록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꾸준히 하려고 했다. 불행은 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오히려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있었다. 복부 초음파를 보던 의사가 “어랏?” 하고 실없는 소리를 내며 배꼽 부근을 세게 눌렀을 때도 신오는 방귀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의사가 차가운 젤을 다시 묻히고 초음파 단말기를 문지르다가 복막에 종양이 보인다는 말을 했을 때는, 그래서 요새 변비가 심했나, 라는 생각이 먼저 났다. 대형 병원에 가서 생검과 CT, MRI 검사를 마치고 소화기내과 교수의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도 신오는 회사 메신저를 보고 있었다. 몇십 억 단위 공공사업의 수주가 걸린 입찰 제안서의 마무리를 앞둔 시점이었다. 병원 검사로 연차를 낸다고 했을 때 팀원들은 모두 별일 없을 거라고, 하루 푹 쉬고 오라고 말했지만 메시지를 보내면서 신오를 계속 태그했다. 신오는 그날 마지막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젊고 피곤해 보였다. 예약을 가장 빨리할 수 있었던 의사였으니 어쩔 수 없지, 신오는 생각했다. 의사는 신오가 자리에 앉자 간단한 인사도 없이 모니터 화면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마우스 커서로 신오는 잘 알아볼 수 없는 흐릿한 음영을 짚었다. 여기예요, 여기. 의사는 약간의 승리감마저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복막의 종양은 전이 암이고, 여기가 원발 암이라고. “이게 숨어 있어서 찾기 어려웠거든요.” 의사는 다시 한번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 췌장하고 담도 사이인데 위치나 크기가 좋지 않다고. 오늘이 금요일이니 당장 다음 주부터 항암치료로 크기를 줄여 보고 수술을 잡아 보자고. 신오의 핸드폰이 또 진동했다. 신오는 치료를 이주만 미뤄도 되냐고 물었다. 프로젝트가 있어서요. 이주 후에 마감이라. 의사는 처음으로 웃어 보

  • 관리자
  • 2024-05-01
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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