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신간리뷰] 인생이 한 판의 카드 게임이라면
- 작성일 2016-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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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신간 리뷰]
인생이 한 판의 카드 게임이라면
- 우다영, 『조커』 리뷰
신샛별(문학평론가)
우다영의「조커」에는 삶을 사유하는 두 가지 상이한 관점이 내장돼있다. ‘인과론’과 ‘우연론’으로 각각 요약될 수 있을 그 두 가지 관점의 교차가 이 소설에 긴장감을 부여한다. 소설의 서두에서 개에게 발목을 물린 적이 있다는 한 여자와 만나기로 돼있던 ‘나’는 그녀 대신 ‘성경’을 만나게 된다. ‘나’와 ‘그녀’의 만남이 어긋나게 된 돌발적 사건이 ‘나’와 ‘그녀’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이 소설의 기본적 얼개다. 이 얼개를 채우는 여러 에피소드들을 제시하면서 작가는 삶을 우연의 축적으로 보는 입장과 삶이 인과의 법칙을 따른다고 믿는 입장을 계속적으로 대비시킨다. 예컨대 금융사에서 근무하는 ‘나’는 “값과 합과 차, 또는 비율이나 확률을 표시하는 단조로운 숫자들” 가운데 살고 있다. 복잡해 보이지만 결국엔 오르거나 내리는 단조로운 습성을 지닌 숫자의 나열처럼 인생도 지루하고 시시한 것으로만 느껴졌던 ‘나’에게 우연히 다가온 성경은 어릴 적 앓던 자신의 병이 낫게 된 내력을 소개한다. 그리고 몸이 아픈 딸을 키우던 부모님이 신앙을 갖게 되고, 딸의 이름을 ‘성경’으로 바꿔 부를 수밖에 없게 된 까닭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부모님은 조금 다른 지점에서 해결책을 찾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식단이나 운동, 거주 환경과 같은 인과적 접근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연관이 있으리라 짐작되는 어떤 것들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가령 신에게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하는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거나, 봉사와 기부로 전혀 모르는 누군가를 돕거나, 단순하게 딸의 이름을 바꿔 보는 일들이 병을 낫게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인과의 원리에 근거한 의학지식에 기대기보다는 불가지의 영역을 상상하며 각종 미신에 이끌리게 된 성경의 부모님은 딸에게 찾아든 병의 원인을 추적하는 일을 멈출 수 있었고, 자신들의 과오로 딸이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들에게 그들이 겪는 불운은 어떤 명료한 ‘원인’에 의한 ‘결과’인 것이 아니라, 예측불가능하고 불가피한 ‘우연’의 소산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렇게 이 소설은 ‘나’와 ‘그녀’의 만남이 ‘예정돼’ 있던 자리에 돌연 성경을 등장시키고, 우연론의 입장에서 삶을 사유할 때 일어나는 변화를 성경의 입을 통해 들려주며, 성경과의 만남을 계기로 인과론에 붙들려 살던 ‘나’의 삶에 대한 관점이 바뀌기를 유도한다.
성경을 통해 접하게 된 우연론적 관점이 ‘나’에게 흥미롭게 다가온 것은 성찬과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서다. 약속을 어긴 ‘그녀’를 떠올리며 ‘나’는 개에게 발목을 물린 적이 있다는 거짓말을 성경에게 하는데, 이 농담은 개에게 물린 적이 있는 성경의 오빠 성찬의 일화를 성경에게서 이끌어낸다. 병 때문에 여러 모로 괴로웠던 성경의 어린 시절은 건강한 성찬의 입양 이후 조금씩 달라졌고, 성찬이 개에 물린 직후 성경의 병이 완쾌되자 부모님은 성찬 덕분에 가족들이 축복을 받았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성경이 보기에 애초에 성찬은 자신과는 정반대의 운을 타고난 것 같았다. 타고난 대로였다면 성찬은 내내 불운했던 성경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자신과 함께 지내면서 성찬이 개에게 물리는 사고를 당하자 성경은 자신이 짊어져야할 불운과 대신 싸워내느라 성찬의 인생이 기형이 된 것처럼 느낀다. 말하자면 성경은 성찬 몫의 행운을 빼앗아 불운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부모님은 오빠가 축복을 가지고 왔다고 여겼지만, 글쎄요. 언제나 우리 머리 위를 떠다니며 내려앉을 곳을 선택하는 것은 불운이죠. 나는 불운이 피해 간 자리에 겨우 서게 된 거예요. 그리고 어쩌면, 오빠는 만날 필요 없는 개를 만난 거죠.” 인간은 아무런 이유가 없어도 불운을 맞닥뜨릴 수 있고, 그 불운과 맞서느라 불구의 삶을 살게도 되며, 자기 몫의 불운을 겨우 피한다고 해도 가까운 누군가의 삶에 꼭 그만큼의 불운이 깃들 것이다. 그러니 아등바등 불운으로부터 도망치려 애쓰는 것도, 어쩌다 찾아온 행운에 기뻐하며 감사하는 것도 무의미한 일일지 모른다.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이 감당해야 하는 불운의 총량은 그대로일 테니 말이다. 자못 염세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이러한 성경의 사고방식에 ‘나’는 크게 매료되는데, 그것은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인생이란 우연적 사건들의 중첩이 만들어낸 하나의 그림일 뿐, 철저한 계획과 꾸준한 노력에 의해 실패나 성공에 도달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성경과의 만남 이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을 무렵의 ‘나’는 “우연의 축적이 유도하는 지점으로 떠밀려 정해진 것처럼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던 미래로 흘러 들어왔다”고 말할 정도로 성경의 사고방식에 감염돼 있다. 성공적인 인생에 대한 지침이 난무하고, 실패한 인생에 대한 난폭한 방식의 해석과 동정이 손쉬운 우리 시대에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기이하고 또 그런 만큼 위험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 기이한 사고방식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삶의 시련을 다르게 보게 하는 시야를 열어준다. 소설의 중반 이후, 아내와 어린 딸을 둔 ‘나’는 과거의 약속이 지켜졌다면 아내가 됐을지도 모를 ‘그녀’가 겪고 있는 시련을 목격하게 된다. 그녀는 두 번의 유산을 겪었고 연거푸 찾아오는 “이해할 수 없는 불운들”과 싸우면서, 급기야 자기 자신을 어떤 구멍처럼 여기게 됐다. 삶에 대한 모종의 포기를 은유하는 ‘어떤 구멍’에는 그녀 자신은 물론이고, 그녀 곁에서 고단한 삶을 함께 견뎌내고 있는 그녀의 남편이 빠질 수도 있을 터였다. 그녀 부부와 마주보는 아파트에 사는 ‘나’는 그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데, 금융사에서 일하고 있는 그녀의 남편은 성경을 만나기 전의 ‘나’와 흡사해 보인다. 숫자를 잘 알아야만 게임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녀의 남편은 과거의 ‘나’처럼 인과의 법칙에 붙들려 있는 인물이다. “아내와 그 아이들은 모두 건강했습니다. 이번에는 특히 더 조심했죠. 세심한 주의와 보호 속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도 우리는 두 아이를 잃은 겁니다. 이상한 일이지 않습니까?” 인과론적 관점에서 삶을 사유하는 그녀의 남편에게 계획과 노력과 의지로 물리칠 수 없는 불운의 습격이란 그야말로 절망적인 것이다. 그는 인생에 실패했고, 실패의 원인은 전적으로 아내에게 있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책임을 묻고 싶었던 그가 아내를 살해할 마음까지 먹게 되는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 성공과 실패, 두 가지 모델만 가능한 인생에서 그들 부부의 삶에는 다른 결론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 소설에서 그 결론은 잠시 보류됐지만, 삶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불운과 뒤엉켜 “불구의 형태”가 된 그녀 부부의 인생은 근본적으로 바뀌기가 어렵다.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한 장의 카드에 비유하고, 인생 전체를 카드 게임에 빗대어 말하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는 이 대목에서 빛난다. 숫자의 배열과 조합에 의존해 어떤 결론에 다다르고자 하는 사람은 그녀의 남편처럼 늘 질 수밖에 없다. 그는 승패의 향방을 한 순간에 바꾸는 돌발적이고 우연적인 사건, 즉 ‘조커’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죽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항상 이기는 쪽은 예고 없이 발생하는 우연의 축적에 자기 자신을 내맡기고 그 흐름에 떠밀려 미래에 이르는 사람일 수 있다. 그는 적어도 실패를 두려워하면서 오직 성공만을 위해 조바심을 내며 분투하기보다는 게임을 하듯이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니 말이다. 액자식 구성을 취하면서 이 소설은 성경과 성찬의 속이야기 바깥에 ‘나’와 ‘그녀’ 부부의 이야기를 배치했다. 그리고 속이야기를 기점으로 달라진 ‘나’의 평온한 삶을 ‘그녀’의 불행한 삶과 대조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이 소설은 삶을 바꾸는 결정적 기회, 이를테면 ‘조커’와도 같은 순간을 긍정하는 서사가 됐다. 그러나 그녀 부부의 불행한 삶을 원거리에서 관찰한 덕분에 얻어지는 ‘나’의 평온함, “아무런 의미 없이” 그녀 부부의 불행을 자기 것으로 상상해보는 ‘나’의 호기심에 동의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는 이 소설이 긍정하는 삶에 대한 우연론적 관점의 위험한 낙천성에 대한 경계이기도 하다. 주지하듯이 우리 시대의 삶의 실상은 ‘조커’가 한 장도 없는 도박판에 가깝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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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016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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